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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에피종결자 Jun 21. 2022

시간

     거의 매일 고요한 날의 연속이었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기엔 바람이 점점 더 매섭도록 차가워지고, 마당에 쌓인 눈이 얼고, 해가 떠있는 시간이 점점 짧아지고 있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냥 매일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날에 불과한 것 같았다. 그저 배가 고프면 점심때인가 보다, 또 입이 궁금해지면 어느덧 저녁인가 보다 하고 동물처럼 시간을 지각하는 게 나라는 인간인가 싶었다. 하루 24시간 중, 이렇게 의미 없이 깨어있는 17시간의 시간은 차곡차곡 가슴에 작은 모래처럼 쌓여 어떤 날은 몸을 일으키는 것조차, 밥을 먹는 것조차 귀찮다 느낄 정도로 무겁게 느껴졌다. 문제는 이런 시간이 앞으로 너무 많이 남아있다는 거였다. 

  

   시간이 더디게 간다고 느끼기 시작한 게 이곳으로 이사 온 지 3년 정도 지났을 즈음이었던 것 같다. 나와 남편은 삼십 년 넘게 서울의 아파트에서만 살다, 홍천의 25평 남짓한 작은 전원주택으로 이사를 왔다. 집은 소박했지만 집 앞에는 계곡물이 흐르고, 돌아가신 엄마가 좋아하던 꽃을 마음껏 심을 수 있는 서른 평 남짓의 텃밭이 있으며, 딸이 유기견 보호소에서 데려온 행복이와 사랑이가 뛰어놀 수 있는 마당도 있었다.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은 집이었기에 남편은 집을 보러 온 날 바로 계약서에 도장을 찍어 버렸다. 서울을 떠난 삶을 제대로 상상 한 번 해보지 않던 때에 갑작스럽게 내린 결정이었다. 그 이유의 9할은 아들놈이었다. 서른다섯이 된 아들은 어느 날 다짜고짜 결혼할 여자가 있다고 했다. 신중하게 잘 만나보라 는 말에, 요즘은 남자가 집을 안 해오면 결혼을 못한다며 집 구하는 것을 도와달라고 부탁을 하는 것이었다.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일은 아니었다. 다만, 얼마나 남았는지 모르는 여생을 남은 재산으로만 살아가야 하는 부모 형편을 잘 아는 아들이라면, 아니 여태 밥 한 번 안 굶고, 학비 한 번 안 거르고 대주느라 고생한 부모의 마음을 잘 아는 아들이라면 제 앞가림은 알아서 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작게나마 가지고 있던 탓인지 아니면 나와 남편에게 준비할 시간도 제대로 주지 않고 얼굴 한 번 못 본 여자 친구와 당장 결혼을 하겠다 해서인지 아들에게 큰 실망감을 느꼈다. 제 알아서 하라고 하자는 나와는 달리 남편은 몇 날 며칠 머리를 싸매고 고민했다. 그러더니 우리가 살던 아파트를 팔아 그중 일부를 수도권에 전셋집 하나 구해주고 남은 돈으로 홍천에 있는 작은 전원주택을 구해서 살자 보자고 했다. 몇 번이나 말다툼을 해야 했다. 그러나 내게 그것보다 나은 대안이 없었고, 남편이 경제권을 가지고 있기에 결국 내가 항복했다. 미국에 있는 딸이 우리 결정에 섭섭해하지 않는 것만 해도 다행이었다. 


   남편이 홍천을 택한 이유는 30대 때 춘천 영업 지사로 발령이 나 4년이나 살았던 적이 있어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그 당시 우리가 알고 지내던 사람들은 당연히 대부분 연락이 끊겼지만, 그래도 그때 살았던 기억이 남편에게는 꽤 좋았던 모양이었다. 아무리 그렇다 해도 지금 생각해보면 이곳으로 완전히 거처를 옮긴다는 것은 참으로 용감하고 대담한 결정이었다. 아들은 장가보내고, 딸은 미국에 보내 놓고 친구 하나 친척 하나 없는 홍천으로 왔으니. 누군가는 우리에게 참으로 자유롭고 멋진 은퇴 후 삶이라고 말했지만 아마 반강제로 주어진 자유랄까 방임이랄까 하는 것이 제대로 누릴 줄 모르면 고통스러운 고립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모르고 한 말이 었을 것이다. 


   처음 1년 정도는 모든 것이 새로웠고 그중 일부는 재미도 있었다. 이사 온 집은 겉으로 보기엔 멀쩡한 벽돌집이었으나 전 주인이 15년 넘게 살던 흔적이 남아있다 보니 이것저것 자잘하게 손볼 곳이 많았다. 지출을 최소화하기 위해 웬만한 것은 남편과 내가 직접 팔을 걷어붙이고 일을 했다. 아파트에서 살면서 해본 거라고는 집수리할 때 페인트 칠이 나이나 천장 조명을 바꾼 게 전부라 삐걱대는 방문을 갈고, 삭아버린 방충망을 교체하고, 거실 장판을 걷어 강화마루를 까는 일들은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 굉장히 피로했다. 요령이 없는 탓이라며 남편은 아들을 시켜 전원주택 생활에 관한 노하우가 담긴 책 몇 권을 사 오더니 읽는 둥 마는 둥 하다 결국 창고에 처박아 두었다. 책 대신 남편은 사람을 사귀어 왔다. 철물점 아저씨, 삼성 홈데코 사장님, 이장님 등등. 그들은 집에 놀러 올 때면 ‘아 진사장, 이건 그냥 나무판자 어디서 하나 구해가지고 못으로 박아두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일을 뭐 그렇게 힘들게 해' 라며 당신들의 노하우가 묻은 설루션을 알려 주었다. 그때마다 남편은 오버스러운 리액션으로 그들을 치켜세워 주었다. 남편의 타고난 영업꾼 기질은 대체적으로는 큰 장점이었으나, 그런 남편을 볼 때마다 저 인간은 남들에겐 싹싹하면서 왜 내게만 이렇게 툴툴거리나 싶어 속이 상할 때가 많았다. 


   첫 해엔 서울에서 알던 지인들과 친척들도 몇 번씩 집에 놀러 오곤 했다. 첫 번째엔 집들이라고, 두 번째에는 여름휴가길에 보고 싶어 들렀다며 왔다. 손님들이 오면 짜인 프로그램처럼 텃밭 옆에 놓인 의자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고, 점심에는 마당에 모여 고기를 구워 먹다 해 질 녘 즈음 헤어졌다. 텃밭이라고는 했지만 요령이 없어 이것저것 원하는 것을 막 심어놓고선 제대로 가꾸지를 못해 수확할 만한 것이 없었다. 고구마는 너무 다닥다닥 심어 가을에 캐고 봤더니 엄지 손가락만 하게 잘게 나와 누구 하나 나누어주지를 못하고, 사랑이와 행복이만 실컷 먹였다. 그나마 방울토마토와 대파처럼 저 혼자서 알아서 잘 자라는 아이들은 몇 번 수확해 먹었는데, 부부 둘이서 먹기엔 양이 많아 대부분은 말라죽거나 썩어 죽었다. 눈에서 멀어져서인지, 도시의 삶이 바빠서인지 집에 오는 손님의 숫자는 1년이 지나자 금방 절반도 안되게 줄더니, 그다음 해에는 가끔 전화 통화에서 ‘조만간 또 놀러 갈게'라거나 ‘다은이 엄마는 너무 좋겠다. 우리 진영이 아빠도 은퇴하면 양평 가서 살자더라'라는 알맹이 없는 인사말만 남을 뿐이었다.  


   이후 내 고요한 일상에 남은 것은 남편과 나만 쳐다보는 두 마리 강아지 그리고 집 밖의 자연뿐이었다. 문제는 그 모두가 그리 나와 나누는 대화에 말재주가 없다는 것뿐이었다. 어느 날은 하루 종일 남편과 나누는 말이 저녁엔 뭐 먹을까, 티브이 좀 다른 거 틀어봐, 강아지들 밥 줬어? 정도였다. 남편은 사회성이 좋고 두뇌회전이 빠른 사람이었으나, 입이 짧고 예민하여 하루 이상 집을 떠나 있는 것은 싫어했다. 나이가 들수록 체력도 조금씩 약해 홍천에 온 뒤로는 시내에 잠깐씩 나가는 것 빼고는 1시간 이상 거리는 잘 가려고 들지를 않았다. 가끔 딸에게서 전화가 오면 어느 날은 반가움보다 너는 왜 이렇게 멀리 사니 하는 서운함이 마음 깊이 올라왔다. 서운함을 들키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꾹꾹 누르면 딸은 “엄마 오늘 무슨 일 있어?”하고 물었고 나는 그저 “아무 일도 없어”라고 힘 없이 대답했다. 저녁에 뭐 먹을까 하는 대화 말고 집 앞에 공원을 걸으며 남편과 자식 흉을 함께 보거나, 번잡한 아웃렛을 돌다가 요즘 물가가 미쳤네, 무슨 옷 하나에 10만 원씩 해 하는 쓸데없는 이야기들을 시시콜콜 해대고 싶을 때가 점점 늘었다. 반대로 줄어드는 내 말 수만큼 나의 에너지도 줄어갔고, 집 밖의 마당과 텃밭을 가꾸는 시간보다 집 안에 앉아 멍하니 티브이를 보는 시간이 늘어났다. 


                                                                      *


   저녁 식사를 마치고 소파에 앉아 내일은 또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하는 생각을 시작했다. 그 생각이 시작되자 가슴이 한없이 답답해져 남편에게 물었다.

“여보 답답한데 우리 내일은 어디 바람 쐬러 갈까?”

“날도 추운 데 가긴 어딜 가” 

초점 없이 티브이만 쳐다보며 대꾸하는 남편을 보니, 여느 때와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속이 뒤틀거렸다. 괜히 싸우지 말아야지 다짐하고 몇 번 심호흡을 했다.

“아니, 내가 좀 답답해서 그래. 추우면 따뜻하게 입고 가면 되지. 그때 다은이가 카톡 보내준 거 보니까 가평에 이탈리안 마을인가 뭔가 하는 게 생겼다던데, 거기 가볼까?” 

“가고 싶으면 당신 혼자 갔다 와. 나는 그런 데 별로 안 좋아하는 거 알잖아.”  

“그놈의 혼자! 내가 혼자 갈 거면 당신한테 물어봤겠어? 같이 사는 마누라가 답답하다는데 그거 하나 같이 못가? 그런 거 하나 같이 못 가는 게 무슨 남편이야?” 

   생각하거나, 제어할 틈도 없이 나는 이성을 잃고 아이처럼 엉엉 울기 시작했다. 한 여름 스콜 같은 눈물이 마구잡이로 쏟아져 내렸고, 남편에게 아프기만 해 봐라 너 요양원에 보내 놓고 절대 안 찾아갈 거라는 둥의 말을 폭탄처럼 쏟아냈다. 그래 놓고 분이 풀리지 않아 한참을 방에 들어가 거실을 향해 소리를 질렀다. 영문을 알리 없는 행복이와 사랑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내 옆에 앉아 낑낑거렸다. 갑작스러운 내 발진에 당황한 남편은 문 밖에서 내 말을 듣다 억울하다는 듯 내게 미쳤냐고, 남들은 부럽다는데 철없이 왜 맨날 답답하다는 소리를 하냐는 둥, 지금까지 고생해서 산 게 몇 년인데 맘고생을 안 하니까 심심하단 소리를 해댄다면서 그럴 거면 나가서 알바를 해서 돈이라도 벌어 오라는 둥 소리를 질렀다. 조금 뒤 남편이 현관문을 쿵하고 있는 힘껏 밀어 닫고 나가고 나서야 울음을 그쳤다. 

   

    남편은 싸울 때마다 같은 레퍼토리로 내 배가 부르다고 표현했다. 그런 날도 있었다. 매일 해야 하는 의무와 책임을 다 내려놓고, 절에 들어가 숨어버리고 싶다는 생각이 들던 날들. IMF 때 실직한 이후 2년째 새로운 일을 찾지 못하고 책상에 앉아 고스톱을 치는 남편을 대신해, 동대문 새벽 시장에서 하루 7시간씩 아르바이트를 하고 받는 돈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던 시절이었다. 그 시절에는 먹고 살 걱정만 조금 덜할 수 있다면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고 감사하며 살겠다며 기도를 하곤 했었다. 그러나 내 마음은 한없이 간사하여 남편이 사업을 다시 시작하고, 형편이 조금 나아지자 이제는 제발 자식 걱정만 안 할 수 있다면 평생 감사하며 살겠다고 말을 바꾸었다. 그때의 간절함은 작금의 또 다른 고통에 말끔히 묻히고 말았다.  

 

   몇 일째 남편과 대화를 하지 않았다. 하루 이틀 내 눈치를 살피며, 점심 안 먹어? 저녁은 뭐 먹어? 내가 청소기 밀까? 이런 걸 묻던 남편은 삼일째가 되자 포기했다는 듯 때가 되면 차를 끌고 어딘가에 나갔다 돌아왔다. 철물점 아저씨를 꼬셔 자장면이나 한 그릇 같이 먹고 오는 모양이었다. 저녁에는 햇반을 데워 먹거나 밖에서 사 온 빵을 대충 먹곤 했다. 나는 그저 말없이 내가 먹을 음식만 챙겨 조용히 먹고 치워두었다가, 남은 시간엔 식탁에 앉아 자수를 놓았다. 일주일쯤 지나자 딸에게서 전화가 왔다. 결국 딸에게 SOS 쳤나 보지 치사한 놈이라는 생각을 하며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엄마, 괜찮아? 아빠랑 싸웠어?”  

 “네 아빠가 전화했어? 치사한 놈” 

 “응, 아빠가 놀랬나 봐. 나한테 한국에 들어오면 안 되냐고 묻더라고. 엄마 많이 속상한 일 있었어?”  

 “네 아빠 꼴 보기도 싫고, 엄마 집이 너무 답답해. 여기서 이렇게 계속 사는 게 맞나 싶고. 어디론가 훌훌 떠나고 싶어. 엄마 너 있는 데 갈까?” 

 “갑자기..?”  

갑자기라고 묻는 딸의 목소리에서 주저함과 부담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혼자 남을 아빠를 걱정하는 마음, 말도 제대로 안 통하는 곳에서 온전히 자신에게 의지할 엄마를 챙겨야 하는 마음이 복잡하게 얽힐 딸의 마음을 모르는 바 아니었으나 그 순간에는 홍천의 이 작은 울타리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내 마음이 더 간절했기에 모른 척했다. 딸은 억지로 내게 정 원하면 그렇게 하라고, 그런데 영어도 잘 못하는 데 혼자 있을 때 괜찮겠냐, 입국 심사 같은 거 잘할 수 있겠냐고 물었다. 네가 도와주면 되지 않냐고 짜증을 좀 냈다. 딸은 체념한 듯 그럼 그렇게 하자고 말했다. 그리고 다음 날 금방 비행기 표와 미국 전자비자를 신청해 주었다. 다행히 이전에 만들어둔 여권의 유효기간이 남아있었다. 


                                                                    *

   

     오색 구슬을 양탄자처럼 깔아놓은 듯한 비행기에서 바라보는 아득한 저 밑. 비행기 게 목적지를 향해 착륙할 때 내가 혼자 미국까지 왔다는 게 실감이 났다. 해외여행을 몇 번 해봤어도 가이드나 딸 없이 혼자 하는 것은 처음이었기에 이제 와서 좀 무서웠다. 남편이 아쉬웠다. 그렇다고 공항에서 길을 잃는 아줌마가 될 수는 없는 노릇이기에 비행기에 내린 뒤에는 딸이 알려준 대로 표지판을 열심히 확인하며 따라다녔고 화장실에서 만난 한국인 승무원에게도 도움을 받았다. 미국 입국 심사는 생각보다 더 떨렸다. 여성 회관에서 생활 영어를 2학기나 배웠는데 이제와 학비가 아깝게 느껴질 정도로 아무 말도 들리지 않았다. 이런 걸 딸은 어떻게 배운 건지. 미리 적어온 노트를 펼쳐 아이엠 비지팅 마이 도터를 반복해 말하며 열흘 뒤 한국으로 돌아가는 항공권 예약 확인증을 창구로 들이밀었다. 심사를 하는 양반도 많이 답답한 듯 몇 가지 질문을 하다 한숨을 푹 쉬었다. 다행히 항공권 예약이 먹힌 듯했다. 여권에 도장을 쿵 하고 찍더니 내게 빨리 저리 가라는 듯 차갑게 손짓하며 넥스트를 외쳤다. 


    딸은 연차를 쓰고 공항까지 나를 데리러 왔다. 엄마 혼자 여기까지 오다니 정말 대단해! 정말 잘했어!” 이렇게 먼 곳에서 혼자 일하며 살고 있는 자신이 더 대단하면서도 내게 일부러 더 칭찬을 해주는 딸에게 좀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딸은 대학생이 된 이후 줄곧 미국의 실리콘밸리에서 일하고 싶다는 말을 했었다. 돈을 모아 방학 때 두어 번 미국을 다녀오더니 졸업하고 나서는 그런 말 없이 외국계 기업에 바로 취업을 하기에 그냥 한국에서 자리를 잡으려나 보다 했는데 어느 날 갑자기 미국에 있는 본사로 발령이 났다는 소식을 전했다. 넌 누굴 닮아 그렇게 자유롭고 용감하니라고 묻자 대뜸 엄마 닮았지 누굴 닮아라고 하던 딸이었다. 그저 내가 듣기 좋으라고 한 말이겠지. 축하한다고 말해주면서도 난 이제 딸이 없으면 누구에게 의지할까 싶어 한동안 울적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 딸의 소식을 듣던 날 남편은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우리는 참 아들은 실컷 키워 며느리에게 뺏기고, 딸은 열심히 키워 미국한테 뺏겼네' 하곤 한숨을 푹 쉬었다. 그날은 남편과 내가 함께 외로웠다.  


   미국 캘리포니아 집 값이 한국의 몇 배는 된다더니 월세가 200만 원 가까이 되는 딸의 집도 생각보다는 허름하고 작아 좀 놀랐다. 날 닮아 깔끔한 성격 덕에 집은 깨끗하고 단정하여 지내기에는 불편함이 없었다. 이곳도 겨울이라 추웠지만 낮에 창문 안으로 들어오는 햇빛이 워낙 강하고 찬란하여 한국보다 춥게 느껴지진 않았다. 거실 한편에 짐을 풀고 나자 딸은 동네 구경을 시켜 준다며 나를 데리고 나섰다. 내일부터는 자신이 회사에 있는 동안 엄마가 혼자 잘 지내야 한다며, 여기가 슈퍼, 여기가 베이커리 하며 하나하나 알려주는 것이 안쓰러워 나도 열심히 머릿속으로 여기가 슈퍼, 여기가 베이커리 하며 되뇌었다. 텃세가 그렇게 심하다는 동대문 새벽 시장 일도 해 본 나인데 뭐 이까짓 거 말 좀 안 통하는 동네라고 겁낼 게 있나 하며 씩씩한 척을 했으나 당장 내일부터 하루 9시간을 딸 없이 보내야 한다 생각하니 조금 아득했다. 왜 조물주는 인간을 이렇게 나이 먹을수록 겁이 많아지는 존재로 만들었을까. 그래도 홍천과는 온통 다른 것뿐이라는 게 조금 설레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딸을 먹이려고 집에서 가져온 김과 낙지 젓갈을 꺼내어 저녁 상을 차렸다. 아무것도 가져오지 말라던 딸은 막상 차려 놓으니 맛있다며 밥을 두 공기나 먹었다. 그래도 내가 온 게 이런 점에서는 좋은 점도 좀 있지 않나 싶어 마음의 위안이 되었다. 이 얘기 저 얘기를 하다 딸이 물었다.  

“엄마, 아빠가 요즘 엄마가 많이 답답해하는 것 같다던데.. 혹시 집에 있는 게 답답하면 뭐 좀 배우러 다녀 봐. 엄마 원래 피아노 배우고 싶어 했었잖아. 내가 알아봐 줄까?”    

“집에 피아노도 없고 배워봤자 연습도 못하는 걸 뭐”  

 “그럼 봉사활동을 해보는 건 어때?” 

딸이 걱정하는 마음 반, 도와주고 싶은 마음 반으로 이것저것 자신이 알고 있는 것들을 추천하는 것을 알았지만 어쩐지 내가 이렇게 불쑥 찾아온 게 불편하여 빨리 뭐든 간에 해법을 찾아주려는 게 아닐까 싶어 서글펐다. 딱히 눈치를 주는 것이 아닌데도 독립해 살고 있는 딸의 집에 오니 눈치가 보이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문득 또다시 남편 생각이 났다. 딸에게 많이 의지는 했어도, 남편이 그래도 내겐 가장 편한 사람이었구나. 마음 놓고 소리쳐 화낼 수 있고, 잔소리도 할 수 있고.  

“알아. 엄마 영어도 배우러 다녔고, 그 문화센터에서 수놓는 것도 한참 배웠어. 너 한국에 있을 때 왜 몇 번 보여줬잖아. 지금은 더 올라갈 반이 없어서 못 가. 그래도 그때 배운 거 안 까먹고 집에서 계속 수놓고 그래.” 

   문화센터 자수 수업에서 고급까지 모두 수료한 사람은 나 하나뿐이었다. 대부분의 엄마들은 몇 개월 정도 하다가 자녀들을 챙겨야 해서, 재미가 없어서, 재료비가 많이 들어서 하는 갖가지 이유로 그만두곤 했다. 그래도 수업 시간에 모르는 엄마들 그리고 선생님과 모여 이 얘기 저 얘기하며 수를 놓는 시간이 너무 좋았다. 고급반을 졸업하고 나서 남편에게 “여보, 서울에 가면 프랑스 자수 자격증 딸 수 있는 곳이 있다던데 한 번 해볼까? 문화센터 선생님이 계속하고 싶으면 생각해보라던데 괜찮은 것 같아서. 일주일에 한 번만 차 타고 왔다 갔다 하면 되니까.”라고 물었다. 남편은 그래라는 대답 대신 갑자기 거기까지 배웠으면 이제 집에서 취미로 하면 되지 뭐 서울까지 가서 그런 걸 하냐고 그거 다 자격증 장사라고 짜증을 냈다. 남편은 가끔 카드 내역서를 보고도 종종 비슷한 짜증을 냈다. 고작해야 둘이 먹고사는 비용만 쓰고 있을 뿐인데 노년에 수입이 없다는 것이 남편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 같았다. 이사를 올 때에는 한 달에 이 정도만 쓰면 20년 정도는 저축과 연금으로 근근이 살 수 있겠다고 계산했으나, 전원주택 살이는 생각보다 예상치 못한 비용이 많이 들었고-예컨대 겨울 난방비는 아파트 살 때보다 두배가 많이 나갔고, 집에 뭔가 고장 날 때마다 사람을 부르면 또 돈이 나갔다- 때때로 티브이에 평균 수명 백세 시대, 10년 뒤 국민 연금 고갈 따위의 뉴스가 나오면 등골이 서늘해지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남편은 우리가 죽는 날까지 자식에게 짐이 되지 않으려면 지금보다 아껴 생활해야 한다고 했다. 그런 말을 들을 때마다 아직 건강한 이 몸뚱이로 어디라도 나가 아르바이트라도 하면 좋겠다 싶었는데 나이 60이 넘은 아줌마를 써주는 일자리가 이런 강원도 촌구석에 있을 리가 없었고 그것이 생활비를 운운하는 남편 앞에서 내 자존감을 한없이 내려앉게 만들었다. 나는 잘못 내린 버스 정류장에서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고 있는 것 같았다. 이 정류장은 내게 너는 충분히 늙어 이제 일을 할 필요가 없다며 ‘은퇴'를 강요하고, 노인복지랍시고 난 쓰지도 못하는 지하철도 무료 이용권 따위를 주는데 나는 아직 내가 너무 젊다고 느껴졌고, 무언가 더 생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어떻게 하면 되는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서울에 있는 친구들 중 절반은 직장에 나가는 자식 대신 손주를 돌보며 다시 30대로 돌아간 삶을 살고 있었는데 이럴 줄 알았으면 내 자식에게도 손주나 빨리 낳으라고 할 걸 그랬나 싶었다. 손주라도 키우면 내가 좀 쓸모 있다고 느끼지 않을까. 그러나 손주를 대신 키우다가 진짜 0 늙어버리면 어쩌나 무섭기도 했다. 

 “맞다, 엄마 수 진짜 잘 놓지! 고급반까지 하다니 대단한데! 나도 나중에 하나 만들어 줘. 집이 좀 휑한데, 수놓은 거 부엌이나 거실에 걸어 놓으면 훨씬 나을 거 같지 않아?”    

그러고 보니, 딸의 집이 너무 썰렁해 보였다. 열흘 머무는 동안, 식탁보라도 하나 짜줘야겠다 싶었다. 혹시 몰라 수놓는 도구들을 챙겨 온 게 다행이었다. 미국으로 오는 비행기에서 조금 뜨다 만 수를 꺼내 딸에게 보여주었다. 

“대박, 엄마 진짜 정말 잘한다. 이거 너무 아깝다. 팔아도 될 것 같아.”  

“이런 걸 누가 돈 주고 사겠어 그냥 취미로 하는 거지 뭐. 누구 만나면 선물이나 주고.”  

“요즘에 이런 거 사는 사람들 많아. 집 인테리어 하는 게 트렌드잖아. 가만있어봐. 이런 수공예품 파는 사이트도 있는데 이름을 까먹었어. 내가 나중에 찾아서 보여줄게.” 

딸은 밤새 잠을 안 자고 인터넷을 뒤지는 것 같았다. 나는 시차 때문인지 깊게 잠에 들지 못하고 뒤척이다 결국 아침 6시도 채 안되어 침대 밖으로 나왔다. 딸과 함께 마시려고 부엌 이곳저곳을 뒤져 원두를 찾고, 커피를 내렸다. 7시가 조금 지나자 딸이 일어나 분주하게 씻고 머리를 말리더니, 아침에 누가 커피를 내려주니까 좋다며 웃었다. 

  “아 맞다, 엄마 심심하거나 뭐 찾고 싶은 거 있으면 이 노트북 쓰면 돼. 내가 여기 비밀번호 적어둘게. 무슨 일 있으면 전화하고. 알았지?” 


    딸이 현관을 나선 뒤, 컵을 씻고 이부자리를 정리하고 청소기를 한 번 돌렸다. 어제 먹고 남은 밥과 반찬을 꺼내어 대충 아침 겸 점심을 먹었다. 그리고 휴대폰을 꺼내 잠시 남편에게 카톡을 보낼까 하다가 덮고 뜨거운 해가 벌써 내리쬐는 창 밖을 바라보았다. 오늘은 뭐하고 보낼까. 낯선 풍경이 펼쳐지는 이 공간에서도 머릿속에 제일 먼저 드는 생각이 홍천에서 드는 생각과 한치 다를 바 없었다. 카페라도 가볼까 싶어 핸드백에 수 도구와 휴대폰, 영어 단어장을 챙겨 넣고 집을 나섰다. 


    동네가 참 예뻤다, 오르락내리락하는 길, 영어로 쓰인 간판들, 예쁜 색깔로 페인트 칠이 되어 있는 집들도 하나같이 알록달록하고 귀여웠다. 오래전에 본 영화에서 본 적이 있는 트램도 있었다. 트램이 지나가는 레일을 쫓아가다 보면, 길을 잃지는 않겠다 싶어 그 길을 따라 쭉 걸었다. 계속 걷다 보니 작은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살짝 다리가 뻐근하여 좀 쉬고 싶어졌다. 커피 정도는 혼자서도 살 수 있을 거야. 카페에 들어가 한참을 메뉴를 보다, 너무 긴장한 나머지 내가 뭘 보고 있는지 조차 분간이 잘 되지 않아, 그냥 아는 단어를 최대한 그럴듯하게 뱉었다. 원 카페 라테. 플리즈. 젊고 예쁜 직원이 뭐라 뭐라 하더니, 내가 계속 잘 알아듣지를 못하자, 메뉴판 오른쪽을 가리키며 쓰리 달러라고 이야기했다. 다행히 쓰리 달러는 알아들었다. 지갑을 꺼내 한국에서 미리 바꿔온 달러들을 보다, 10달러라고 쓰인 지폐를 내밀었다. 거스름돈을 받고 마음이 놓였다. 이제 됐다. 비어있는 2인용 테이블에 가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카페 안에는 혼자 앉아 신문을 보거나 책을 읽는 사람들도 몇몇 있었다. 다들 혼자 시간을 잘 보내는구나 생각했다. 물론 한국에도 카페에 혼자 앉아 있는 사람들이 많지만, 그들 대부분은 무언가에 열중하고 있는 젊은 아이들이었다. 여기선 내 또래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많았다. 햇빛이 잘 드는 가운데 테이블에는 나보다 나이 가 더 많이 든 것 같은 할머니 한 명이 커피를 마시며 스웨터 같은 걸 짜고 있었다. 나도 내일은 여기 자수를 가져와야지 싶었다. 홍천에 돌아가면 카페에 가서 가끔 책이라도 읽어볼까, 아 남편이 돈 아깝다고 뭐라 하려나 하는 생각도 했다. 요의가 느껴져 화장실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화장실 찾는 게 뭐라고 이런 것조차 남의 땅에선 이렇게 긴장이 되는지 다행히 토일렛이라는 단어와 여자 그림이 보였다. 하나하나가 나이 든 내게 다 큰 미션이었다. 혼자 미션 하나를 클리어했다는 점에서 어쩐지 좀 뿌듯했다. 


    다음 날에는 조금 더 멀리까지 걸어가 보았다. 걷다 보니 내가 좋아하는 골동품 같은 걸 모아놓고 파는 빈티지 샵이 보였다. 엔틱 한 찻잔, 예쁜 금색의 티스푼, 빵을 담아 놓으면 좋을 것 같은 투명한 돔 형태 그릇 등을 하나하나 구경하고 있는데 점원이 다가왔다. 헬로 다음에 하는 말은 잘 못 알아 들었으나, 우선 예스라고 대답했다. 헬프라는 단어를 얼핏 들은 것 같은데 아마도 필요한 게 있으면 얘기하라는 소리가 아닐까 싶었다. 60이 넘은 아줌마의 장점이라면 대체로 상황에 따른 임기응변이나 예측 같은 게 잘 된다는 것이다. 한참을 구경하다가 결국 티스푼 네 개를 집어 들었다. 네 개 해봤자 몇 천 원 밖에 안된다니 참 잘 샀다 싶었다. 이런 게 딸이 말하던 소확행인가 보다. 사실 찻잔이 더 마음에 들었지만 한국으로 가져가기 쉽지가 않을 것 같아 포기했다. 나중에 딸을 통해 들으니 그 숍은 굿윌이라는 우리나라로 치면 아름다운 가게 같은 것으로 누군가 쓰던 물품을 기부받아 싸게 팔고 남은 수익금으로 어려운 이웃을 돕는 가게였다. 아, 앤티크 가게가 아니었구나. 뭐 아무렴 어때. 


    딸하고 보낼 수 있는 주말이 다가왔다. 이번 주 주말에 뭐 하고 싶은 없냐고 묻는 딸에게 우리가 미국에서 보내는 첫 번째 주말이네라고 대답을 했더니 그다음 주말이 오기 전에 한국에 돌아가야 하지 않냐고 물었다. 함께 보내는 유일한 주말이라고 해도 첫 번째가 맞긴 맞지 않느냐고 그냥 그 말이 주는 에너지가 좋다고 말했다. 

“그래 엄마, 첫 번째 주말에는 그럼 우리 차 타고 바다 보러 갈까?”    

“아니, 엄마 라스베이거스 가고 싶어. 라스베이거스 가자.”  

“라스베이거스?” 

“응, 인터넷 찾아보니까 라스베이거스에 전 세계 도시가 다 있다며? 홍천에 몇 년 있었더니 엄마는 도시가 보고 싶어.”  

“라스베이거스까지 가려면 차로 여서 시간은 가야 할 텐데 괜찮을까?” 

“엄마도 운전할 수 있잖아. 너 힘들면 엄마랑 번갈아 가면서 하면 돼.”  


    토요일 아침에 간단히 사과 하나, 바나나 하나씩만 먹고 출발했다. 세 시간 정도 넓은 고속도로를 달리고 나자 어느덧 주변 풍경이 마을 하나 찾기 어려운 휑한 사막, 황야 같은 모습으로 바뀌었다. 계속 같은 풍경만 나오다 보니 차가 움직이고는 있는 건지, 빠져나갈 수 없는 터널 속에 갇힌 건지 구분이 잘 되지 않는 착시 현상이 느껴졌고 보조석에 있던 나도 슬슬 졸음이 왔다. 딸에게 이삼십 분마다 피곤하지는 않은지 물었는데 계속 괜찮다던 딸도 이번엔 조금 하품이 난다고 답했다. 엄마가 돼서 딸에게 졸음운전을 시킬 수는 없기에 용기를 내어 운전을 해보기로 했다. 한국에서 운전 경력 20년도 넘었는데 길가에 아무것도 없는 넓은 도로를 달리는 게 뭐 어렵겠어. 말은 그렇게 했지만 미국에서 운전을 한다는 건 너무나 겁나는 일이었다. 신호나 잘 볼 수 있을까, 도로 표시는 온통 영어인데 놓치지 않고 갈 수 있을까, 미터 하나하나 정확히 알려주는 내비게이션도 있고 옆에서 계속 지켜봐 주는 딸이 있다고 해도 무서운 건 무서운 거였다. 그래도 어렵사리 1킬로, 10킬로, 100킬로를 달리고 나니 몸에 긴장이 풀렸고 신이 났다. 60이 넘은 내가, 미국에서 라스베이거스에 운전을 해서 가고 있다니. 그 순간에는 내가 집에서 할 일 없이 수만 놓는 사람도, 쓸데없는 곳에 돈만 쓰는 사람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저녁이 다 되어서야 라스베이거스에 있는 호텔에 도착했다. 둘 다 내 운전에 긴장을 좀 했던 탓인지 몸이 너무 노곤하여 그날 저녁엔 호텔 안에 머무르기로 했다. 호텔 레스토랑에서 밥을 먹고 방으로 돌아와 뜨거운 물로 샤워를 했다. 그리고 오랜만에 딸과 앉아 집에서 챙겨 온 와인 한 병을 열었다. 

  “엄마, 엄마 온다고 했을 때 혼자 괜찮을까 걱정했는데 그래도 이렇게 같이 미국에 있으니까 좋다. 엄마 덕분에 라스베이거스도 오고. 나도 아직 친구들이랑 여기까지 와 본 적은 없거든.” 

미국 온 지가 몇 년인데 같이 여행 다니는 친구도 없냐는 말에 딸은 나이가 서른이 넘은 데다 회사를 다니다 보니 친구를 사귀기가 어렵다고 했다. 미국인들은 개인적이고 동시에 가족적이라 동료들과 주말에 만나거나 여행을 하기는 쉽지 않다는 말도 덧붙였다. 외로우면 한국에 돌아오라고 하니, 한국에 돌아가도 비슷할 것 같단다. 

“그렇구나.. 엄마도 홍천에 살면서 다른 게 힘든 게 아니라 그냥 가끔.. 나랑 30분이고 같이 산책해줄 누군가, 새로운 카페가 생기면 같이 카페에 가 줄 누군가가 딱 한 명만 있으면 좋겠다 싶은데. 아빠는 그런 걸 별로 안 좋아하니까. 말할 상대 없는 게 가장 힘든 것 같아. 어쩔 때는 하루 종일 강아지들이랑만 있으니까 내가 너무 말도 안 하고 생각도 안 해서 치매에 걸리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하고. 내가 이렇게 100살 넘게 살면 어떡하지. 그럼 지금 시간이 너무 아까운 시간이 아닐까.. 그럼 앞으로 삶에 가장 젊고 건강한 오늘을 이렇게 시골에 갇혀 허공에 날리듯 시간을 보내는 게 맞을까 생각이 들어.” 

 “엄마, 나도 요즘에 그런 생각 한다. 지금 이렇게 일 열심히 하는데 내가 이 일을 정년퇴직까지 할 수 있을까? 근데 정년퇴직을 하고 나면 그다음엔 어떡하지? 가끔 너무 무서운 거야. 늘어난 기대 수명만큼 살려면 일을 80살까지는 해야 되지 않나. 폐지를 줍고 살 수도 없는 노릇인데. 나는 그냥 엄마 아빠 돌아가시고 나서 나도 그냥 편안히 자다가 죽으면 좋겠다.. 앞으로 살 날이 너무 피곤하고 무섭다.. 그런 생각.  좀 그렇지?”  


    딸의 마지막 말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언제나 모든 일에 열정이 넘치는 것 같은 딸이 내가 죽고 금방 죽고 싶다 하니 정신이 번쩍 들었다. 너는 인생이 얼마나 아까운데 그런 소리를 하니, 너는 엄마랑 달리하고 싶은 거 다 하고 신나게 살아야지, 나는 너의 외할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게 지금도 얼마나 안타까운데, 봄 되면 마당에 예쁘게 피는 철쭉, 개나리도 못 보고 여름에 테라스에서 시원하게 비 내리며 음악 듣는 것도 못 해보고, 가을에 고구마 캐서 겨울에 구워 먹는 것도 실컷 모해 보고 죽은 게 얼마나 안타까운데. 그런 말들이 입안에 오물거렸다. 그러나 차마 내뱉지 못하고 삼켰다. 삼킨 말들이 소화가 되지 않고 밤새 내 머리를 울렸다. 그 말이 향하는 게 딸이 아닐지도 몰랐다.  

 “그래도 너무 혼자 지내지 말고, 그 영화처럼 파티 가서 친구도 좀 사귀고 해 봐.” 

 “응 걱정하지 마. 요즘에는 인터넷으로 취미 생활 같이하는 소모임 같은 것도 있거든. 그래서 심심할 때는 그걸로 등산 모임도 가고, 와인 모임도 가고 그래. 아 생각해보니까 엄마도 수놓는 거 계속하고 싶으면 한국에도 인터넷 카페 같은 거 있잖아. 거기서 모임 만들고 하면 될 텐데. 내가 한 번 찾아볼게.” 

딸은 나와의 대화 끝에는 뭔가를 자꾸 찾아본다고 했다. 그게 딸의 마음 부담을 조금이나마 줄여주는가 싶어 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다음 날 낮에는 딸과 미니 베네치아가 있다는 베네시아 호텔 지하를 구경했다. 베네치아를 가 본 적은 없지만, 실로 닮은 것 같았다. 초록색 강물과, 강물 위를 떠다니는 쪽배, 천장에 그려진 화려한 프레스코 벽화, 인공으로 만든 푸른 하늘, 이탈리아 한복판 같은 큰 광장까지. 어떻게 이렇게 도시 하나를 호텔 안으로 끌어 왔을까 싶을 정도로 놀라운 곳이었다. 오랜만에 대리석 바닥을 걸으니 발이 좀 아파 젤라토 아이스크림을 하나 사서 벤치에 앉았다. 그리워하던 인파를 보며 딸이 좋아하는 피스타치오 아이스크림을 어린아이처럼 혓바닥으로 핥았다. 아이스크림을 다 먹자 딸은 라스베이거스에 왔으면 게임을 한 번은 해야 하지 않겠냐며 호텔 지하에 있는 카지노로 나를 데려갔다. 카지노는 입장하는 순간부터 숨이 턱 막혔다. 방금 전까지 보던 베네치아와는 너무나 달랐다. 쾌쾌하고, 어둡고, 시끄러운 곳. 딸이 설득해 억지로 그림 맞추기 게임을 두 번 했으나, 빠르게 회전하는 과일 그림을 보고 있자니 더욱 어지러워졌다. 힘들다고 나가자는 내게 딸은 벌써 힘드냐고 라스베이거스에 오자고 한 사람이 누군데 이거 봐 엄마도 시골 사람 다됐네라며 웃었다. 정말 그런 모양이었다. 딸의 말을 들으니 그제야 집에 남기고 온 고요한 풍경이 조금 그리워졌다. 


     귀국을 이틀 앞둔 날 밤 딸이 내게 집에 있는 자수 작품들 사진이 있는지 물었다. 딸은 요즘에 사람들이 직접 만든 핸드메이드 제품들을 사고파는 플랫폼이 하나 있는데 거기에 내 제품을 한 번 올려보자고 했다. 카톡 프로필 사진으로 쓰려고 몇 장 찍어둔 것이 생각 나 딸의 휴대폰으로 보내주었다. 컵보드용으로 만든 네모난 자수 천을 보고 이건 하나에 5천 원, 4개에 세트로 2만 원이면 될 것 같다기에 그렇게 비싼 걸 누가 돈 주고 사느냐고 4개에 만원만 하라고 했더니 이보다 더 비싸게 내놓은 사람도 많다, 인건비를 생각하라며 기어코 4개 2만 원에 물건을 올려놓았다. 식탁 커버는 무려 5만 원에 올려놓았다. 이런 걸 사는 사람이 진짜 있기는 한 건가 딸이 날 위해 또 괜한 노력을 하는 게 아닌가 의심이 들었다. 그러나 장장 한 시간이 넘는 시간 동안 그 어플에서 내 이름을 따다 홍천 윤희네라는 상호명 같은 것을 만들고, 그 숍 안에 내가 만든 작품 네 개를 판매용으로 올려놓은 것을 보니 제법 그럴듯하기도 하고 뭔가 있어 보이는 것 같아서 또 기대가 되었다. 딸은 한국에 가서 혹시 연락이 오면 이렇게 하라며 하나하나 사용하는 법을 가르쳐 주었다. 모르면 영상 통화로 가르쳐줄 테니 걱정 말라는 말도 덧붙였다. 누가 연락이나 오겠어, 알았어하면서도 딸이 설명해 주는 것을 받아 적어 두었다. 그리고 그날 밤 잠에 들려하는데, 휴대폰이 띵동 하고 울렸다. 딸이 만든 어플에서 메시지가 온 것 같았다. ‘이 식탁 커버 사고 싶은데 혹시 사이즈가 정확히 어떻게 되는지 알 수 있을까요? 상세 내용에 나와 있지 않아서요.’ 놀란 마음에 막 잠든 딸을 개의치 않고 흔들어 깨웠다. 그리고 곧바로 답장을 보냈다. 이름도 모르는 아줌마가 만든 이런 걸 사겠다는 사람이 있구나 신기했다. 다음날 퇴근한 딸을 붙잡고 한참 아이디어스 어플을 사용하는 방법을 반복해서 익혔다. 딸이 설명하는 것을 휴대폰 동영상으로 녹화도 해 두었다. 귀국할 때까지 아이디어스에서는 아무런 알람이 울리지 않았지만 그런 건 아무렇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면 얼른 우체국부터 가서 식탁보를 보내줘야지 하는 마음뿐이었다.  


                                                                   *


    딸에게 미리 단단히 교육을 받았는지, 남편은 무작정 미국에 다녀온 내게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다. 여전히 좀 내 눈치를 살피는 모양이었다. 남들한테만 잘하지 말고, 나한테나 좀 잘하면 안 되냐는 말에도 남편은 알았다고 했다. 그런 다짐이 1주일이나 넘게 가면 다행이겠냐만은 나도 가타부타 다른 말은 더 하지 않았다. 내가 없는 사이 뭘 제대로 먹지 않아서인지 얼굴이 비쩍 마른 것을 보니 좀 안쓰러웠다. 가스불에 밥을 안쳤다. 남편이 좋아하는 솥밥을 하려는 참이었다. 밥보다도 솥 바닥에 눌어붙은 누룽지를 좋아했다. 반찬을 여러 가지를 해 놓아도 입에 맞는 것 한 가지만 곁들여 1분 만에 밥 한 공기를 끝내버리면서도 상을 다 치우고 나면 바짝 구워진 누룽지를 접시에 담아와 반찬도 없이 다 먹곤 했다. 어려서 어머니가 가끔 눌어붙은 밥을 프라이팬에 바짝 구워 설탕을 살살 뿌려 주던 것이 생각나서라는데 어떤 반찬은 어린 시절에 너무 물리도록 먹어서 꼴도 보기 싫다 하면서 누룽지는 어렸을 때 먹는 것이라 맛있다고 하니 참 사람 속은 알 수가 없다 싶었다. 한참 아이들이 크고 바쁠 때는 남편이 싫어하든 말든 전기밥솥에 10인분의 양을 해놓고 하루 이틀을 버텼지만, 이제는 이 넓은 공간에 우리 둘과 무한해 보이는 시간만 남았으니 솥밥 정도 해주지 못할 이유가 뭐가 있겠나 싶었다. 

 

   밥을 기다리는 동안 휴대폰으로 어젯밤 놓은 자수 쿠션보 사진을 찍었다. 딸이 몇 번이고 가르쳐 준 덕에 이제는 휴대폰으로 찍은 사진을 컴퓨터로 옮기는 것도 조금 능숙해졌다. USB선을 꽂고 사진을 옮기는 데 휴대폰에서 띵동 하고 알람이 울렸다. 누가 메시지를 보낸 모양이었다. 그 사람의 아이디는 토리 맘이었다. ‘안녕하세요, 자수 쿠션보 보고 연락드려요. 저도 고양이 자수가 그려진 쿠션을 한참 찾았거든요.’ 내게 온 두 번째 메시지였다. 내가 막 대답을 하려는데 그 사람이 연이어 메시지를 보냈다. ‘저 근데.. 아이디가 홍천 윤희네이시던데 혹시 디자이너님 홍천에 사시나요?’ 디자이너라는 말에 나는 피식하고 웃음이 났다. 뽀리 맘은 자신도 홍천에 산다며 혹시 원데이 클래스 같은 건 안 하는지를 물었다. 원데이 클래스가 뭔지 잘 몰라 딸에게 카톡을 보내 물어보고는 그런 건 해본 적이 없어 잘 모르겠다고 답을 했다. 그는 자신이 키우는 고양이가 죽는 날이 가까워져 오는데 고양이를 자수 놓은 쿠션을 만들고 싶다고, 가르쳐 줄 수 없냐고, 수업비는 내겠다고 했다. 나는 원데이 클래스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도 그런 건 얼마든지 가르쳐 줄 수 있다며 연락처를 알려 주었다. 남편이 모르는 사람한테 그렇게 덜컥 연락처를 가르쳐주면 되냐고 물었다. 자기가 키우는 고양이를 자수로 놓겠다는 사람 중에 못된 사람이 얼마나 있겠냐고 대꾸했다. 


   꽁꽁 얼었던 개울가 물이 조금씩 녹기 시작하는 날이었다. 밖에 낯선 자동차 소리가 들려왔다. 누가 근처에 온 모양이었다. 내 발 뒤를 쫄래쫄래 쫓아오는 행복이, 사랑이와 함께 대문 밖으로 나갔다. 처음 보는 흰색 소나타의 운전석 창문이 열렸고 창문 사이로 중년 정도 되어 보이는 여자 한 명이 보였다. 혹시 여기가 홍천 윤희네 맞나요? 저 아이디어스에서 쪽지 보낸 사람인데요… 운전석에 앉은 여자가 물었다. 아차 벌써 1시가 넘었구나 싶었다. 네 맞아요. 제 이름이 김윤희예요. 자동차는 이쪽으로 편하게 대세요. 마당 쪽으로 차를 인도했다. 흰색 자동차에 반사되는 빛이 반짝거렸다. 날이 따뜻해 다행이었다. 차부터 한 잔 먼저 내어 와야겠다고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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