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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달 Jun 26. 2021

바삭짭짤 장인의 한 그릇 '텐동 요츠야'

와삭와삭 씹을 거리가 필요할 때




왠지 그런 날이 있다.

바삭바삭 소리에 기분 좋은 식감이 생각나는 날이.     


영악한 알고리즘이 바삭한 먹방을 추천했다든지,

문득 바사삭 소리가 귓가를 스쳤다던지,

아니면 대화도 안통하고 상식도 안통해서 도대체 저 머릿속엔 무엇이 들었는가를 심히 고찰하게 만들며 하루 종일 짜증을 불러 일으키는 누군가를 아득아득 씹고 싶을 때라든지..


마침 또 그런 날이 찾아왔다. 애써 빡침을 누르며 아득아득 앙다물었던 치아들을 바삭한 텐동으로 토닥여줄 필요를 느꼈다. 그 인간을 앙 하고 물어버릴 순 없으니 바삭한 튀김이라도 씹어줘야지..



작은 테이블바에 앉아 잠시 기다리니 귀여운 기본 찬들이 나온다.

포슬포슬 아삭한 감자 샐러드에 오독오독 새콤한 단무지를 맛보고 있자니 잠시 쉬고 있던 위장이 꼬로록 존재감을 드러낸다. 그리곤 어서 텐동을 내놓으라 떼를 쓰기 시작한다.

안돼. 기다려. 아직 우리 차례는 멀었단 말이야.



소란해진 위장의 시선을 돌릴 겸 다소곳이 놓여있는 단무지의 독사진을 찍어준다.

노랗고 오밀조밀한 모양이 예쁘게 잘 나왔다. 오 이거 맘에 드네. 왠지 슬쩍 기분이 좋아지는 느낌이다.



그렇게 찰칵이며 놀기를 잠시간. 드디어 고소한 향기와 함께 텐동이 등장한다. 갓 튀겨낸 뜨끈한 텐동은 재료들이 꼭꼭 숨어 안 보일 정도로 그릇모자를 푹 눌러쓰고 있다.



눌러 쓴 모자를 벗겨주니 숨어있던 튀김들의 모습이 보인다. 노란 튀김옷 사이사이로 까맣고 하얗고 초록초록한 재료들의 속살이 비친다.


잘 만든 텐동의 튀김은 코 묻은 돈으로 애지중지 아껴먹던 학교 앞 분식 튀김과는 다르다. 튀김옷 자체는 보다 단단하고 파삭하면서 한 알 한 알 튀김옷이 톡톡 바스라지는 느낌이 참 좋다. 동글 톡톡 바삭바삭 재미있는 식감이다.


흠. 좋은 음식 앞에서 사설이 길었군. 이젠 드디어 텐동을 맛볼 시간이다!



처음으로 맛본 하얗고 독특한 비주얼의 연근은 겉은 바삭 속은 아삭한 식감이다. 연근조림이 달달하고 짭짤한 느낌이라면 텐동의 연근은 좋은 기름의 풍미가 배어들어 진한 고소함이 가득 차있다.



노랑과 초록이 예쁜 단호박은 튀김의 바삭함이 채 끝나기도 전에 달달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입안을 가득 감싸준다. 마치 햇빛에 잘 마른 담요를 덮는 듯 폭신폭신한 느낌에 기분이 한껏 좋아진다.



쪼글쪼글 길쭉한 꽈리고추는 한 입을 베어 무는 순간 채즙이 쫘악 퍼져 나온다. 거기에 살짝 매콤함이 느껴진다 싶으면 고소한 기름기가 고 요망한 매운기를 싸악 감싸안아준다. 요 녀석이 매우면 어쩌나 마음 졸이던 연약한 맵찔이의 마음은 여지없이 녹아내린다. 그러면서 마지막에는 약간의 쌉싸름함을 남겨준다. 덕분에 자칫 기름질 수 있는 식사를 중간중간 쌉쌀한 맛으로 리셋해주는 훌륭한 조합이 만들어진다.



까맣고 네모난 김은 바삭함의 끝판왕이다. 바삭하고 고소한 맛의 뒤에 짭짤한 맛이 따라 나온다. 반찬삼아 먹던 김구이와 간식삼아 먹던 다시마튀각이 파이널 퓨전을 한다면 이런 맛일까? 튀김과의 첫 만남은 대체 누가 처음으로 무슨 김을 다 튀겼나 싶었지만 이내 그의 선경지명에 감사하고 싶어진다.



심상치 않은 보라색,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를 불러오는 가지가 여기 있다. 보통 가지라 하면 물컹한 나물의 모습으로 처음 만나기 마련이다. 어떻게든 이걸 먹이려는 어머니와 시식을 거부하며 결사 항전하는 어린 나의 밥상머리대첩이 아련하게 떠오른다. 어리고 약했던 나는 결국 패배했고, 그 날의 물컹텁텁한 기억은 가지에 대한 원망으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다. 가지에겐 죄가 없음을. 솜씨 좋게 튀겨낸 가지는 말캉하고 부드러운 식감이 그만이다. 담백하고 밀도가 옅은 부드러움은 밥이면 밥, 맥주면 맥주 등 어디에도 잘 어울리는 단짝이다. 아니 대체 누가 처음으로 가지를 나물로 만들 생각을 했을까? 내 아픈 기억에 대한 책임을 그에게 묻고 싶어진다.


슬픈 추억을 뒤로하고 이제는 해산물 튀김을 맛볼 시간이다. 채소도 맛나지만 역시 섬유질보단 단백질이다.



동글동글 오징어링은 한 입만 베어 물어도 진한 풍미가 가득 들어온다. 뒤를 잇는 고소함은 바삭한 파전안에서 반갑게 마주친 오징어 조각이 떠오르게 한다. 거기에 짭짤하고 얇은 오징어 살은 장인의 수타면처럼 적당히 쫄깃탱글하다. 겉바속쫄의 완벽한 조합이다.



분홍 꼬랑지가 예쁜 새우는 바삭한 식감 사이로 탱글한 육즙이 쪼록 흘러나온다. 마치 노란 튀김옷이 본래 타고난 껍질인 마냥 바삭하고 고소한 맛이 새우의 향과 함께 자연스레 어우러진다. 이 맛을 보고나니 애써 절제했던 마음이 다시금 샘솟는다. 아, 아까 맥주도 같이 시킬걸.. 다음에 오면 참지 말고 생맥을 곁들이기로 다짐한다.



오늘의 하이라이트, 오동통한 장어튀김은 아낌없이 한 입 가득 맛보기로 한다. 와삭 우물우물. 도톰하고 포슬포슬한 살결이 입안에서 부드럽게 풀어진다. 껍질은 잘 구워낸 장어구이의 고소함이 가득하고, 살결은 갓 쪄낸 게살처럼 촉촉하고 보들보들하다. 얇은 꼬리 쪽으로 갈수록 포슬한 식감은 바삭하고 단단해진다. 다시금 이전의 선택이 후회가 된다. 새우 먹고 생각났을 때 그냥 맥주 하나 시킬걸..


언제나 후회는 늦는 법이다. 오늘의 나는 맥주와는 연이 닿지 않았다. 하지만 기회는 언제나 다시 찾아오는 법이다. 조만간 다시 와서 맥주 한 잔을 촉촉하게 적셔줘야지.


맛있는 음식을 다채롭게 즐기다 보니 문득 답답하고 열불났던 마음이 한 풀 꺾여있는게 느껴졌다. 나도 모르게 발끝을 통통이며 콧노래를 흥얼이기도 했다. 사실 그릇을 거의 비우고 나서야 새삼 깨닫게 되었다.


'아, 나 오늘 빡친 날이었지.'


그래, 나란 놈이 이렇게도 단순하구나. 처음에는 짜증나는 마음을 바삭바삭 거칠게 씹어 삼키고 싶었는데, 따뜻 촉촉한 재료들의 어울림에 살며시 녹아내리고 있었다.


에휴 그래, 뭐 인생이 별거냐. 마지막 남은 한 입을 맛나게 오물거리며 또 내일을 견뎌낼 힘을 얻어 가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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