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하기 위해서 산다. 사랑이 나의 전부이다.
가끔 사랑이란 단어가 받는 오해로 속상해지곤 한다.
나의 동반자 Astin은 내 글에 쓰인 ‘사랑’이란 단어를 자주 짚어준다. 오해 살 여지가 있으니 되도록 ‘사랑’이란 단어를 대체할 다른 단어를 찾아보라 권한다. 사람들은 사랑이란 단어를 남녀 간의 사랑이나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에 한정시켜 사용하는 경우가 보통이라 했다. 나는 깜짝 놀라 어떻게 사랑이 세상에 두 가지 형태뿐이냐고, 어떻게 거대한 사랑이 그리 축소될 수 있냐고 반문하며 믿을 수 없어 한다. 사랑은 사랑인데 왜 사랑을 사랑이라 마음껏 말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사랑하기 위해서 산다. 사랑이 나의 전부이다.
나는 평소 본질대화하는 게 삶의 커다란 낙인데 본질대화는 한마디로 말하자면 서로 사랑하기 위한 대화이다. 무슨 이야기를 어떤 방식으로 나눴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대화를 하고 나면 사랑이 어느새 커져 있다. 사랑이 커지지 않는다면 그건 본질대화가 아니다. 다른 이들은 사랑을 뭐라고 정의하기에 나의 말이 혼란스럽고 의아하게 들릴 수 있는지 잘 이해되지 않는다.
내가 말하는 사랑은 남녀 간의 이성적인 로맨스를 뜻하지 않는다. 가슴의 두근거림이나 설렘, 간질거림, 떨림, 안 보면 미칠 것 같은 정열과 뜨거운 마음을 말하는 게 아니다. 물론 그것도 사랑이 표현되는 형태 중 하나지만 그건 사랑이 지닌 아주 작은 일부분에 불과하다.
사랑은 열량 같은 에너지이다. 눈에 보이지 않는 실질적인 힘이다. 사랑이 채워지면 마음이 따뜻해지고 친절함이 배어 나오며 충족감이 차오른다. 반면, 사랑이 모자랄 때는 마음이 공허해지고 무기력해진다. 사랑은 사람을 행동하게 하고 결심하게 하며 평소와 다르게 용기를 나게 하는 원동력이 된다.
사랑은 방향이다. 세상을 바라보고 반응하는 방식을 크게 둘로 나뉜다면 사랑과 두려움으로 구분할 수 있다. 어떤 대상을 바라볼 때 사랑을 느낀다면 곡해 없이 순수하게 반응할 수 있는 반면에 두려움을 느낀다면 방어기제를 작동시키고 공격적으로 반응하고 만다. 본심과 다른 반응 탓에 상대방에게 진심이 가닿지 못하고 오해가 쌓이고 마는 것이다.
태어난 아이가 자라기 위해서 보살핌이 필요하다. 시간과 경제적인 지원뿐 아니라 애정과 품이라는 정신적 토대가 필요하다. 소중한 잠을 잘 수 없게 되고, 이유도 모른 채 우는 아이를 달래야 한다. 일상의 중심축을 아이에게 내주어야 한다. 부모와의 유대감과 상호작용 없이 아이는 자랄 수 없다. 물질적으로 충족된 양육 환경 일지라도 무조건적인 지지와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자란 아이는 자신을 사랑하기 어려워진다. 세상에 적응하고 자신만의 길을 가기 위한 용기는 무조건 내 편이 되어주고 정신적 고향이 되어주는 누군가와의 관계에서 형성된다.
부모가 아이에게 정신적 고향을 되어주는 건 오직 아이를 사랑할 때만 가능하다. 아이를 낳았으니 책임져야 한다는 의무감과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역할의 완수, 나중에 아이가 빚을 갚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감만으로 무조건적인 사랑을 줄 수 없다. 그냥 사랑해야만 줄 수 있다. 바라지 않고 그저, 주는 것만으로도 충분하기 때문에 무한정으로 줄 수 있는 마음은 사랑밖에 없다.
사랑은 하는 거다. 무얼 바라고 기대하고 계산하며 셈을 하는 행위가 아니다. 사랑엔 기브 앤 테이크도 없고 전략도 없으며 숫자도 없다. 특정 조건이 충족되어서 하는 것도 아니다. 시간이 지난다고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사랑은 존재하기에 사랑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준비도 자격도 필요 없다. ‘사랑하기’ 자체로 이미 완성되는, 과정 자체가 목적인 상호작용이다.
많은 사람이 사랑은 변하는 거로 생각한다. 그러나 사랑은 영원하고 변하지 않는다. 변하는 건 사람이고 관계이고, 환경이고 감정이다. 사랑은 단지 감정이 아니다. 감정이 변한 사람이 더 이상 사랑을 하고 싶지 않아서 사랑을 그만두는 것뿐이다. 사랑을 하지 않기로 결정했고 그 에너지가 사라진 것뿐이다.
원한다면 끝없이 사랑할 수 있다. 설사 상대가 멀리 떨어져 있더라도 내 곁에 더 이상 머물지 않고 날 사랑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관계가 끝났어도 그의 존재를 변함없이 사랑할 수 있다. 그의 존재를 응원하고 그의 선택을 인정해 주고 그의 삶에 찾아오는 기쁨과 사랑에 함께 기뻐할 수 있다. 표현이 돌아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사랑은 끝나지 않는다. 사랑은 하는 것 자체로 완성되고 행복해지는 마음이니까.
안타깝게도 우리는 제대로 사랑하고 사랑을 배울 기회가 많지 않았다. 사랑의 존재로 태어났던 우리는 어릴 적 사회가 알려주는 사랑을 내면화하고 그것을 사랑이라 받아들인다. 모두는 운 좋게 무조건적으로 사랑해 주는 부모님을 만나 사랑의 경험을 하지 못한다. 사람은 모두 불완전하고 두려울 수 있으며 각자의 결핍을 충족하기 위해 욕망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사랑에 조건이 달리고 저울질한다. 우리는 사랑을 받기 위해 우리의 모습을 바꿔야 한다고 믿게 되고 사랑이 돌아오지 않으면 사랑을 하지 않는 게 현명하다 배운다. 사랑에도 자격이 필요하고 서열이 있고 사랑은 아무나 할 수 없다고 착각하게 된다.
그렇게 본래 사랑의 형태에서 멀어지면 사랑할 줄 모르게 된다. 무엇보다도 평생 함께하는 자신을 사랑하는 법을 잊게 된다. 사랑을 할 수 없으면 자체적인 에너지 동력을 만들 수 없다. 사랑의 에너지가 없으면 사랑을 얻을 길도 사라진다. 에너지가 없으면 세상만사 재미없어지고 힘겹게만 느껴진다. 열정을 쏟을 수도 없고 길을 잃어버려 방황하는 느낌이 든다.
돈이 없으면 벌면 되고 체력이 떨어지면 운동을 하며 근력을 키울 수 있지만, 사랑의 에너지를 생성할 수 없다면 그를 대신할 에너지는 아무것도 없다. 긍정적인 태도도 회복하는 에너지도 모두 사랑의 방향에서만 나올 수 있다. 아무리 크고 아픈 상처라도 사랑할 수 있다면 결국엔 회복할 수 있다.
그래서 내게 언제나 세상 가장 중요하고 시급한 일은 사랑을 제대로 하고 사랑하는 법을 알고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일이다. 사랑이 핵심이고 열쇠이다. 사랑만 있으면 두려움 앞에서도 강해진다.
자신을 사랑하는 게 언제나 우선이지만, 사랑을 해본 적도 받아본 적 없는 사람이 홀로 자신을 사랑하기까진 다른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다. 운 좋게도 무조건적인, 존재론적 사랑이 무너졌던 시기에 친구들을 통해 사랑을 받았다. 사랑이 나를 어떻게 살리는지 경험했다. 사랑에는 조건이 필요 없고 존재만 있으면 된다는 걸, 작고 초라한 나 자신도 사랑할 수 있다는 걸 배웠다.
그 후 진심으로 택했던 모든 일은 전부 사랑을 하고 배우고 키우는 과정이었다.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사랑하기 위한 여정이었다. 연애도 친구도 여행도 글쓰기도 감정도 경험도 꿈도 모두 사랑이었다. 배운 것도 받은 것도 앞으로 하고 싶은 것도 모두 사랑이었다. 사랑의 에너지를 키워 나가고 싶다. 세상에 더 많은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싶다. 내 삶이 사랑이란 걸 깨닫게 되었고 이제는 그 사랑을 돌려주고 차례가 되었기 때문이다. 빚을 져서도 아니고 의무도 아니다. 그저 그것이 나를 행복하고 온전한 존재로 살아가게 만들기 때문이다.
누군가를 알아가기 위해 허물없고 깊은 대화를 계속 나누는 게 내가 하고 싶고 잘할 수 있는 사랑의 방식이란 걸 알게 되었다. 조건 없이 계산 없이 바라는 거 없이 더 많은 사람과 사랑을 공유하고 싶다. 내가 하는 사랑의 방식을 나누고 싶다.
그러니 외친다. 사랑이 짱이라고! 사랑은 힘이 세고 모든 것의 열쇠라고. 그저 감정적이고 힘없이 무너지는 초라한 단어가 아니라고. 어떤 단어보다도 특별하고 소중하다고. 사랑은 나의 모든 것이다.
먼 옛날 어느 별에서
내가 세상에 나올 때
사랑을 주고 오라는
작은 음성 하나 들었지
사랑을 할 때만 피는 꽃
백만송이 피워 오라는
진실한 사랑할 때만
피어나는 사랑의 장미
미워하는 미워하는 미워하는 마음없이
아낌없이 아낌없이 사랑을 주기만 할 때
백만송이 백만송이 백만송이 꽃은 피고
그립고 아름다운 내 별나라로 갈 수 있다네
-백만송이 장미, 심수봉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