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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혜원 Aug 24. 2023

'역할놀이'와 '믿어준다'는 것

"나는 어떻게 매력적인 사람이 될 것인가?" 이 주제를 가지고 작년 글쓰기 수업에서 글을 썼다. 글쓰기 수업 말미에 스승에게 개인 과제로 받은 주제다. 나는 어떤 사람을 매력적으로 느끼는지부터, 내가 지금 매력이 없는 이유까지 이것저것 길게 적었는데, 다시 주제로 돌아와 ‘어떻게’ 매력적인 사람이 될 거냐는 부분에서 턱 하고 막혔었다. 대충 연애를 많이해야 한다는 이야기로 결론을 냈다. 실전 경기를 많이 해본 복서는 어떤 시합에서도 이길 자신이 있듯이, 실전 연애를 많이 해본 사람만이 어디서든 사랑받을 자신이 생길 테니까. 그 글을 그렇게 마무리하고 뭔가 찜찜했다. 뭔가 머리로 결론을 내버린 느낌이었다.




사실 어린 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의 욕망은 딱 하나였다. 사랑받고 싶다. 더 정직하게는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다. 학창 시절 공부를 열심히 했던 것부터, 성인이 돼서 권력과 명예에 집착했던 것까지 사실 내 모든 욕망의 근원에는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이 자리잡고 있었다. 철학을 배우고 나서 바뀐 것은 딱 하나다. 막연하게 불특정 다수의 ‘남자’들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에서 한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다는 욕망으로 바뀌었다는 것. 불특정 다수에게 사랑받을 수 있다는 자신감은 늘 불안하고 변덕스러운 안도감만을 주지만, 한 사람과 같이 웃고 울고 밥먹고 대화하는 기쁨은 내 삶을 진짜로 충만하게 채워준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것. 그때부터 내 꿈은 ‘진정한 사랑을 하는 것’이 되었다.


그때 글쓰기 수업을 하던 시기, 나는 이혼을 고민하고 있었다. 결혼 생활을 하며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나는 계속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이 없어서, 안정적이어 보이는 대상과 법으로 관계를 박제해버렸다는 걸. 조금 더 적나라하게 말하자면, 나는 앞으로 누군가를 사랑할 자신은 없지만, 그렇다고 혼자 살아갈 자신도 없어서, 적당한 대상을 내 옆에 묶어 놓고, 나는 평생 혼자 될 일은 없겠다는 허구의 안정감 속에서 자위하고 있었다는 걸. 그때 알았다. 이혼의 가장 마지막 관문은 ‘나는 계속 사랑하며 살아갈 자신이 있는가?’에 대한 확신을 가지는 것이다. 그래서 그 글쓰기 수업에서 그렇게 사랑에 대한 글을 많이 썼다. 몇 가지 글이 생각난다.


그때 한 글에서 내가 사랑은 상대에게 필요한 것을 주는 것이라고 했다. 그때 스승이 그 말을 정정했다. 사랑은 상대가 필요한지도 모르는 것까지 주는 것이라고. 상대에게 필요한 것만 주는 것은 ‘조련’이라고 했다. 그 글이 떠오른다.


평생 ‘남자’에게 사랑받고 싶었지만 ‘남자’에게 사랑받는 게 그렇게 어려웠다. 나는 얼굴이 예쁘지도 않고 성격마저 드럽기 때문이다. 그런 외모와 성격을 가지고 ‘남자’에게 사랑받으려니 각이 나오질 않아, 예전에는 학벌이나 명예로 노선을 틀었던 것이다. 철학을 배우고 그 길은 가기도 어려운데 그 끝에 아무것도 없는 길이라는 걸 알았다. 그걸 처음 알았을 때 멘붕이 왔다. '그럼 대체 나는 어떻게 사랑받아야 하지?'라는 질문에 답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철학을 배우고 마음을 정돈하고 사람들과 부대끼며 나는 점점 사랑에 자신감이 생겼다. 고통스럽게 내 마음을 닦고, 고통스럽게 나와 다른 사람들과 부대낀 결과였다. 내 마음을 힘들게 정돈한 만큼은 상대의 마음이 보였고, 나와 다른 사람들과 마찰과 갈등을 견뎌온 만큼은 상대와 오해와 이해를 반복하며 관계를 가꾸어가는 법을 알게 되었으니까. 그때쯤 내가 호기롭게 글에 쓴 것일 테다. 그때 난 사랑을 사업에 비교해서 썼다(스승이 참 싫어했다). 사업에 오래된 격언이 있다. “고객이 원하는 것을 줘라!” 얼핏 들으면 너무나 당연한 말 같지만, 실제로 이걸 해내는 사업가는 드물다. 일단 대부분의 사업가들은 고객이 원하는 것이 아닌 자기가 원하는 것을 주려고 하고, 설령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 알더라도 그걸 제대로 만들어서 줄 수 있는 역량을 가진 경우는 드물다. 그러니까 사업에서 성공하려면 두 가지가 필요한 것이다. 고객이 무엇을 원하는지를 읽어낼 수 있는 감수성. 그리고 고객이 원하는 것을 만들어서 줄 수 있는 역량.


아마 그 맘때쯤이 내가 그 정도의 감수성과 역량이 생기기 시작했을 때다. 내가 욕망하는 대상에 한해서는, 조금 깊게 고민해보면 그 상대가 무엇을 원하는지 파악해낼 수 있었고, 그걸 전부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까지는 해줄 수 있는 역량도 생겼다. 그래서 호기롭게 쓴 것일 테다.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니 그 말의 숨은 진의는 이거였다. "나도 이제 사랑할 수 있을 거야!" 이제야 왜 스승이 사랑을 사업에 비교하는 것을 싫어했는지 알겠다.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아니다. 상대가 원하더라도 주지 않아야 하고, 상대가 원치 않더라도 줘야할 때가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어쩔 때는 상대가 가장 원하지 않는 것을 줘야할 때도 있다.





늘 사랑 앞에서 좌절한다. 사랑은 나의 어설픈 지성으로 도달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기 때문이다. 어설픈 지성으로 사랑을 또 고정시켰다. "사랑은 상대가 원하는 것을 주는 거야!" 상대가 원하는 것을 읽어서 없는 역량을 쥐어 짜내 그것을 줘봤다. 상대는 만족했다. 원하는 것을 주었으니까. 알고 준 것이기 때문에 피해의식은 없었다. 만족한 상대를 보고 나도 기쁘기도 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관계에서 나는 묘한 외로움과 공허감을 느꼈다. 어느 순간부터 자꾸만 역할놀이를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역할놀이가 무엇일까? 역할놀이는 어떻게 시작되는 걸까? 역할놀이는 ‘너 이걸 원하지? 내가 그걸 줄게!’라는 마음에서 시작되는 것 같다. 너 이게 결핍된 거지? 그러면 내가 그걸 채워줄께. 이제 왜 원하는 것을 주는 것이 ‘조련’인지 알겠다. 너의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것. 그건 고객을 만족시키는 법이지 사랑하는 이를 진정으로 기쁘게 하는 법은 아니기 때문이다.


역할놀이의 끝은 공허다. 역할놀이를 하다보면 마음 속 한구석에 회의가 들기 시작한다. ‘너의 필요를 충족시켜주지 않는다면 날 사랑하지 않을 거잖아’라는 회의. 역할놀이가 반복될수록 그 회의는 점점 굳어져 간다. 그리고 그 회의가 굳어진 만큼 상대에게 마음이 닫힌다. 결국은 나도 상대에게 사랑받고 싶기 때문이다. 아버지가 그랬다. 아버지는 소중한 사람들의 경제적인 필요를 충족시켜주는 역할을 오랫동안 해왔다. 그 동안 아버지의 마음속에서는 ‘내가 돈이 없다면 넌 날 사랑하지 않을 거잖아’라는 회의가 쌓여오지 않았을까. 그렇게 아버지는 점점 사람들에게 마음을 닫게 되지 않았을까. 몇 년 전에 아버지가 자신이 죽고 나면 너네들이 묘지에 찾아올 때마다 용돈을 주는 시스템을 만들어야겠다는 말을 농담처럼 한 적이 있다. 그때 나는 말했어야 했다. "난 돈 안 줘도 아빠 기억하고, 아빠 찾아갈 거야. 난 아빠를 좋아하니까." 그걸 말하지 못했다. 나 또한 아버지가 나의 경제적 필요를 충족해주고, 나는 아버지의 품 안의 철없는 딸 역할을 하는 것에서 벗어나질 못했기 때문이다.


역할놀이는 끝나야 한다. 소중한 이와 현재 역할놀이를 하고 있을 수 있다. 그 역할놀이는 참 편하다. 원하는 것을 내주는 가게에 온 것 마냥, 늘 오는 단골손님에게 대접하는 것마냥 편하다. 하지만 역할놀이는 끝나야 한다. 상대의 필요를 충족해주고 싶은 마음이 진심이라도 그렇다. 사랑은 한 사람의 실존과 한 사람의 실존이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요를 충족해주는 관계는 한 사람의 부분과 한 사람의 부분이 만나는 일이다. 그 필요의 범위가 넓다고 해도 마찬가지다. 부분의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전체와 전체의 만남만이 사랑이다. 역할놀이에서 도달할 수 있는 최대의 기쁨은 그 역할(나의 부분)에 대한 자기긍정이 전부다.




오랫동안 고민한 화두가 있었다. ‘믿어준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 화두가 거의 일 년 내내 머릿속을 맴돌았다. 알 듯 말 듯하면서도 도저히 표현할 수가 없었다. “아버지는 나를 믿지만 믿어주지 않았다. 스승은 나를 믿지 않지만 믿어준다.”라는 문장만 떠올랐었다. 나는 사람은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이 믿어주는 만큼만 자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건 내가 경험했기 때문이다. 아이는 부모가 믿어주는 만큼만 자란다. 운 좋게 다 커서 정서적인 부모가 바뀌는 경험을 했다면, 그 부모가 믿어주는 만큼만 또 자랄 수 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을 진정으로 믿어준다는 건 대체 무엇일까? 그 사람의 잠재성을 보아주는 것일까?


그 화두에서 계속 머뭇댔다. 이제 조금은 알 것 같다. 나는 내가 아끼는 사람에게 말했어야 했다. 근사한 사람이 되어줘. 나는 아버지에게도 말했어야 한다. 저는 아버지가 죽기 전에 저희말고 사랑을 해보셨으면 좋겠어요. 역할놀이만 하던 나는 그렇게 말하지 못했다. 나 또한 '내가 너의 필요를 충족해주지 않는다면 넌 날 필요로 하지 않을 거야'라는 회의감 속에 있었기 때문이다. 필요를 충족해주는 관계, 역할놀이를 끝내면 그 관계는 끝이 난다. 그렇게 끝난 관계는 그대로 끝날 것인지 아니면 진정한 관계로 거듭날 것인지의 기로에 서게 된다. 그건 목숨을 건 도약이다. 진정한 관계로 거듭날 가능성은 언제나 희박하기 때문이다.


진정한 관계는 참 어렵다. 필요의 관계에서 실존의 관계로 가는 것. 그건 내가 먼저 ‘실존’으로서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관계 속에서 어떤 '역할'이 아니라 ‘김혜원’이라는 한 사람으로 존재할 때만 가능하다. 그건 참 어려운 일이다. 역할이 아니라 실존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늘 오해받을 가능성과 관계가 끝나버릴 위험성을 껴안고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난 그저 ‘좋은 사람’이고 싶다. 심지어 싫어하는 사람들 앞에서도 ‘좋은 사람’인 척 하고 싶어 하는데, 좋아하는 사람 앞에서는 오죽 그럴까. 하지만 ‘좋은 사람’은 역할이다. ‘좋은 사람’ ‘좋은 연인’ ‘좋은 부모’ ‘좋은 스승’은 다 역할이다. ‘좋은’이라는 표딱지가 붙은 모든 것은 사랑받지 못할까봐 불안한 사람들이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역할일 뿐이다. 진짜 ‘좋은 사람’ ‘좋은 연인’ ‘좋은 부모’ ‘좋은 스승’은 ‘나쁜 사람’ ‘나쁜 연인’ ‘나쁜 부모’ ‘나쁜 스승’이 될 수 있는 사람이다. 그게 실존으로서 한 사람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넌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 언젠가 스승이 나에게 해주었던 말이다. 그 말을 듣고 스승이 나를 믿어준다는 것을 느꼈다. 나는 스승을 믿고 스승은 나를 믿어준다.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내가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믿음이 생겼다. 그 믿음 때문에 나는 계속 아름다운 사람이 되는 방향으로 내 삶을 밀어나갈 수 있게 되었다.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는 건 지금 난 아름다운 사람은 아니라는 말이다. 그런데 스승은 나에게 아름다운 사람이 되어 달라고도 하지 않았다. 넌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다고 했다. 그 말 안에는 이중의 믿음이 중첩되어 있다. 지금까지 스승의 믿어줌을 잘 따라온 나에 대한 믿음. 그리고 내가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계속 옆에서 마음을 다해 도와줄 것이라는 자신에 대한 믿음. 그 이중의 믿음이 ‘믿어줌’을 만든다. ‘믿어줌’은 진정한 관계다.


이제 내가 왜 누군가를 믿어주지 못하는지 알겠다. 역할놀이에서 상대에 대한 믿음은 쌓일 수 없다. 그리고 진정한 관계가 아니라면 그 사람이 아름다운 사람이 될 수 있도록 내가 마음을 다해 도와줄 것이라는 믿음도 생기지 않는다. ‘믿어줌’이 뭔지 모른다는 건 사랑을 해본 적이 없다는 말과 같다. 나는 여전히 ‘믿어줌’이 뭔지 모르겠다. 하지만 역할놀이를 끝내야 한다는 건 알겠다. 역할놀이의 끝에는 공허만이 있을 뿐이니까. 역할놀이는 참 편하고 안온하다. 편하고 안온한 것은 유해하다. 진정한 것은 늘 오해와 갈등과 마찰의 거친 땅 속에 있다. 매력적인 사람은 무엇인가? 오해받을 가능성과 관계가 끝날 위험성을 껴안고 '역할'이 아닌 '실존'으로 존재할 수 있는 사람이다. 매력적인 사람은 진정한 관계를 맺을 수 있는 사람이다. 매력적인 사람은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다. 나는 매력적인 사람이 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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