Fight ?

두려움의 연금술

by 스텔라

Fight


무엇보다도 나를 분노하게 만드는 건 권위주의적 요구 혹은 세상의 편견이었다. 그건 단지 전통에 근거한 규칙이자 행동강령이며 개별성을 고려하지 않는 전체주의적 사고방식이었다. 실질적인 효력과 상관없이 내게 그들의 올바름이나 선을 강요할 때마다 나는 앞 뒤 가리지 않고 폭발하곤 했다. 새로운 아이디어와 하고 싶은 것들에 대해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을 때 가슴이 타 들어갔다. 그 의도가 나를 아끼고 염려한다는 걸 알고 있어도 소용없었다. 그동안 그저 이런 나의 특성을 통제광, 성질이 더럽다고 결론지었다.


그건 두려움에 대한 나의 전형적인 ‘Fight’ 모드였다. 권위주의는 내 모습으로 살고, 나에 대해 이해를 받고자 하는 욕구에 반하는 가장 거대한 담론이었다. 권위주의적인 태도를 지닌 사람 중 개개인의 개성과 존재로서의 존중을 보이는 사람은 없었고, 그는 나뿐만 아니라 나와 유사한 모두에게 그러한 태도를 강요하고 무관용을 문화 속으로 내재화시킬 것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말이 통하고, 날 이해한다고 믿었던 누군가가 ‘나는 이해하지. 그런데 세상에서 다른 사람들은 이상하게 생각할 수 있기 때문에 조심해야해. 다시 생각해봐.’ 하는 조언에 슬퍼했다. 왜 세상은 날 알려고도 하지 않고 나를 규정짓고 방해하지. 왜 나는 그런 세상의 룰을 존중해야만 하지. 그 슬픔이 쌓이는 날엔 죄 없는 이들에게 반발하고 상처를 주며 분노했다. 역설적으로 그 과정에서 가장 상처받는 건 나였다. 그건 내가 이해 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이 실체화된 순간이다. 사지에 몰려 어쩔 줄 몰라 이빨을 드러낸 작고 연약한 강아지처럼 세상을 향해 매섭게 짖어 대며 고통스러워했다.


공포와 두려움은 구원의 외침에 지나지 않는다. 그전까지는 나의 화가 두려움에 비롯되었다는 걸 이해하지 못했고, 나의 화는 정당하다 생각했다. 내가 맞고 그들이 틀렸다고 생각했다. 자유로운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다름을 배척하는 세상, 편견들이 밉고 시정되어야 한다 생각했다.





두려움의 연금술


근원적 두려움은 내가 고민하고 문제를 겪고 있는 대부분의 사건들에 맞닿아 있었다. 이걸 이제야 눈치챈 게 이상하게 느껴질 만큼 전방위적으로 삶에 엮어 있었다. 그래서 누군가 나를 조금이라도 비난하는 댓글을 보면 반박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던 것이고, 유명해지는 걸 두려워하고 있었고, 누군가에게 영향을 줄까 두려워하던 거고, 시기에 따라 나를 이해해줄 수 있는 형태에 맞춰 이상형이 바뀌어 왔고, Astin과 결혼을 하게 된 것이었다. 지금의 삶에 만족함에도 더 많은 사람에게 이해 받고 싶은 기회를 만들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 없고, 서로를 전적으로 이해하는 안전하는 대화 커뮤니티 ‘본질대화클럽’을 만들고 싶다는 꿈은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렇다면 이 두려움과 욕망은 잘못된 것일까? 그저 극복하고 타파해야 할 대상에 지나지 않을까? 아니었다. 이건 나의 정체성이고 내가 누구인지 말해주는 근본 속성과 같았고 행복해지기 위한 비밀이기도 했다.


두려움에 자동적인 반응을 하지 않아야 했다. 두려움이 밀려올 때, 공포에 휩싸여 도망치거나 얼어붙거나 싸우지 않아도 별 문제가 없다는 걸 그순간 눈을 뜨고 내게 말해주어야 했다. 화가 치밀어 오를 때, 누군가에게 내가 맞다고 우기고 싶을 때 기억해야 했다. 난 이해 받고 싶은 욕망이 너무 커서 오해받는 두려움이 너무 커졌고 실제 내가 화가 나고 두려운 건 상대방 때문이 아니다. 여전히 화가 나고 두렵다면 아직 그 자리를 두려움이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나는 여전히 더 나은, 성장하고 기쁨을 주는 존재가 될 수 있다.


오랫동안 날 지배한 두려움의 메커니즘은 단칼에 끊기지 않았다. 알아차려도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오랫동안 고민했다. 순간적으로 화가 나거나 두려움이 올라오는 순간이 여전히 존재한다. 그러나 얼굴이 빨개지고 심장이 뛰긴 해도 바로 화를 내거나 방어하기 위해 공격하는 행동을 멈추고 기다릴 수 있었다. 나의 자리로 돌아가 내 두려움의 실체를 바라보았다. 어떤 반응을 보이고 있는지 내가 어떻게 화를 내고 두려움에 떠는지를 관찰했다.



책을 읽다가 두려움을 용기로 치환하는 연금술을 알게 되었다. 두려움을 없애려 하거나 저항하는 데 에너지를 쏟지 말고 사랑의 언어로 탈바꿈해서 같은 자리에 사랑을 채워 넣는 방식이다. 감정적인 반응을 하나의 신호로 받아들이고 진짜 내가 원하는 욕망과 상태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마음이 쪼그라들고 방어적인 태도를 취하고 싶을 때, ‘네가 원하는 건 모두에게 열려 있는 자세야. 만약 누군가 너를 맘에 들지 않는다고 해도 너와 좋은 관계를 맺을 수 있는 누군가가 있다는 가능성을 잊지마.’ 내 글에 대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발견하고 반박하고 싶을 때마다, ‘네가 원하는 건 솔직하게 너의 생각과 너를 닮은 글을 쓰는 거야. 너는 이미 글을 쓰고 나서 행복했잖아. 그걸로 되었어. 누군가를 설득하거나 네가 맞다는 걸 증명하려고 글을 쓴게 아니잖아.’



감정적인 반응이 줄어들자 두려움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은 점점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 두려움 자체가 싫어서 두려움을 일으키는 모든 상황을 회피했던 과거와 달리 용기를 내서 하나씩 두려움을 대면하고 있다. 이젠 나는 두려움을 알고, 그게 얼마든지 사랑과 기쁨으로 바뀐다는 걸 체험했기에 두려움이 예전만큼 두렵지 않다.


게다가 두려움은 내 생각만큼 나쁜 게 아니었다. 그건 내가 되고 싶은 사람이 누구인지 진정 원하는 게 무엇인지 현재 상황에서 무얼 바꿀 수 있는지 나보다 더 솔직하게 내게 알려주는 조금 거칠지만 믿을 수 있는 동료 같았다. 나를 괴롭히던, 나를 가두고 제한하던, 문제라 여기던 상황은 이 근원적인 두려움을 만나 껴안게 되자 새로운 가능성으로 탈바꿈하고, 미지의 영역으로 나를 이끌었다.


마침내 나는 민낯을 발견했다. 용기를 내어 걸어간 어두운 심연 속 두려움을 대면한 순간, 두려움은 나를 조종하는 본능적 문제 버튼이 아니라 사랑으로 나아가기 위한 이정표에 가까웠다.



2022년 3월 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