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윤이윤 Nov 29. 2023

16살 여름엔 라일락 향기를 알았다

그 아이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사랑은 어두운 밤길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맞는 것, 어깨에 쌓인 눈이 얼어 털어낼 수 없어도 마주 보며 싱긋 웃는 것, 차가운 온도에도 기꺼이 열기를 나누어 주는 것, 내가 아는 사랑은 끝이 핑계가 될 수 없는 것, 시간의 상대성은 고려되지 않은 채 사랑의 절대성만 남는 거. 영원을 말하지 않고도 영원처럼 사랑하는 것,


처음이라도 망설이거나 두렵지 않은 것, 서로에게 마음의 고향이 되어주는 것, 마음껏 울어도 될 여백을 마련해 주는 거, 멸망하기 직전 숨어들 세상의 끝이 되어주는 것, 문구점에서 새로 나온 편지지 코너를 쉬이 지나치지 않는 것, 조금 더 멋진 필체를 쓸 때까지 연습하는 것, 서로의 취향이 담긴 책을 빌려주는 것, 일부러 져주지 않는 것,


사랑은 눈치 보거나 재지 않는 것, 누군가의 의문을 견디고 평판과 거리를 두는 것, 무엇이 중요한지 아는 것,

사랑은 살아내는 것, 사랑은 상대의 존재를 그려내는 것, 결국 세상에 태어난 존재의 의미를 알게 하는 것, 살아 숨 쉬어도 좋을 작은 확신을 갖게 만들고 서로의 영원함을 빌어주는 것, 마침내 서로 손을 놓아야 가능한 상대방의 미래를 기꺼이 밝은 마음으로 반겨주는 것.


사랑은 시공간이 변해도 되돌아 있던 자리를 찾는 것, 혹은 계속 한 자리로 시공간을 끌어오는 것, 사랑은 청춘보다 귀하고 아픔보다 눈물겹고 기억보다 아름다운 것 (2022.03.13) 




그 아이는 나의 첫사랑이었다. 첫사랑이란 말로는 부족하다. 그저 첫사랑이란 단어로 부르고 끝내기엔 그 아이의 사랑은 너무나 아름답고 무한했다. 그 아인 정말 나의 첫사랑이니까. 엄마보다도 아빠보다도 먼저, 한 인간으로서 존재한단 이유만으로도 사랑받을 자격이 충분하다는 걸 알려준 첫 사람이었다. 절대적이고 무조건적인 사랑이 세상에 실존한다고. 그게 가족이 아니고 서로에게 그럴 의무가 없더라도 그저 사랑하니까 사랑해도 괜찮다는 걸 알려준 첫 번째 사람이다. 아무리 힘겹고 고통스러운 상황에 부닥쳐도 사랑이 있으면 결국 괜찮아질 거라는 용기를 일깨워 준 나의 사랑의 원형. 


처음 우리가 만난 건 16살 여름의 교실이었다. 무더운 토요일, 주말에도 자율학습을 하기 위해 학교에 나왔다. 그 아이와 같은 반이 된 지 한 계절이 지났으나 제대로 말을 나눠본 적 없었고, 서로 별 관심도 없었다. 어쩌다 우리는 밥 같은 간식을 같이 먹게 되었는데 아마 내 친구의 친구가 그 아이와 절친이라서 그랬던 것 같다.


‘티셔츠 색깔 진짜 안 어울리네…’ 

아무 말 없이 두 사람의 대화를 들으며 내가 생각했던 건 고작 쨍한 오렌지 색상의 반 소매가 그 아이와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때 그 아이가 말한 대화 중 내 흥미와 관심을 끌 만한 내용은 조금도 없었다. 그냥 친구의 친구, 같은 반 남자아이.


아! 그런데 지난봄엔 그 아이가 좀 궁금했었다. 그 아이는 예비 신학생이었는데 성당이 24시간 열려 있어야 한다는 이유로 학교를 상대로 꽤 오랜 시간 단식투쟁을 벌였다. 정확히 무슨 연유로 그 아이가 그런 시간을 보냈는지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조금도 알지 못한다. 다만 투쟁을 끝내던 마지막 날 그 아이의 모습이 너무나 강렬했다. 그 아이에게 맺힌 눈물에서 얕게 번지는 열패감과 무력감, 끝을 알 수 없는 슬픔 그럼에도 반짝거리는 소중한 신념 같은 게 눈빛에 어려 있었다. 그 아이가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아마 그래서 무의식에 적어 두었던 건지도 모르겠다. 이 아이는 강하고 믿을 만하다고. 





여름과 가을 사이 심적으로 흔들릴 때 그 아이에게 의지했다. 운이 좋게도 짝을 정하는 제비 뽑기 안에는 그 아이의 이름이 있었다. 저녁 시간 빈 교실 우리는 우연히 마주치곤 했다. 1 분단 두 번째 줄, 왼쪽 창가로 햇빛이 비치고 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자주 왼쪽 뺨을 책상에 대고 누워서 울고 있거나 울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쓰곤 있었다. 그 아이가 옆으로 오면 자는 척을 했다. 그 아이는 교복 상의를 내게 걸쳐주곤 아무것도 못 봤다는 듯 교실을 나가곤 했다.


어느 오후 마음이 무너질 것 같았고 하필 그 아이 의자에 그 교복 상의가 걸쳐져 있었다. 나는 그 교복을 베개 삼아 베고 그의 체취를 느끼고 있었다. 그런데 하필 교실 문이 드르륵 열리고, 그 아이와 눈이 정면에서 딱 마주쳐 버렸다. 그 순간 우울했던 감정도 잊은 채 어설픈 변명을 했다. 그 아이는 아무 말하지 않은 채 내 앞자리에 앉아 나를 보았다.


그때 처음으로 나의 진짜 이야기를 했다. 말하고 싶었지만, 누구에게도 할 수 없어 꼭꼭 묵혀두고 숨겨둔 짙은 어둠의 그림자가 등장하는 이야기. 그 아이는 마치 내 이야기에 대신 상처 입고 고통받은 듯한 표정을 지었다. 이야기를 마무리 짓고 의연한 척 이젠 독서실로 돌아가자고 말하고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아이는 등 뒤에서 두 팔로 나를 강하게 안았다. 눈물이 나올 것 같았다. 그때 그 포옹에는 온전한 위로와 공감, 이성적인 감정을 초월한 한 인간 존재에 대한 따스한 애정이 고스란히 담겨있었다.


지금도 신기하다. 그때 아무도 교실에 들어오지 않았다는 거, 그 아이와 타이밍은 그 시절 늘 마법처럼 절묘했다. 



얼마 후 너무 힘에 부쳐 그 아이에게도 말하지 못하고 세상에서 도망치려 했다. 도망에 실패한 후 학교로 돌아와야 했던 날, 많이 무섭고 두려웠다. 그때도 그 아이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학교 교칙도 사람들의 호기심 어린 시선도 그 아이는 개의치 않았다. 내 옆에 앉겠다고, 내 옆에 있어 주고 싶다고 그 아이는 선생님을 설득했다. 그 아이는 그저 옆에 앉아 아무것도 묻지 않고 돌아온 나를 보고 웃어주었다. 


잘 지내다가도 다시 세상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걸 아는데도 또다시 도망치고 싶어지는 그런 날이 되면 대신 그 아이를 만나러 갔다. 그 아이의 작은 세계로 도망쳤다. 그 아이는 내게 해 줄 수 있는 일이 없다는 무력감에 고통받기도 했고 둘이 부둥켜안고 울기도 했다. 그러나 그 아이가 그때 나눠 준 온기, 나를 바라보던 표정, 어떠한 판단 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어주고 함께 있어 준 것만으로도 내게 필요했던 전부를 이미 넘치게 주고 있었다는 걸 그 아이만 몰랐다.




그 아이를 떠올리면 생각나는 건 만년필, 그 아이의 흘러가던 필기체, 그 아이가 내게 보내준 하트가 그려진 보라색 편지지, 그 무렵 보랏빛이 좋아졌다. 그리고 라일락, 라일락 향기, 라일락 향이 은은하고 달콤하다는 건 그 아이를 만난 후 처음 알게 되었다. 라일락이 어떻게 생긴 꽃이고 어디서 피는지도 알게 되었다. 시간이 아주 많이 흐른 후 라일락의 꽃말이 첫사랑이라는 걸 알게 되었을 땐 많이 놀랐다. 라일락은 초여름에 피기 시작한다는 사실에도.


그 아이가 가지고 있던 책, 파인만의 책, 철학 오디세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나는 아직 그 책들을 완독 하지 못했다. 신카이 마코토의 벚꽃이 떨어지는 초속 5cm, 그 아인 이 노래를 들으며 날 떠올렸다고 말했다. 그 후로 신카이 마코토의 애니는 다 보았다. 자존심, 그 아인 내게 자존심뿐이라 말했고 우린 항상 서로에게 지지 않으려고 치열하게 노력하고 서로 봐주지 않았다. 그리고 눈, 겨울, 펑펑 내리는 함박눈을 볼 때마다 어느 겨울밤을 떠올린다. 기쁜 마음으로 그 아이가 보고 싶어 눈이 오는 밤거리를 걸었던 그 겨울을 여전히 기억한다. 내 머리와 옷에는 눈이 잔뜩 쌓여 있었고 그 아인 날 보자마자 너무 놀라 눈을 털어냈다. 눈이 얼어붙어 떨어지지 않았다. 마주 보고 한참 웃었다.



그때 우리는 어렸고 우리가 얼마나 순수하고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 채로 그런 사랑을 했다. 난 여전히 삶을 몰랐고, 그 아이 역시 세상과 사람을 다 알지 못해서 우린 많이 실수하고 넘어졌다. 우린 평범한 소년과 소녀였다. 나는 그 아이의 주변 여자애들에게 질투를 느꼈고 내가 방해되는 존재처럼 느껴져 두렵고 서운한 마음에 벽을 치기도 했다. 아마 그 아이 역시 지금 생각하면 웃음이 나올 만큼 어처구니없는 이유로 인해 내게 상처받거나 화가 났던 순간이 있었을 거다.


비록 성인이 되고 다시 만난 우리는 삶에 지치고 세상이 무서워서 서로의 사랑을 더 밝히지 못하고 그저 서로 변해버렸구나, 더는 맞지 않는구나… 체념하고 서로를 놓았다. 어쩌면 자존심에 어쩌면 두려움에 사랑을 지키지 못하고 그저 그런 흔한 이별을 해버렸지만 말이야. 그때 우리가 나눈 그 사랑은 크고 아름답고 완전해서 서로가 지닌 사랑의 형태를 환히 비추었고, 그 빛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고 그 자리에 남을 거야.


그때 그 아이로 인해 깨어난, 내가 알게 된 사랑이 그 후 경험한 모든 사랑의 근원이고 원형이 되었다. 그 아이가 아니었으면 그때 너를 만나지 못했더라면 나는 더 깊은 어둠 속으로 침잠해서 더 오래 스스로를 괴롭히고 가둬 두고 절망했을지도 몰라. 오래도록 사랑을 잊어버리고 두려움 속에 숨어있었을지도 몰라. 그럼, 그때 소중한 친구들을 사랑할 힘을 갖지 못했을 거야. 세상에 나아갈 용기를 낼 수 없었을 거야. 그렇게 많이 웃고 즐겁게 지낼 수 없었을 거야. 


그때는 몰랐지만 이젠 알겠어. 왜 네가 나를 통해 신을 알게 되었다고 말했는지. 너는 나를 신처럼 사랑해 줬으니까. 아무 대가를 바라지 않고 내 영혼과 존재를 있는 그대로 애정 어린 눈길로 소중히 바라봐 주었으니까. 우리가 함께 서로를 비춘 건 오롯이 사랑이었으니까. 그 사랑이 투영되어 다른 사람들 눈에도 너는 반짝반짝 빛이 났던 거야. 



-이 사랑이 아프다는 이유로 다가올 모든 사랑이 고통스러울 거라 믿지 마.


그 아이의 그 말을 오랜 기간 곱씹었다. 아니야. 내게 그 사랑이 고통인 적은 단 한순간도 없었어. 단지 고통스러운 시기에 너를 만나 그 사랑의 빛이 삶과 대비되어 너무 찬란하게 밝아 어둠이 더 어둡게 보였을 뿐이야. 너와 헤어지는 순간은 많이 슬펐지만, 가끔은 네가 너무 보고 싶었지만, 조금의 후회도 아쉬움도 없었다. 너와 사랑하는 동안 내내 기뻤어. 울고 있던 날에도 눈물을 그치게 한 힘은 그 사랑 덕분이었어. 


고마워. 나의 첫사랑, 내가 만난 첫 번째 빛, 나의 라일락. 



내가 미안한 건 다시 널 만났을 때 분명 힘겹고 공허했을 너를 사랑으로 바라보지 못하고 두려움에 판단해 버리고 말았던 그 시절 실수투성이의 나야. 네가 차마 말하지 못한 심층 메시지를 읽어내지 못하고 표면적인 현상에 눈이 멀어 널 미워하고 원망했던, 어리석은 나야. 네가 해주었던 그 사랑을 너에게 주었으면 아마 우린 지금도 함께하고 있었을지도 모르지.


그 시절이 지나 시간이 흘러 많은 일이 있었고 많이 배웠어. 그런데 내가 배운 건 그때 네가 준 사랑과 다르지 않아. 다만 이제야 그 사랑이 뭔지, 그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그게 왜 그렇게 아름다웠던 건지를 확실히 알게 되었어. 그건 다 너의 사랑 덕분이야.


그 시절 내 우주로 걸어 들어와 줘서 고마워. 나를 만나고 사랑을 일깨워 줘서 고마워. 우리의 우주가 교차하지 않아도 나는 영원히 너를 사랑할 거야. 네가 알려준 사랑을 계속 키워 나갈게.



-영어 이름이 필요한데 뭐로 할지 고민이야
 -음…스텔라 어때? 별이란 뜻인데. 세례명 중 하나야. 
 -와, 예쁘다. 그걸로 할래.

스텔라라는 이름을 선물해 준 건 그 아이였다.



누군가로 인해 몸과 마음이 크게 진동하면 그 울림은 몸이라는 공간의 구석구석에 기억된다. 그렇게 한 번 기억된 울림은 아무리 오랜 시간이 지나도 쉽게 사라지지 않는다. 그러다 그 울림을 주었던 누군가가 다시 나타나면 몸은 내 의식의 속도를 넘어 나에게 신호를 보낸다. 마치 보이지 않는 실에 묶인 것처럼 서로에게 반응하고 공명하기 시작하는 것이다. 나는 이런 시공을 초월한 인간의 공명이 바로 ‘인연’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 인연은 우연히 일어난 것 같은 특별한 사건들을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필연의 일들로 만들어낸다. 어쩌면 우리들의 일상은 수많은 인연들이 벌이고 있는 공명의 장일 수도 있다. 다만 내 몸이 그 미세한 울림을 모르며 살아가고 있을 뿐이다.     
 -직관하면 보인다, 신기율, 41~42p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

이전 03화 사랑은 나의 모든 것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