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나의 종교는 운명이었다.
종교가 있는 삶은 어땠을까 자주 묻곤 했다. 어릴 적 재미 삼아 여름성경학교에 가거나 크리스마스 때 교회에서 캐럴을 듣던 추억이 있다. 친구의 사제 서품식에 참석해서 그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며 안쓰럽고 기특하고 자랑스러워 뭉클했던 복잡한 심경을 느껴봤다. 좋아하던 친구가 불교에 귀의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조금 놀라다 자주 그 애를 그리워하곤 했다. 하지만 그건 언제나 다른 사람의 이야기였다.
내 삶에 종교가 끼어든 적은 없었다. 절실하게 믿는 것이 있다면 처음엔 시간이었다. ‘This, too, shall pass away.’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괜찮아질 거라는 명제가 위안이 되었다. 오랫동안 괜찮지 않은 시간의 나날을 지탱해 주었다. 대부분의 고통, 자잘한 걱정거리, 스트레스, 불안과 혼란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스쳐 지나가듯 기억에서 사라졌다. 농담처럼 나의 종교는 ‘시간교’라 말하고 웃었다.
역시나 시간교는 종교가 될 수 없었다. 시간이 아무리 흘러도 나아지지 않고 곪고 곪는 반증 사례들이 하나둘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고타마 싯다르타 님이 말씀하신 ‘삶은 고통이다.’는 문장을 떠올리며 이게 삶의 속성이라고 생각했다. 산다는 건 본래 상처 몇 개쯤 껴안고도 아무렇지 않은 척 씩씩하게 살아가는 행위라고.
이왕 상처와 살아가야 한다면 오랫동안 잘 지낼 방법을 강구해 보기로 했다. 상처를 탐구했고 가장 덜 아프게 느껴질 요법들을 참조했다. 그러다 도저히 안 될 것 같아 포기하고 싶어지면, 보자기로 슬며시 덮어 시야에서 감추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언제나 깊고 깊은 무의식 속엔 나도 모르는 무언가 있을 거라는, 막연하고 작은 희망을 심어 두었다. 모든 상처와 흉터를 완전히 치유하는 방식이 어딘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환상이나 착각이 아니라 세상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흐름과 에너지가 실존했다. 어느 순간 내 인생에도 거대하고 신비한 힘이 작용하고 있었다는 걸 깨달았다. 우연이나 무작위처럼 보이는 어떤 일도 어느 하나 우연이 아니었다. 복잡한 요소들의 조합과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인해 경험하는 당시에는 느낄 수 없지만 삶을 돌아볼수록 모든 게 착착 들어맞았다. 마치 복잡해 보이는 자연의 혼돈 속에서 하나의 작은 패턴이 무한히 반복되는 프랙탈만 같았다.
내게 일어난 가장 의미 있고 중요한 사건과 만남은 내가 의도하거나 계획한 게 하나도 없었다. 삶이 일어나는 도중에는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이게 내 인생에 어떤 영향을 미칠지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 그 사건과 만남이 하나의 이야기가 되어 그들이 내 인생에 어떻게 흘러오게 되었는지 곱씹어 생각하면 소름이 돋았다. 나도 몰랐던, 그 시기 절실히 필요했던 무언가가 희박한 확률을 뚫고 마법처럼 내 우주에 와줬다.
마찬가지로 내가 어떻게 반응했고, 어쩌다 괴로워하게 되었는지 상처를 파고파고 내려가 보면 거기엔 하나의 거대하지만, 분명한 패턴이 있었다. 다양하고 복잡하게 흩어진 이야기의 겉모습을 벗겨 심층부 안 본질은 명확하고 단순해서 한 문장으로 정리해 버릴 수도 있었다. 그 일들은 무의식이 벌이는 감정적인 소동에 가까워서 노력 없이 패턴을 볼 수 없었을 뿐이었다.
삶에는 나를 성장시키고 고양시킬 원동력이 될 선물과 프로그램처럼 나를 옭아매는 알고리즘 패턴이 내 의지와 상관없이 무의식 속에 공존해서 삶을 이끌어가고 있었다. 내 삶을 관통하고 나를 이끄는 보이지 않는 거대한 흐름이 실재했다. 그에 따라 내게 일어날 만한 일은 반드시 일어났다.
내 인생 모든 사건과 사람들은 내게 운명을 느끼게 해 주기 위해 찾아왔던 거구나! 그 ‘아하’의 순간 단번에 삶이 이해되고 모든 미움과 화가 녹아들었다. 가슴을 답답하게 짓누르던 못이 빠지고 사랑이 온몸에 가득 찼다. 내게 벌어진 모든 일이 사랑이었다. 내게 다가온 모든 사람이 사랑이었다. 나는 사랑이었다. 나는 운명을 통해 사랑을 발견했다. 아니, 사랑이 있었기 때문에 운명을 실감할 수 있었다.
시간도 해결하지 못했던 상처는 운명 속에서 그저 두려움일 뿐이었고, 두려움은 사랑으로 치환되었다. 운명 속에서 분노는 그저 원하는 게 있다는 알람일 뿐이었고, 변화를 불러일으켰다. 운명 속에서 나는 삶의 어떤 것에도 저항할 연유가 없었고, 애써 바꾸거나 싸울 필요가 없는 평화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운명 속에서 나 자신이 되는 것 외엔 어떤 의무도 책임도 없었다. 나는 그저 운명에 순응하고 운명이 주는 사랑의 길을 따라 기대 없이 깊고 깊은 기적을 선물처럼 경험하며 운명에 감사하고 사랑하면 되었다.
네이버 지식백과의 말대로 ‘신을 숭배하여 삶의 목적을 찾는 일’이 ‘종교’라면 어느 순간부터 나의 종교는 운명이었다. 나는 운명을 믿는 운명론자가 되었고, 운명을 따르는 삶을 살기로 약속했다. 운명은 신호이자 항로였고 나침반이자 목적지였다. 어느 날 그 끝에 도달하면 그토록 내가 원하는 모든 답이 있을 것이라는 걸, 더 크고 아름다운, 완전히 다른 차원의 세계가 반드시 열릴 거라는 걸 나는 믿게 되었다.
스물두 번의 여름은 스팀잇에서 연재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