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얼어붙게 만든 어린 시절 두려움
나의 부모님은 심리학이 대중에게 알려지지 않던 시절 태어나고 자랐다. 그때까지 양육이란 물질적인 지원과 높은 교육열의 충족이라 여겨졌다. ‘자아존중감’과 ‘안정 애착’, ‘무조건적인 사랑’ 같은 말이 삶에 끼어들기엔 먹고 사는 생존의 문제가 아직 해결되지 않았다. 경제 발전과 외적 성장에 신경을 쓰느라 사람들은 너무 바빴다. 부모님은 날 사랑했고, 부족함 없는 지원을 보내주었지만 그들 역시 존재로서 사랑받고 싶은 욕구를 인지하지 않고 자란 세대였다. 그게 무엇인지 모르는 그들이 그걸 내게 주는 건 불가능했다.
종종 그런 그들을 미워했고 아쉬워하면서도 일말의 죄책감을 느꼈다. 가장 갖고 싶은 걸 그들이 주지 않아 요구하고 싶었지만, 다른 한 편으로 나는 넘치게 받았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었다. 원한다고 말할 수 없었다. 부모님은 나름의 방식으로 나를 사랑해주고 인정하고 믿어주었다. 그러나 나는 아무 조건 없이 한 존재로서 나를 온전히 사랑해주기만을 바랐기에 언제나 결핍에 시달렸고 그들과 진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없었다. 부모님을 사랑하고 내게 주어진 모든 것에 감사한 동시에 정서적으로 그들은 언제나 내게 먼 존재였다.
내가 자각했던 최초의 배제감은 어린 시절 할머니 댁에 방문하면 겪게 되는 따돌림이었다. 단지, ‘여자’라는 이유로 또래 형제 집단에 속하지 못하고 늘 혼자였다. 게다가 할머니는 남아선호사상이 몸에 베어 있는 분이었기에 내게 무관심했다. 나와 할머니, 할아버지 사이의 어떤 따뜻한 기억은 거의 남아있지 않았고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장례식장에서 나는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은 내게 거의 남이나 다름없었기 때문이다. 이유가 무엇이든 그건 내가 인생 최초로 경험했던 존재로서 사랑받지 못한 기억이었다.
누구 하나 날 괴롭히지 않았지만, 심심함을 넘어 나는 거의 알레르기 반응을 일으키듯이 할머니 댁에 가는 게 싫었다. 그때는 나조차도 명확한 이유를 몰랐다. 나는 마치 막 명절증후군을 경험한 새색시처럼 어린 시절부터 할머니 댁에 무조건 갈 수밖에 없는 명절이 다가오는 게 공포스러웠다. 심장이 떨리고 어깨가 말리고 주눅이 들고 머리가 아팠다. 나의 최선은 최대한 얌전히 시간을 견디다가 재빨리 도망치는 것뿐이었다. 버스를 타고 먼저 집으로 돌아왔고 혼자 남은 집에 도착해서야 해방감을 느꼈다.
그 일을 제외하고 학창 시절까지 큰 걱정 없이 즐겁게 자랐다. 작은 시골 동네였던 나의 고향에는 날 좋아해주는 또래 친구들이 많았다. 나는 무리의 중심에 속해 있었다. 선생님, 친구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고, 자연에서 뛰놀고 공부도 하며 평범하고 건강하게 성장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전학을 갔다. 표면적으로는 별 문제없이 잘 지냈다. 새로 알게 된 사실은 낯선 환경에서 꽤 낯을 가리는 성격이란 점이었다. 낯선 환경 속 나는 부자연스럽고 상대적으로 얌전하고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 물론 나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이 낯선 환경과 새로운 시작, 변화에서 일시적으로 스트레스를 받고 소극적으로 움츠러들곤 하니 별 문제가 된다고 생각하진 않았다.
지금 생각해 보면 새로운 환경에서 다시 나의 존재를 이해해줄 누군가를 찾아야 했기 때문에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장소의 맥락이나 상대방에 관한 정보가 없는 상황에서는 평상시 말이나 행동이 오해를 불러 일으킬 수도 있기 때문에 한층 조심스러워졌다. 내 행동에 제제를 가하고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는 그 시간은 꽤 고통스러웠다. 본능적으로 그 시간을 줄이기 위해 눈치가 발달하게 되었다. 문맥이나 맥락, 상대방의 감정, 상대방의 관계와 사건을 빠르게 파악하면 누군가에게 나를 얼만큼 보여줘도 좋을지 알게 되기 때문이다. 언제나 내 관심은 하나였다. 꾸미지 않은 자연스러운 내 모습을 공유할 사람을 찾는 것이었다.
따라서 누군가에게 주목을 받거나 다수와의 관계에서 인기를 얻거나 학급 반장 같은 직책을 갖는 건 내게 바보 같고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다수에게 제대로 이해될 확률은 사적 관계보다 적다. 내겐 의미 없는 에너지 소모나 다름없었다. 나는 두루두루 사람들과 어울리며 인맥관계를 넓히는데 관심이 없었고, 자연스럽게 좁고 깊은 관계를 지향하게 되었다. 오해받거나 반쪽 자리 얕은 인간관계를 지키느라 힘을 빼기보단 아예 싹을 잘랐다. 지금 생각해보면 이해 받지 못한다는 두려움을 미리 차단하기 위한 방어기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