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욕탕 가는 날
시골 마을은 으레 대중목욕탕이 없었다. 가정의 보일러조차 없던 그 당시 추워지면 아궁이에 불을 지폈다. 뜨거워진 물을 퍼서 겨우 머리 감기 정도를 했으니, 목욕은 무리였다. 오늘날 지구 온난화로 우리나라의 겨울이 따듯해진 편이고, 건축이 발달해서 단열도 우수하다. 그러나 그때는 방안 윗목의 물이 얼 정도로 단열이 잘되지 않았다. 연로하신 할머니를 뺀 우리 가족은 버스를 타고 시내의 대중목욕탕에 갔다. 아버지는 겨우 오빠만을 데리고 남탕에 가셨고, 어머니는 나머지 넷을 건사하셨다. 넷을 목욕시키시고 당신 몸을 씻으시면, 무척이나 지쳐 보이셨다. 고사리손으로 어머니의 등을 문질러 드리기도 했지만, 아마 간질거리는 수준이었던 것 같다. 어머니께서는 당신 손이 닿지도 않는 등을 다시 문지르시느라 힘들어하셨기 때문이었다.
목욕을 마치면 기분이 상쾌하고 배가 고팠다. 짜장면은 그야말로 지상에서 가장 맛있는 요리였다. 그 당시 신문에서 물가의 상승 폭을 거론할 때면, 꼭 라면과 짜장면의 가격을 언급할 정도로 국민 요리였다고 생각된다. 아버지께서 좋아하셨던 것은 간짜장이었는데, 덩달아 우리 식구는 간짜장을 좋아하게 되었다. 간짜장은 야채와 춘장을 기름에 볶은 소스를 면발 위에 얹은 것으로, 조금 더 기름기가 있고 고소한 맛이 있었다. 간짜장 가격이 일반 짜장보다 조금 비쌌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 당시는 '수타면’을 보편적으로 먹었다. 면발을 만들기 위해 탁 탁 내리 치는 소리가 듣기 좋았다. 아주 가끔은 탕수육도 주문해 주셨는데, 그럴 때면 우리는 완전히 이성을 잃을 만큼 소리를 질러댔다. 보드라우면서 바삭거리는 튀김옷과 그 안의 육질의 씹히는 식감, 그리고 무엇보다 달짝지근하고 새콤한 탕수육 소스를 바닥까지 다 먹었다. 나중에 면발 만드는 기계가 시판되었을 때, 나의 아버지는 당장 구입하셔서 우리에게 면 요리를 만들어주셨다. 그러나 아버지에게는 죄송했지만 우리는 짜장면 집을 더 사랑했다.
식사를 마치면 극장으로 향했는데, 영화를 잘 이해하지는 못했지만 위기를 겪는 장면이 나올 때마다 간이 조그맣게 오그라들었다. 아슬아슬하게 진행되다가 다행스럽게도 결말은 주인공의 입장에서 사필귀정으로 끝나고 주인공은 항상 멋지게 성공했다.
목욕탕으로 시작해서 짜장면집으로 마지막에는 영화관으로 긴 하루가 겨울날 방안에 잠시 머문 햇살처럼 짧게 끝나면, 해가 기울기 전에 서둘러 집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