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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Dec 01. 2023

17살엔 죽으러 바다에 갔다.

영원히 영원히

위빳사나 명상을 체험하던 8일째 새벽이었다. 배정된 방 번호는 22번, 2022년은 부활하기로 예정된 한 해였다. 그때 알았다. 여기서 잊고 있던 영혼의 한 조각이 다시 부활하거나 재생될 거란 걸. 이상하게도 ‘자우림’의 ‘영원히 영원히’가 자꾸만 맴돌아 속으로 노래를 따라 불렀다.



17살엔 죽으러 바다에 갔다. 내가 죽을 수 있는 곳은 바다밖에 없는 것 같았다. 다른 곳에선 차마 죽을 수 없을 것 같았다. 모조리 바다로 삼켜져 사라져 버리고 싶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교복을 입고 가방을 메었다. 아빠의 출근길, 학교 근처 정차한 차에서 조용히 내렸다. 나는 고맙다고 말하지 않았을 것이다. 잘 있으라고 인사했던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터미널에 도착한 후 버스를 탔다. 우리 동네엔 없는 지하철을 타고 오랜 시간 천천히 서울로 향했다. 화장실에서 옷을 갈아입었다. 역 한가운데 쓰레기통에 미련 없이 교복을 버렸다. 교복은 그때 애써 힘겹게 지켜온 평범한 일상의 껍데기였다. 그곳으로 돌아가지 않고 죽겠다는 선언이었다.


만리포에 도착했다. 버스로 갈 수 있는 바다는 거기밖에 몰랐다. 아니다. 4년 전 불행이 시작되기 전 만리포에 가고 싶다 생각했다. 만리포에서 가족과 즐거운 한때를 보낸 친구에게 그곳이 얼마나 아름다운 곳인지 들었고 그 풍경이 어린 시절의 여름휴가를 떠올리게 했기 때문이다. 그때는 몰랐다. 그저 죽으러 바다에 갔어야 했고 할 수 없이 향할 곳이 만리포라 생각했다.



해가 지길 기다렸다. 밤이 돼서 어두워서 아무도 나를 보지 않을 때까지 기다렸다. 어리고 바보 같은 나는 몰랐다. 날씨가 제법 따뜻해 여전히 여름처럼 느껴지던 날씨에도 해가 지면 바닷바람이 얼마나 거칠고 매섭게 불어올 수 있는지 꿈에도 몰랐다. 바다를 몰랐으니까. 가림막 없는 해변에서 오들오들 추위에 떨며 점점 거세지는 파도를 보며 겁이 났다.


바다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날 날씨가 어땠는지 기억나지 않는다. 그날 기억나는 건 오로지 날 질책하듯 거세게 몰아치던 바닷바람뿐이다. 죽을 수 없겠다 단념했다. 근처 가게에서 전화를 빌려 아빠에게 데려와 달라고 연락했다. 그제야 눈물이 났다. 


스스로 죽기엔 너무 나약하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낭패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생존 본능, 그것이 사상과 결의를 압도하는 최우선의 가치, 보잘것없는 인간이라는 게 부끄러워서 눈물이 났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한다는 의지 같은 건 사라졌다. 삶을 놓았다. 삶을 이길 수 없다는 걸 인정해야 했다. 앞으로의 삶을 포기하지 않고 살아야 한다는 공포감과 무력감에 잔뜩 질려 반은 안도하고 반은 질타하는 가족의 시선을 견디며 다시 삶으로 돌아왔다.


그 후로 아무리 힘들어도 두 번 다시 죽겠다는 생각을 한 번도 꺼낸 적 없었다. 그 개념은 그날 그 바다에서 죽었다.



그 사건이 부끄럽진 않았다. 그 후 삶은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날 이끌며 상상조차 못 했던 멋지고 신기한 행운과 선물을 주었고, 그것의 의미는 삶에 충분했다. 그러나 몰랐다. 오랫동안 그 상처를 열기엔 여전히 아파서 그때 그 괴로운 마음을 하나하나 뜯어보거나 제대로 조우한 적 없었다는 사실을. 그저 그 사실을 잊거나 전환하기 위해 전력을 다해왔다. 대면하기엔 아팠고 흔들릴까 두려웠다. 억누른 마음과 감정은 깊이 가라앉아 다시는 찾을 수 없을 만큼 깊은 심연 속에 봉인 되었다. 나조차 다시 꺼낼 방법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그 애가 왜 죽기로 했던 건지 잊고 있었다. 표면적인 이유만 기억이 났다. 그 애가 왜 바다로 갔는지 알 수 없었다. 그 일은 그저 타인의 이야기처럼 멀고 흐릿해서 잡히지 않았다.


17년이 지난 오늘 다시 그 애를 만났다. 바닷가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는 그 애를. 그 애는 자신이 죽을 수 없다는 사실을 알기 전까지 결코 절망하지 않았다. 감정에 휩싸여 이성을 잃지도 않았다. 그 애는 담담하고 차분했다. 죽음은 고통을 끊기 위한 수단이었다. 가장 힘겹고 아플 땐 죽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없었다.


그 애는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가 다시 모두가 평화로운 일상을 맞이했을 때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인생이 고통일 수밖에 없다는 것. 사람으로 태어나 생명을 지닌 이상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 태어나서 사는 건 고통이라는 것. 지금 자신의 고통이 결코 외부의 사건이나 환경 때문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신에게 달린 문제라는 거. 고통을 가하게 만드는 사람은 다름 아닌 자기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자신이 이 고통을 통제할 수도 없고 감당할 수도 없다는 비극적인 사실을 막 알아버렸다.


답을 찾아 헤맸다. 그때 그 애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엔 답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 없었다. 아니 물어볼 수 있는 사람이 없었다. 그 애가 보기에 그 문제에 관심을 갖는 사람이 없었다. 다들 아무렇지 않은 듯 잘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 애에겐 너무나 절실하고 현실적인, 당장 시급한 문제인데 그런 사람은 자기 하나처럼 보였다. 그 애는 자신이 이상하다는 걸 받아들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도 그 문제를 무시하고 없는 척 사는 건 불가능했다. 그 애의 알은 이미 깨졌다. 다시 이전의 세계로 회귀하는 건 불가능했다. ‘내게는 힘이 없다. 여기서 끝내자.’ 그 거대한 담론에 대한 결론, 그것이 그 애가 죽기로 결심한 이유였다.



너의 말이 맞아. 태어난 이상 우리는 고통을 받지. 그것은 감각을 느끼는 생명체의 필연적인 통과의례와도 같지. 그렇지만 바보야. 왜 이렇게 급해. 왜 벌써 끝내려고 해. 방법이 없지 않아. 너라면 방법을 찾을 수 있어. 아니 그런 너라서 방법을 찾을 수 있어. 해결할 수 없는 질문을 구하는 사람은 없어. 의문은 너의 잠재력 속에 답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태어나는 거야. 구할 수 없는 답을 찾는 사람은 아무도 없어.


그 아이는 아무것도 몰랐다. 그 아이는 순수하고 솔직하고 어리석고 경솔했다. 그 애는 고통에 울부짖으며 도와 달라 말하지도 못하고 끙끙 앓으면서도 자신밖에 몰랐다. 자신의 좁은 세상 밖 드넓은 다른 세계가 있다는 걸 보지 못했다.


알았다. 그 아이가 찾던 사람이 지금의 나라는 걸. 그 아이에게 바람을 보낸 사람이 나라는 걸. 그 아이를 바다로 보낸 사람이 지금 여기 이 순간의 나라는 걸. 바다로 들어가려는 아이를 향해 나는 목이 터지도록 외치며 신호를 보냈다.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
 나를 두고 가지 마. 사라지지 마.’


지금 목이 터지도록 온 힘을 다해 부르지 않으면 그 아이가 죽어버릴 거란 걸 알았다. 그 아이를 붙잡을 수 있는 건 나밖에 없었다. 지금이 아니면 모든 게 끝이 나. 온 마음 다해 전력으로 모든 에너지를 모아 바람이 불길 기원했다. 거센 바람을 일으킨 건 그 애가 죽길 바라지 않은 건 지금의 나였다.



'넌 있잖아. 시간이 지나 알게 돼. 바람이 불면 우주가 널 사랑한다는 걸. 바람이 불면 람타가 널 사랑한다는 걸. 바람이 불면 내가 사랑한다는 걸. 첫 여정은 나를 만나기 위한 기나긴 기다림이라는 걸. 우린 언젠가 반드시 꼭 만난다는 걸. 네가 찾는 그 사랑을 꼭 하게 될 거고. 그 사람은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그 사랑만은 영원할 거야. 바람이 불면 알게 돼. 그러니 가지 마. 기다려. 기다려. 기다려. 제발 기다려 줘.'


명상 센터에서 마스크 사이로 눈물을 한 바가지 흘리며 오열했다. 그 애를 부르고 또 불렀다.



17살 죽으러 바다에 갔다고 생각했다. 아니다. 살려고 다시 살려고 앞으로 살기만 하려고 바다에 간 거였다. 영원히 살기 위해 생명이 되기 위해 사랑하기 위해 갈 곳은 바다 하나였다.




라라라라라라
너의 손을 꼭 잡고서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너와 함께 있고 싶어
영원히 영원히 영원히
너와 함께 있고 싶어
라라라라라라
사라지지마
흐려지지마
영원히 영원히
여기 있어 줘
-자우림, 영원히 영원히 중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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