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박죽과 식혜
무더운 여름날 더위를 식히는 비가 퍼부어 내리면 우리 오 남매는 쭈르르 마루에 앉아 다리를 흔들흔들하면서 장대비를 보거나, 마당을 이리저리 뛰어다니며 비를 맞았다. 그때마다 할머니는 " 비 올 때 그렇게 다리 흔들면 복 달아나!" 또는 " 비 올 때 뛰어다니면 번개 맞아!"라고 큰소리로 우리를 꾸짖으셨다.
할머니의 무서운 꾸중으로 인해 나는 비 올 때뿐 아니라 언제든 복이 달아날까 두려워 다리를 떠는 습관이 아예 없다. 그렇다 치더라도 에너지 많은 천방지축 아이들은 하나가 비속에 나가면 다들 우르르 달려 나가 비를 맞으며 뛰어다녔다. 여럿이 있으니 천둥 번개는 덜 무서웠던 것 같다. 뛰어다니다 보면 비도 그치고 배 속도 꼬르륵 거려 집에 들어왔다.
그런 날이면 할머니는 조각낸 늙은 호박의 껍질을 긁고 계시면서 우리들에게 뒷밭에 가서 강낭콩을 따 오라고 하셨다. 호박죽을 끓여주실 준비를 하시는 모습에 신이 나서 우리들은 한걸음에 달려가 콩을 따 오곤 했다. 어린 나의 손톱으로 강낭콩의 가운데를 콕 찍은 후 쭉 벌렸을 때 얼굴을 내미는 콩 알들이 모두 다 여물어 있으면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만약 안이 여물어 있지 않고 쭉정이 되어 있는 것들을 까면 낭패라는 생각에 기분이 좋지 않았다. 우리는 누가 더 예쁜 콩을 많이 모으나 내기하듯이 자기가 깐 것을 앞에 모으면서 콩을 깠다. 늙은 호박은 자르기와 껍질을 깎는 것이 힘들어서 아빠가 틈 나실 때면 작업을 도와주셨다.
호박죽을 끓일 때는 옆에 붙어서 잘 저어줘야만 한다. 바닥에 조금이라도 들러붙으면 탄내가 전체 음식에 배어 들어 먹을 수가 없게 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호박죽이 보글거리면서 튈까 봐 조금은 멀찍이 서서, 고개를 서로 디밀면서, 할머니가 주걱으로 휘둘러 젓는 모습을 침을 꼴깍거리며 지켜봤다.
덤벙덤벙 뿌려 넣은 밀가루 반죽이 맑아지고 콩이 익은 모습을 하면 다 익은 것이다. 엄청나게 커다란 늙은 호박을 자르고 다듬어 푹푹 삶아 으깬 후 밀가루 반죽된 것을 뿌려 넣고 우리가 깐 강낭콩을 넣어 폭폭 달이듯 끓이면 달달하고 고소한 '늙은 호박 푸대 죽'이 된다.
이 명칭은 왜 그리 지어졌는지 모르겠다. 우리 집에서만 그렇게 불렸을 수도 있고 아니면 나이 어린 우리들끼리 지어내서 그리 말했는지 몰라도 우리는 할머니의 '늙은 호박 푸대 죽'을 늘 맛있게 먹었다.
‘밀가루 푸대 죽’ 의 푸대는 포대의 사투리이고 아마도 그 당시 밀가루가 포대자루에 담아져 있었는데 밀가루를 수제비 반죽보다 물을 더 많이 넣어 밀가루 죽처럼 개어서 넣었기 때문에 그리 말했던 듯싶다.
'늙은 호박’은 지금도 그렇게 부르는데 ‘늙은’ 대신 ‘노란 왕 호박’ 또는 ‘재래 호박’이나 ‘토종 호박’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가끔 했다. 원래 나는 실없이 이런저런 생각을 잘한다. 그런데 결국 제일 적절한 명칭은 ‘늙은 호박’이라고 결론짓게 되었다. 늙은 호박과 우리 할머니의 이미지가 항상 겹쳐지기 때문이다.
늙은 호박은 쓰임새가 다양했는데 할머니는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 호박전, 호박 식혜 등을 해 주셨다. 조금 가느다랗게 썰어 말린 후 떡을 해 먹기도 했다. 지금도 내가 제일 좋아하는 떡은 호박떡이다. 그리고 호박을 긁어낼 때마다 호박씨를 모아서 말렸다. 나는 호박씨 말린 것을 좋아했는데 제법 고소하고 씨들이 통통해서 까먹는 재미가 솔솔 했다. 요즘엔 단호박이 많이 시판되고, 핵가족이 되어 식구들도 많지 않기에 늙은 호박으로 호박죽을 해 먹는 집들이 적다.
호박죽을 좋아하는 내가 어른이 되어 할머니를 떠 올리면서 할머니의 레시피대로 늙은 호박과 밀가루 반죽을 넣고 해 보니 어린 시절의 그 맛이 나지는 않았다. 이리저리 시도를 하다가 나중에는 늙은 호박과 단호박을 섞어서 했다. 늙은 호박은 단호박에 비해 부피가 크고 영양가는 많지만 단맛이 적기 때문에 늙은 호박으로만 호박죽 요리를 하면 설탕이나 꿀을 많이 넣게 되기 때문이다. 나의 아이들이 어렸을 때는 늙은 호박으로 찹쌀가루 반죽을 해 넣거나 새알심을 만들어 넣은 호박죽을 해 먹기도 했다.
그러나 늙은 호박을 파는 재래시장에 가면 지금도 절대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한두 덩어리를 사 들고 집에 오게 된다. 지난가을에도 두 덩어리를 사서 작업실 한쪽에 놓고 언젠가 꼭 해 먹으려고 했다. 하지만 장식처럼 구석에 뎅그러니 있다가 어느 겨울 날 보니까 일부가 썩어 있어서 버려야 했다. 이제는 더 이상 늙은 호박죽을 요리할 시간도, 나눠 먹을 사람들도 없다. 그냥 아주 조그만 단호박을 하나 사서 푹 삶아 찹쌀가루를 개어서 넣어 요리하게 된다. 우리 집 근처에 로컬푸드 직매장이 생겼으니 싱싱한 콩이라도 사서 넣어봐야겠다. 요리는 역시 나눠 먹을 때 훨씬 맛이 나는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