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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루씨Luce Oct 12. 2020

동지 팥죽이 무서운 아이

나의 식탁

동지는 하지와 반대로 일 년 중 낮이 가장 짧고 밤이 가장 긴 절기를 의미한다. 동짓날에는 어김없이 할머니께서 팥죽을 쑤어 주셨다. 가마솥에 팥을 삶아 으깬 후 받힌 앙금 물에 찹쌀로 빚은 새알심을 넣어 눌지 않게 저어가며 뭉근히 끓인다. 새알심이 둥둥 떠 오르면 다 된 것이다. 이렇게 만든 동지 팥죽과 김장 김치를 함께 먹었다.


김장김치는 땅에 묻은 단지에서 꺼내 밑동만 잘라 상에 올린다. 김치를 한줄기 잡고 여러 갈래로 찢은 후, 기다란 김치 가닥을 수저 위 팥죽에 올렸다. 입에 한가득 넣고 우물거리면 쫀득한 새알심이 달달하고 고소했다. 팥죽은 주로 뜨겁게 먹기도 했지만, 겨울철 차가운 상태의 것도 맛이 있었다. 다만, 새알심이 응고되기 때문에 나는 주로 팥 앙금 죽만 퍼 먹다가 할머니에게 혼이 나기도 했다. 먹지 말라면 그것만 먹고 싶은 열망에 점점 새알심을 싫어하고 앙금 죽만 좋아하며 성장했는데, 이제는 새알심도 맛있게 먹으면서 할머니를 추억한다.

할머니의 팥죽 끓이시는 모습, 나도 아궁이에 불때는 것을 많이 도와 드렸다

할머니께서는 불교신자셨지만 상당히 샤머니즘적 믿음을 지니신 분이셨다. 팥죽을 우리들만 먹고 끝내는 것이 아니라, 잡귀를 쫓는다고 하여 대문, 장독대, 부엌 문지방, 외부의 화장실 벽 등에 뿌렸다. 어두운 화장실 벽에 액을 쫓기 위해 뿌린 동지팥죽이 말라서 오그라 들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것을 볼 때마다 잡귀가 생각이 나서 겁에 질렸다. ‘액을 막기 위해 뿌린다는 말’이 오히려 관계성을 느끼게 했다.


내가 초등학교 저학년까지는 집의 구조가 개조되지 않아서 외부의 푸세식 화장실을 사용했다. 작은 볼일은 요강단지를 이용했다. 막둥이 남동생이 겨울밤에 큰일을 보고 싶다고 하면, 누나들이 순번을 매기며 데리고 나갔다. 우리는 그 순간이 너무 싫었는데, 춥고 무서웠기 때문이다. 겨울 해는 아주 짧아서 금세 어둠이 내려앉았다.


나는 큰 누나였기 때문에 외부 화장실에 혼자 다녀야 했다. 화장실에 가는 것을 무서워하던 나는 늘 엄마를 불렀다. 그러나 엄마는 퇴근 후 집안일을 하시느라 바쁘셔서 동행이 힘드셨던 것 같다. 어릴 때 나는 눈이 커서 부엉이 같다고 했는데, 부엉이 눈이 더 커져서 엄마를 부르며 집안으로 뛰어갔다. 그때마다 뒤에서 나를 잡으러 오는 잡귀가 있을 것 같아 달리는 순간이 영원처럼 느껴졌다.

불이 켜진 집 쪽으로 달리는 나

벽에 묻은 팥죽 자국조차 무서워했던 나는 어른이 되어서도 겁이 많아서 혼자 떠나는 여행은 실행에 옮기지 못한다. 대신, 이런저런 요리 글로 시간여행을 하고 있으니 글을 쓰며 지난날로 여행하는 지금 이 시간이 소중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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