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기 무대는 자기가 만드는 거다.” 언젠가 수업 중에 스승이 한 말이다. 이 말이 마음속에 오래도록 남았다.
나의 이야기를 하며 산다. 가끔씩은 이 브런치라는 공간에, 또 가끔씩은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이 함께 하는 더 작은 공간에 나의 이야기를 한다. 내 감정, 내 경험, 내 생각, 내 욕망을 담은 짧은 조각글들을 쓰기 시작한지 이제 육년이 다 되어 간다. 한번은 스승과 친구들과 함께 캠핑을 간 적이 있다. 입김이 하얗게 나오는 추운 겨울 밤, 다 같이 밖에 모여 앉아 캠프파이어를 했다. 돌아가면서 노래를 한 곡씩 불렀다. 난 초등학교 때 즐겨 부르던 뮬란의 <Reflection>도 부르고, 또 힘들었던 시기 수없이 따라 불렀던 김광진의 <편지>도 불렀다. 둘 다 나에게 의미 있는 노래였다. 그 노래를 부르는 내 목소리는 떨렸고 어떤 부분에서는 눈물이 핑 돌기도 했다. 다른 친구들도 마찬가지였다. 노래를 부르는 친구들의 목소리에서 그 친구들이 보내온 시간이 느껴졌다. 친구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고 친구들의 노래를 듣는 그 순간이 참 따뜻했다. 다들 난 이런 시간을 보내왔다고 소중한 사람들 앞에서 조심스레 이야기하는 느낌이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나의 조각글들이 그 노래와 같았던 것이 아닐까 싶다. 난 이렇게 살았고 이렇게 느꼈으며 이렇게 생각하고 이렇게 살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소중한 사람들에게도 이야기하고, 가끔은 누가 들을지 모르는 이 열린 공간에서도 이야기했다. 그 조각글들을 쓰며 참 많이도 울고 웃었다. 캠프파이어 앞에서 덜덜 떨리는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듯이, 덜덜 떨리는 마음으로 글을 썼다. 새삼스레 그 시간들이 참 소중하게 느껴진다. 떨리는 목소리로 부르는 노래는 어설프다. 떨리는 마음으로 쓴 글도 어설프다. 그런 내 어설픈 노래와 어설픈 글들을 어여쁘게 봐주었던 사람들이 있어서 얼마나 다행인가. 정말이지 나는 많이 사랑받았다.
“내 무대는 내가 만드는 거다.” 그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오랜 시간 뚫지 못한 화두였다. 그 말의 의미가 이제야 마음에 와 닿는다. 내 무대는 내가 만든다는 의미는 무엇인가? 공간을 대관하고 티켓을 돌리고 정해진 날짜에 공연을 하면 내 무대를
만드는 건가? 그렇지 않다. 진정으로 “내 무대를 내가 만든다”는 의미는 버스킹에 가깝다. 버스킹은 어떻게 하는가. 사람들이 오가는 광장에 나가서 준비한 공연을 ‘그냥’ 하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내 무대가 만들어지는 것이다. 그것이 "내 무대는 내가 만든다"는 말의 진정한 의미다. 준비된 무대에 오르는 것이 아니라, 언제 어디서든 내 무대를 만들 준비가 되었는가.
언젠가부터 ‘공연’이 하고 싶었다. 글을 쓰는 나에게 ‘공연’이란 글의 모음, 즉 ‘단행본’일 것이다. 그간 울고 웃으며 쓴 조각글들이 많이도 모였다. 그 글들을 통해 소중한 사람들과 마음을 나눴던 순간도,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게 된 순간도 많이 쌓였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조각글을 쓰고나면 마음에 조금씩 결핍이 생기기 시작했다. 좋아하는 사람들 앞에서 노래를 부르면 마음은 따뜻해졌지만 그게 다여서는 안될 것 같다는 직감이 들었다. 이 노래들을 모아 내 삶의 어떤 매듭을 하나 지어야될 순간이 온 것 같은데 어떻게 해야할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이 이야기를 몇 년 전 스승에게 했다. 스승은 나에게 “여자의 몸”이라는 제목 하나를 선물해주었다. 나의 이야기들은 그 제목으로 묶일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심장이 뛰었다. 어지럽게 흩어져 있던 내 이야기들이 어느 한 점을 중심으로 순식간에 모여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 제목을 선물 받은 뒤 단 한 순간도 그 생각을 하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런데도 나는 나의 ‘공연’을 향한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이제 그 이유를 알겠다.
책에는 제목과 부제가 있다. 제목은 책의 이야기들을 하나로 모아주는 구심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제목만으로 부족할 때가 있다. 그때 부제를 짓는다. 부제는 어떻게 짓나? 작가마다, 편집자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저자가 이 글들을 통해 하고 싶은 말을 부제에 담으려고 한다. 예를 들어 어떤 화가가 바다 그림을 연작으로 그린다면 그 작품의 제목은 <바다>가 될 수 있겠지만, 그 화가가 그 연작을 통해 순간순간 변하는 자연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면 부제는 <어떤 것은 변화함으로써만 같아진다>가 될 수 있는 것이다. 내가 얼마 전에 편집한 스승의 책도 마찬가지다. 스승은 ‘피해의식’이라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글들을 썼다. 나는 그 글들을 통해 스승이 하고 싶은 말이 무엇이었을지 고민해 부제를 지었다. 스승은 ‘피해의식’이라는 대상을 통해 우리가 어떻게 상처받은 마음에서 벗어나 다시 사랑하며 살 수 있을지를 알려 주고 싶었던 것 같았다. 그래서 그 책의 부제를 “상처받은 마음을 어떻게 치유할 것인가?”로 지은 것이다.
눈물 지으며 ‘노래’ 불렀던 순간들을 모아 나의 ‘공연’을 해보고 싶었다. 눈물 지으며 썼던 ‘조각글’들을 모아 나의 ‘책’을 엮어보고 싶었다. 그렇게 내 무대를 내가 만들어보고 싶었다. 하지만 무언가 마지막 조각이 찾아지질 않았다. 스승에게 오래전 제목까지 선물 받았건만, 무언가 계속 주저하는 마음이 생겼다. 그 조각글들을 쓰며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무엇이었는지 스스로 언어화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제야 내가 왜 내 공연의 부제를 스스로 짓지 못했는지 알겠다. 내 공연의 제목은 “여자의 몸”이다. 그리고 부제는 “상처받은 몸이 아닌 욕망하는 몸”이다. 나는 여자의 몸에 가해진 상처와 억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여자의 몸이 지니고 있는 욕망에 대한 이야기를 쓰고 싶었다. 상처와 억압에 대한 이야기를 쓴다면, 그것이 욕망을 가로막기에 쓸 수밖에 없는 것이지, 상처와 억압 그 자체를 이야기하고 싶진 않았다. 슬픔에서 이야기를 끝내고 싶지 않았다. 슬픔(상처와 억압)의 이야기 뒤의 기쁨(욕망)의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 방점을 ‘기쁨’에 찍은 공연을 하고 싶었다. 그게 내가 이때까지 공연을 하지 못한 이유다. 그리고 이제야 공연을 할 준비가 되었다고 느끼는 이유다. 이제야 비로소 나는 내 삶이 마음에 들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내 스스로를 ‘상처받은 몸’이 아닌 ‘욕망하는 몸’으로 볼 수 있게 되었고, (많은 좌충우돌과 부침이 있어도 스스로 균형만 잡을 수만 있다면) ‘욕망하는 몸(삶)’이 ‘기쁜 몸(삶)’이라는 사실을 진짜로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네가 단행본을 쓴다면 각 잡고 썼으면 좋겠다.” 오래 전에 스승이 나에게 한 말을 잊지 않고 있다. 무언가를 ‘각 잡고’ 하는 것은 여전히 나에게 부담스러운 일이다. 어린 시절부터 잘해야 한다는 강박에 너무 오래 시달려온 탓이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떨리는 목소리로 엉망진창 노래 부르는 것에 만족할 순 없다. 어설픈 내 모습마저 아껴주는 사람들이 있다고 해서, 계속 어설픈 모습에 머무를 순 없다. 나는 이제 그럴 시간이 지났다. 사랑 받았으면 움직여야 한다. 사랑받은 힘으로 계속 더 근사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이제 나의 ‘공연’을 준비해야겠다. 그리고 햇살 좋은 어느 날, 거리에 나가 ‘버스킹’을 시작해야겠다. 내 무대는 내가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