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동백작 박인환, 시대의 경계에서 시대를 묻다
봄이면 진달래가 피었고
설악산 눈이 녹으면
천렵가던 시절도
이젠 추억
박인환_<인제> 중에서
시골에서 어린 시절을 보낸 저에게, 가장 먼저 가슴에 새겨진 시인은 김소월도 김영랑도 아닌, 바로 '목마와 숙녀'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박인환 시인입니다.
어릴 적 제게는 카세트 재생/녹음이 가능했던 휴대용 녹음기가 있었죠. 누나들이 사 왔을 법한 가수 박인희 님의 노래와 시 낭송 테이프 속에서, 저는 박인환 시인의 '목마와 숙녀'를 처음 만났습니다. 잔잔한 음악을 배경으로 흐르던 박인희 님의 낭랑한 목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선명합니다.
"한 잔의 술을 마시고 /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이렇게 시작하는 시를 반복해서 들으며, 그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기는 어려웠지만, 박인환이라는 시인과 버지니아 울프라는 작가에게 묘한 끌림을 느끼게 되었어요. 아마 그 특별한 인연 덕분일 겁니다. 대학생이 되어 처음으로 제 손으로 직접 구입한 시집도 다름 아닌 박인환 시집, 『목마와 숙녀』였으니까요.
오늘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책은 바로 박인환 시인의 삶을 담은 평전들입니다. 현재 제 서재에는 총 세 권의 평전과 한 권의 작가론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윤석산 선생님의 『박인환 평전: 지금 그 사람 이름은 잊었지만』(영학출판사), 강계순 선생님의 『아! 박인환』(문학예술사), 그리고 이동하 선생님 편저의 『박인환 평전: 목마와 숙녀와 별과 사랑』(문학세계사), 마지막으로 오문석이 엮은 작가총서 『박인환』(글누림출판사)이 바로 그것들이죠.
흔히 접하는 위인전은 흠결 없는 완벽한 삶을 보여주고, 자서전은 자신의 장점을 부각하며 단점을 감추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지만 평전은 이와 다릅니다. 평전은 한 인물의 일대기를 단순히 나열하는 전기를 넘어, 평가(評)와 기록(傳)이 한데 어우러진 글입니다. 필자의 주관과 명확한 기준을 통해 한 인간의 삶을 객관적으로 조명하고, 그 속에서 '좋음'과 '나쁨'의 평가를 모두 담아내는 것이죠.
이러한 평전의 의미를 되새기며, 저는 박인환 시인의 삶을 깊이 탐구하고자 합니다. 그를 '꿈을 좇아 나는 이카로스'라 칭하며, 그의 뜨겁고도 짧았던 궤적을 쫓아갈 것입니다.
강계순 선생님께서 『아! 박인환』에서 사용하신 이카로스 비유처럼, 박인환은 문학적 관습과 사회적 제약을 뛰어넘어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개척하려 했던 도전 정신과 혁신적인 모더니즘을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그는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패션과 명동에서의 보헤미안적 삶, 그리고 도시적 감각이 돋보이는 시들로 시대를 앞서간 진정한 '예술적 모험가'였습니다.
하지만 이카로스의 날갯짓이 태양을 향한 지독한 열정이자 자유로운 영혼의 발현이었음에도, 결국 추락이라는 비극적인 운명을 맞이했듯, 박인환 시인의 삶 또한 그러했습니다. '명동백작', '댄디보이'로 대변되는 그의 화려하고 자유분방한 겉모습 뒤에는 전후의 혼란 속에서 겪어야 했던 깊은 고뇌, 삶의 허무, 그리고 젊은 나이에 찾아온 비극적인 요절이 그림자처럼 드리워져 있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 글을 통해 단순히 화려했던 시인의 겉모습을 넘어, 그 빛나는 열정 뒤에 감춰진 인간적인 아픔과 고뇌까지 입체적으로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박인환 평전은 바로 이러한 한 인간의 삶을 다각적으로 조망하는 의미 있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길고 깊은 여정의 끝에서, 박인환이라는 이름과 그의 시를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요?
윤석산 선생님의 『박인환 평전』은 저자가 대학 시절 문학 수업에서 마주했던 한 질문으로 시작합니다. "지금 이 앉은자리에서 우리나라 시인들의 이름을 열 명만 대 보아라!" 이 문장은 곧 저에게도 하나의 숙제가 되어 다가왔습니다. 저는 깊이 생각할 틈도 없이 익숙한 시인들의 이름을 떠올렸습니다. 김소월, 김영랑, 김춘수, 서정주, 이육사, 박목월... 그리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금 시인의 이름들을 끄집어냈죠. 아, 이상과 박인환, 나태주, 그리고 김수영이 있었지. 이렇게 열 명의 시인을 무의식적으로 꼽아 본 후, 저의 시선은 다시 박인환 시인에게로 향했습니다.
이어서 작가는 우리 마음속에 깊이 자리 잡은 시의 구절이 시인을 기억하는 중요한 요소가 된다고 설명합니다. "한 시인에 대한 연구의 전통적인 텍스트가 되고 있는 것의 하나가, 그 시인이 쓴 시 속에 잊어버릴래야 잊어버릴 수 없는 시행의 수가 얼마나 많으냐 하는 점이라는 사실이다. 우리의 기억 속에 가장 강렬하게, 사라지지 않는 시의 구절, 바로 이러한 것으로 우리는 그 시인의 이름을 더욱 잊지 못하고, 우리의 정신 속에 깊이 묻어두게 된다는 것이지요." 이 대목은 저에게 또 다른 물음을 던지는 듯했습니다.
'당신이 기억하는 시인의 구절은 무엇인가?' 푸시킨의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하지 말라"나 윤동주의 "죽는 날까지 하늘을 우러러/한 점 부끄럼 없기를,/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나는 괴로워했다", 그리고 김춘수 시인의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그는 나에게로 와서/꽃이 되었다"처럼 우리를 사로잡는 구절들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시인 박인환은 무엇으로 기억될까요? 단연코 다음과 같은 시구가 아닐까요.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혹은 <세월이 가면> 속에 나오는 "지금 그 사람의 이름은 잊었지만 그의 눈동자 입술은 내 가슴에 있어"라는 구절이 그의 이름과 함께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이제부터 세 권의 평전과 작가론을 통해 제가 발견한 시인 박인환의 모습을 세 가지 관점에서 깊이 들여다보고자 합니다. 한 시인의 삶을 다양한 각도에서 조명하며, 시인에게 부여되었던 여러 평가와 그 이면에 숨겨진 그의 진면목을 탐구하는 여정이 될 것입니다.
많은 이들이 박인환 시인을 이야기할 때, 그의 유려한 외모와 남다른 패션 감각, 즉 '댄디보이'와 '러시아 오버코트'로 상징되는 멋을 빼놓지 않습니다. 혹자는 이러한 면모를 두고 시인이 지나치게 외양에 치우쳤다고 평가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박인환 시인은 단순히 겉치레를 중요하게 생각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평전에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는 흔히 세상이 말하듯이 새로운 도시적인 감성으로 노래하려고 했던, 한 사람의 모더니스트였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중요한 것은 생의 멋을, 이 삶이라는 경이로움에 시라는 하나의 화려한 의상을 걸치게 함으로 해서 더욱 빛나게 하려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박인환 시인에게 '멋'이란 삶을 더욱 찬란하게 만드는 하나의 예술적 태도이자, 시 자체를 더욱 빛나게 하는 '화려한 의상'과 같았음을 보여줍니다. 그의 외양은 시인의 삶과 예술을 분리할 수 없는 아름다운 표출 방식이었던 것입니다.
박인환 시인은 언제나 한 걸음 앞서 나가기를 주저하지 않았던 선구자였습니다. 평전은 그의 이러한 '선두의식(先頭意識)'이 단지 타고난 기질만이 아님을 지적합니다.
"박인환 자신이 지니고 있는 천재의식과 아울러 당시 남들보다 한 걸음 더 앞서 나아가고자 했던 선두의식은 그의 중퇴라는 학력에 항시 남다른 채찍질을 가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여기서 드러나듯, 그의 강력한 선두의식과 추진력은 젊음의 의욕, 새로운 시대에 대한 필연적인 갈구와 함께 학력에 대한 일종의 자극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그는 이러한 기저 위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채찍질하며 새로운 문학적 시도를 감행했습니다.
따라서 그의 문학적 출발은 기존의 관습에 대한 강력한 거부의 형태로 나타나는 것이 필연적인 결과였습니다. 그는 끊임없이 새로운 것을 찾아 나섰고, 그 과정에서 한국 모더니즘 시의 선봉에 서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는 단지 31세라는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하며, 그가 꿈꾸었던 모더니즘과 새로운 시의 확장을 직접 보지 못하게 되었다는 아쉬움을 남겼습니다.
박인환 시인은 종종 '명동백작'이나 '댄디보이' 이미지에 가려져 문학적 깊이가 저평가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문학 세계는 겉보기보다 훨씬 더 복합적이고 다층적입니다. 오문석 평론가는 『박인환, 위대한 반항과 우울한 실존』에서 박인환의 문학적 가치를 다음과 같이 새롭게 평가합니다.
"잘 알다시피 순수와 참여, 모더니즘과 리얼리즘의 줄타기는 김수영만의 몫이 아니다. 박인환의 모더니즘에도 김수영 못지않게 현실주의적 잠재력이 충분히 내재되어 있음은 최근의 연구자들이 밝혀내고 있다. 그런 의미에서 박인환은 경계의 시인이다. 리얼리즘과 모더니즘만 그런 것이 아니라, 아시아주의와 아메리카니즘의 사이에서 배회하는 시인이기도 하다. 또한 식민지의 무의식과 탈식민지의 의식을 동시에 보여준다는 점에서도 복합성이 두드러진다."
이처럼 박인환 시는 단순한 모더니즘을 넘어, 전후의 현실 속에서 리얼리즘적 잠재력을 품고 있었으며, 동서양의 문화적 충돌과 식민지 경험, 탈식민지 의식이라는 복잡한 시대정신을 동시에 반영했습니다. 그는 어느 한쪽에 속하기보다는 경계에 서서 모든 것을 아우르려 했던 '복합성의 시인'이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복합적인 시선과 폭넓은 사유는 그를 단순히 한 갈래의 시인으로만 묶을 수 없게 만들며, 박인환이 단순한 '명동백작'이나 '댄디보이'가 아닌, 시대를 읽고 통찰한 깊이 있는 '복합성의 시인'임을 증명하는 것입니다. 그의 삶과 문학이 남긴 궤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은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박인환 시인은 나이를 불문하고 문단의 선배들에게 '박형, 김형'이라 부르는 파격적인 호칭을 사용했습니다. 이로 인해 많은 문단 선배들이 그를 '버릇없는 친구'로 여기거나 심지어 멀리하는 경우도 있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이는 그의 자유분방하고 세속을 초월하려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기도 합니다. 멋을 좋아하고 스스로 최고임을 자부했던 그는 친밀함을 드러내기 위해 선배들에게 당돌한 호칭을 서슴지 않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인정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선생'이라는 존칭을 피하는 완고한 면모 또한 지니고 있었습니다.
평전을 통해 우리는 박인환 시인이 불꽃처럼 짧은 31세의 생을 살았지만, 일제강점기와 6.25 전쟁이라는 격동의 시대를 관통하며 시대정신을 온전히 구현했던 시인이었음을 확인합니다. 하지만 그는 때때로 「목마와 숙녀」나 「세월이 가면」과 같은 대표작으로 인해 '지나치게 우울한 패시미스트 시인'으로 각인되거나, 김수영 시인과 비교되며 독자적인 문학적 가치를 제대로 평가받지 못하는 경향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오문석 평론가는 박인환 시인을 단순한 허무주의자가 아니라 진보적 시각을 신뢰하는 '미래파'라고 단언하며, 그를 '목마와 숙녀'로만 기억하는 패시미즘적인 해석을 경계합니다. 그는 박인환의 시 「남풍」이나 「인도네시아 인민에게 주는 시」를 통해 이러한 오해가 얼마나 왜곡된 것인지를 밝힙니다. 일제에 의한 식민지를 겪은 지식인으로서, 박인환은 아시아 일대 식민 지역에 대한 깊은 연대의식을 가지고 있었으며, 해방 직후에 식민지의 문제를 거론하는 것조차 쉽지 않던 시절에 국가의 경계를 넘어 아시아 전체로 시야를 확장했던 시인입니다. 이처럼 그의 문학적 시야와 폭넓은 인식이야말로 박인환 시인만의 두드러진 특징이며, 그간 그의 시세계에 드리워졌던 오해와 축소를 바로잡아야 할 이유인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박인환 시인을 어떻게 기억해야 할까요? 그에게 드리워진 오해를 걷어내고 그의 진면목을 발견하는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숙제입니다. 일제 시대를 겪은 후 해방을 맞이하자마자 '마리서사(茉莉書舍)'라는 서점을 열어 여러 문인들에게 문학적 토론의 장을 제공하고, 신시론, 후반기 동인회를 조직하는 등 적극적인 활동을 펼쳤던 그의 모습은 결코 단순한 비관주의자나 유미주의자에 머물지 않습니다.
비록 31세의 짧은 삶이었지만, 박인환 시인은 불꽃처럼 뜨거운 열정과 자유로운 영혼으로 시대의 어둠 속에서도 자신만의 빛을 냈던 '이카로스'였습니다. 그는 좌절 속에서도 예술이라는 날개로 끊임없이 비상하려 했으며, 그가 남긴 시들은 시대를 초월하여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깊은 질문과 감동을 선사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그의 숨겨진 진면목을 제대로 이해하고 기억하는 것이야말로, 시인 박인환에 대한 우리의 책임이자 과제입니다.
이 에세이를 통해 제가 마주한 시인 박인환의 진정한 모습을 독자 여러분과 함께 나누며, 그에 대한 편견을 걷어내고 보다 온전하게 그를 기억하고자 합니다. 이 글이 박인환 시인의 삶과 문학을 이해하는 새로운 길잡이가 되기를 바라며, 그의 시가 오랫동안 우리 마음속에 살아 숨 쉬기를 기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