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쁜 글을 쓰는 사람

진정 행복을 아는 사람은 타인의 행복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by 스텔라

비 오는 토요일 저녁, 관악구 독립서점 ‘살롱드북’에서 열리는 강이슬 작가님 북토크에 다녀왔다. 행복한 글을 쓰는 사람의 실제 음성이 듣고 싶어졌기 때문이다. 책을 아주 조금 읽고 간 그 북토크에 앉아 내겐 책을 좋아한다는 말이 두 가지 의미로 나뉜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 책을 좋아한다.’ 이야기가 흥미롭고 매력적이거나 문체가 멋져 책에 빠져들었다. 생활에 유용하거나 필요했던 이야기가 담겨있다. 디자인이 소장 욕구를 불러일으킬 정도로 아름답다. 여기엔 늘 구체적인 이유가 붙는다. 일시적이고 개별적인 객체로서 책을 좋아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거기엔 감탄의 마음이 붙는다.


그래서 책을 고르기 전 좋아할 만한 이유를 탐색하기 위해서 책을 꼼꼼하게 살핀다. 표지를 구경하고 목차를 보고 작가의 말을 읽고 중간 부분을 펼쳐 한 페이지를 읽는다. 도서관에서 미리 책을 읽어본 후 간직하고 싶은 책을 구매한다. 이 책이 좋아서 소장하고 싶다. 그 이유가 사라지거나 시간이 지나 그 이유가 더 이상 내 이유가 되지 못하는 날, 같은 책을 보고도 소장하지 않기로 마음을 바꿀 것이다.


다른 의미로 ‘그 책을 좋아한다’도 있다. 그건 사랑에 가깝다. 거기엔 이유가 없다. 처음 이유가 뭐가 되었든 사랑에 빠지면 그 작가의 책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매한다. 영화도 브랜드도 마찬가지이다. 처음엔 이유가 있었는데 창작자와 사랑에 빠지면 설령 표지가 내 스타일이 아니라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리뷰를 찾아보지도 않고 그 작품을 오래오래 곁에 두고 싶다. 그런 작품을 볼 때는 왜 좋아하는지 논리적으로 묻지 않는다. 마음 속 별점을 매기지도 않고, 이전 작품과 비교를 하지도 않는다. 멍청하게 그냥 좋다. 좋으니 좋다. 어린아이 같은 마음으로 가득 찬다.


생각해보면 사랑에 빠지게 만드는 책엔 그 사람이 담겨있다. 한 사람이 있는 그대로 드러나 있는 글과 사랑에 빠진다. 그 사람 그대로가 살아가고, 그 삶이 여과없이 담기는 예술을 사랑한다. 자신의 일부 감정을 억압한 채 세상이 선호하는 거짓 감정을 꾸미지 않고, 다른 이의 시선에 초연하게 온전히 자신을 내보이고 표현하는 용기를 지닌 사람들을 사랑한다. 그런 그들의 삶의 태도가 온전히 담겨있는 예술 작품을 보면 높은 확률로 사랑에 빠진다.


그런 대상의 예술을 즐길 때, 비평의 마음은 요만큼도 생기지 않는다. 기능이나 효율적인 목적으로 읽는 글이 아니라 그의 매력에 빠져 기쁘기 위해 그와 대화하기 위해 읽는 글이기 때문이다. 그가 딱히 뭘 애쓰지 않아도 그렇게 살아가는 사람의 작품은 머리가 아닌 영혼에 전해져 빛처럼 빛나는 아우라를 뿜어낸다.





조금 지친 컨디션으로 참석했던 북토크는 다시 나를 설레고 활기차게 만들었다. 빗소리가 경쾌하게 들렸다. 강이슬 작가는 꼭 그의 글을 닮은 사람이었다. 그는 자신의 글을 가장 자주 읽고 많이 사랑한다고 말했다. 글을 쓰는 내내 행복했다고 말했다. 내가 그의 글을 읽으며 느끼는 행복감은 그 마음이 모두 담겨 전해지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글은 흔하지 않다. 그러니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이 작가님을 사랑하는 건 자연스럽다. 꾸밈없이 해맑은 기쁨과 행복을 생생하고 맛깔나게 쓰는 사람은 귀하고 또 귀하기에.


내내 입가에 미소를 띠고 그를 바라보다가 자신이 내내 너무 행복하단 이유로 잘못된 게 아닐까 의심했다는 일화에 한번 놀라고, 행복한 바이브로 글을 쓴다는 게 누군가에게 비판받는 이유가 된다는 그의 말에 소스라치게 놀랐다. 우울하고 어둡고 진지하며 재미없는 글을 쓰던 나로서는 그게 문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해본 적 없었기 때문이다. 기쁨을 말하는데 읽으면 행복만 전염되는 데 사랑만 느껴지는 글이 어떻게 문제가 되지?



그러다가 우울한 글을 보면 우울하니 그만 쓰라는 질책과 행복한 글엔 깊이가 없어 별로라는 푸념이 완전히 같은 말이라는 걸 깨닫는다. 우울한 글을 본다고 모두가 우울해지고 행복한 글을 읽는다고 모두가 행복해지는 건 아니다. 감정의 속성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그 속성의 주관성은 읽는 사람의 마음속에 존재한다. 둘 다 자신이 그 감정을 두려워하기 때문에 생기는 일이다.


우울이 두렵지 않고 우울을 잘 다룰 수 있는 사람은 우울을 만나는 걸 두려워하지 않는다. 우울이 필요한 이유를 이해하고 자신이 왜 우울한지 알고, 그것을 달랠 줄 아는 사람은 타인의 우울을 기피하거나 미워할 필요가 없다. 설사 우울이 사라지지 않는다고 해도 별일 아니라는 걸 알기에 굳이 타인에게 공격적으로 거부감을 표현할 이유가 없다.


마찬가지로 진정 행복을 아는 사람은 타인의 행복을 기꺼워하지 않는다. 타인의 행복을 깎아내리고 의심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면 그건 지금 자신이 행복과 너무 멀어져 있고 거기에 가까이 다가가는 법을 몰라 속상해서 부리는 투정에 가깝다. 행복을 아는 사람은 설사 지금 자신이 행복하지 않더라도 어차피 그 감정 역시 행복의 또 다른 이름이라는 걸 기억하기에 타인의 행복을 축하할 수 있다.



누구도 다른 사람에게 일방적으로 행복도 우울도 가져다줄 수 없다. 그것을 직접적으로 말하는 글이라고 해도 마찬가지이다. 다행히도 오직 자신만이 행복과 불행, 슬픔과 우울 그 모든 감정을 받아들이고 변환하고 또 보낼 수 있는 유일한 주체이다.


만일 어떤 글을 보고 어떤 감정이 일어나서 그게 불편하거나 거북하게 느껴진다면, 조용히 눈을 감고 자신과 대화할 시간이 되었음을 의미한다.



과거, 행복한 날에는 글을 쓰지 않았다. 삶을 살기 바빴고 기쁨의 순간이 짧다는 걸 알았기에 그 희박한 찰나를 오롯이 즐기고 싶었다. 슬프고 내가 사라지는 날, 화가 나거나 존재감이 옅어 견딜 수 없이 마음이 쪼그라드는 날에는 글이 잘 써졌다. 대체로 내 글은 어둡고 가라앉아 있었다. 가끔 우연히 내 글을 읽고 조금이라도 어둠의 기운을 떠올릴 이름 모를 분들께 죄책감을 느끼곤 했다.


그러나 슬픔이나 우울, 분노와 두려움이 기쁨과 밝음, 생기와 용기와 완전히 같은 말이라는 걸 이해하고 나니 저항할 이유가 사라졌다. 기쁜 날이든 슬픈 날이든 상관없이 진심을 담은 글이라면, 나를 속이지 않았다면 걱정할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나에겐 그저 나만을 행복하게 만들고 슬프게 만들 선택의 권리밖에 없기 때문이다. 타인의 감정을 선택할 자유가 내겐 없기에 책임을 느낄 필요가 없다는 걸 알게 되었다.


슬픈 날에 슬픈 글을 쓰며 행복하고 기쁜 날에 기쁨에 관해 글을 쓰며 행복해한다. 정말로 글을 쓰고 싶은 순간에만 부담도 걱정도 없이 마음껏 나를 닮은 글을 쓸 수 있다는 멋진 현실에 감사하며 말이다.


2022년 3월 1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