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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이윤 Oct 28. 2024

1년간 수영하며 배운 것들

작년 10월 수영을 시작했다.


수영은 도전이었다. 침체기에서 회복되어 새로운 의욕이 솟아나자 몸은 새로운 운동을 해보자고 부추겼다. 문득 생각난 건 수영이었다. 여행할 때마다 강에서 바다에서 리조트에서 둥둥 떠서 자유롭게 몸을 맡기고 유영하는 이들을 바라보며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물을 그렇게 좋아하면서 수영을 전혀 못하는 건 부조리했다.


'언젠가, 지금은 아니지만 언젠가... 수영을 배우자.'

유연성 제로에 잔뜩 긴장하고 굳은 몸, 급한 성미 여러모로 수영에 재능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미루고 미룬 방학 숙제처럼 해를 넘기며 말로만 존재하던 미결 과제를 손에 들고 풀어볼 여건이 마련되었다. 가끔씩 우주가 무언가 해보라고 등 떠밀 때가 있는데 그때 수영이 그랬다.


초록창에 수영장을 검색해 보니 전에는 나오지 않았던 수영장이 떴고 며칠 후엔 신규 회원 모집일이었다. 조금 거리가 있지만 도보 가능한 거리, 저렴한 가격, 괜찮아 보이는 블로그 리뷰. 신규 가입하기가 그렇게 빡세다던데. 새벽녘부터 길고 긴 줄을 섰다. 애매한 오후 시간 빈자리가 몇 자리 있었다. 후에 알고 보니 오랫동안 강습받았던 기존 회원들이 대거 이탈하면서 운 좋게 난 자리였다고 한다.


두근두근 떨리는 마음으로 첫 강습에 간 날, 머리까지 몸을 담그며 알았다. 아무것도 안 하는데도 기분이 좋았다. 이번엔 수영이 좋아질 거고, 수영장에 오는 시간이 행복해질 거라고. 수영은 기쁨을 줬다.


예측이 맞아갈 때의 기쁨. 직관으로 바라본 일이 현실로 구현될 때의 기쁨. 과거의 경험이 현재를 잇는 기쁨. 필라테스를 배우며 몸을 쓰는 법을 배웠고 명상하며 호흡하고 힘 빼는 법을 배웠다. 왠지 이젠 수영을 할 수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들었고, 이전과 달리 준비가 되었다.


수영할 때마다 이제까지 배운 마음가짐과 태도를 정돈하고 적용했다. 타인과 비교하지 않기, 마음처럼 잘 되지 않아도 낙담하지 않고 기다려주기, 조급해하지 않기. 평온을 유지하고 현재, 지금에 집중하고 감사하기.


'수영 어려운데 재밌다.'


어렵고, 잘할 수 없는 무언가를 꾸준히 하며 이젠 재미를 느낄 수 있었다. 수영은 그렇게 나를 토닥이고 인정해 주었다. 한 뼘 자란 덕에 삶이 이만큼 충만해졌다고. 너는 성장했다고. 물의 계절, 수영하며 평온함과 행복감은 배가 되었다.




6개월이 지나 모든 게 바뀌었다. 집요하고 지독하게 답을 찾다가 어느새 완전히 지쳐버렸고 삶의 모든 의욕을 잃었다. 모든 게 무의미하고 허무했고 어떤 저항도 하고 싶지 않았다. 그때도 수영이 있었다. 관성이자 의무감이었을지도 모르고, 어차피 할 일도 하고 싶은 일도 없어서 수영을 그만 둘 명분이 없었다. 그래도 수영할 때 힘들다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제 소리를 냈고, 잠깐은 잡념이 들지 않았다.


내가 기분이 좋든 말든 어떤 생각을 하고 어떤 걸 느끼든 상태가 어떻든, 수영은 아무 상관하지 않았다. 예전처럼 누군가에게 친절하고 웃어줄 여유도 에너지도 없었다. 그러나 수영은 개의치 않았다. 그저 가서 수영만 하면 될 뿐이었다.


그냥 간다. 수영한다. 가기 싫다고 느낄 때도 그것만 떠올렸다. 그냥 가면 수영을 하고 돌아온다. 수영이라도 안 하면 아무것도 안 하고 누워만 있을 것 같아서 그만두고 싶을 때마다 주문을 걸었다. 의미도 목적도 상관없다. 얼마나 배웠고 어떻게 하는지도. 그냥 수영을 한다는 것만으로 충분했고, 그게 스스로에게 강제했던 유일한 배려이자 친절이었다.



어느덧 시간이 지나 강사님이 바뀌었다. 그는 친절한 사람이었고 꼼꼼하고 체계적이었다. 한참 평영을 배우고 있었는데 억지로 간신히 평영 비슷한 걸 하던 무렵이었다. 그는 우리의 자유형, 배영이 모조리 잘못되었고 어떻게 교정하면 좋을지 친절하게 몇 번이고 알려줬다. 특히나 평영은 완전 처음부터 제로베이스로 다시 시작했다.


완전 제자리걸음이네. 안 되는 평영을 꽤 열심히 해서 그나마 그만큼 했던 거고, 내 몸으로는 정석적인 평영 자세가 안 나오는데 처음부터 해야 하다니. 의욕 없던 와중에도 실소가 나왔다. 될 리가 없어. 나는 나를 믿지 않았다. 그래도 했다. 시키는 대로 다시 처음부터 연습했다. 화가 나거나 두려운 에너지조차 없었기 때문에 저항은 없었다. 체념한 채로 안 될 걸 알면서도 그냥 했다.


몇 개월 동안 지지부진하게 처음 평영하던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헤매고 또 헤맸다. 강사님은 지치지 않고 계속 날 붙들고 바른 자세를 알려줬다. 그리고 어느 날 거짓말처럼 갑자기 평영 했다. 물개가 된 것 마냥 물을 미끄러지며 자연스러운 평영을 했다. 이게 평영이구나. 이게 평영의 느낌이구나. 언제 손동작을 하고 언제 숨을 쉬어야 하는지 알겠고 호흡하는 게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이전에 했던 건 평영이 아니었고 이게 평영이었어.


그날은 너무 기쁘고 행복해서 허무함도 잊고 수업이 끝난 후에도 잊지 않도록 몇 번이고 평영 했다.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 된다는 걸 수영하며 배웠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제대로 배우는 건 도움이 되고 배운 건 사라지지 않는다는 걸 수영이 알려주었다. 하다 보면 언젠가 돼. 그게 되는 날은 각자가 다르고, 각자의 방식이 조금씩 다르다. 머리가 아니라 몸이 직접 느껴야 알게 되겠지만 포기하지 않으면 그날은 와. 그날이 오기까지 낙담하지 않고 계속 시도하면 돼.


그래서 접영이 어려워도 슬프지 않았다. 전혀 감이 오지 않고 막막해도 조급하지 않았다. 평영처럼 언젠가 하다 보면 결국엔 배우게 될 거란 걸 이제는 안다.


나를 믿지 못하던, 허무했던 계절에도 수영했고, 수영은 그냥 하는 힘을 알려줬다.




끝나지 않을 것 같던 허무가 지나가고, 새로운 계절을 맞이하여 변화를 앞둔 내게 수영은 이별을 고했다. 신기하게도 수영을 쉬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느낄 때쯤, 장기간 공사로 인해 수영장이 당분간 문을 닫는다고 했다. 그럴 리 없지만, 마치 계절이 지나 내가 괜찮아질 때까지 기다려준 것만 같은 타이밍이었다.


오늘 마지막 수영을 했다. 물에 들어갔을 때 온몸이 느끼는 촉감, 수영장에 일렁이는 빛의 움직임, 터질 것 같은 심장 박동과 알싸한 근육통과 뻐근한 몸,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어 눈을 뜨고 있었다. 마지막까지 접영은 너무 어려웠지만 열심히 했다. 역시 수영은 힘들지만, 참 재밌다.



남은 건 감사함 뿐이다. 많은 걸 가르쳐주고 멈춰 있던 계절에도 억지로라도 날 움직이게 했던 수영, 거기서 보낸 모든 시간과 거기서 만난 모든 사람들 너무나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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