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쉰의 『아Q정전』을 만나다

- 루쉰의 ‘길’ 위에서 나의 ‘정신승리’를 고백함 -

by 책사냥꾼 유은


"희망이란 본래 있다고도 할 수 없고 없다고도 할 수 없다. 그것은 마치 땅 위의 길과 같은 것이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 루쉰, 『고향』 中에서 -


1. 프롤로그: 루쉰을 만나다


네덜란드의 역사가이자 문화사학자 요한 하위징아는 “고전이란 아직도 읽히고 있으며, 끊임없이 새로 읽히는 책”이라고 정의한 바 있다. 그런 의미에서 루쉰은 시대를 관통하며 여전히 우리 곁에 살아 숨 쉬는 고전 작가 중 한 사람이다.


펄 벅의 『대지』를 읽고 난 후, 내가 꼭 만나고 싶었던 중국 작가는 단연 루쉰이었다. 그간 수차례 그의 이름을 마주해 왔지만, 결국 나는 『대지』라는 광활한 광장을 거쳐서야 비로소 『아Q정전』이라는 좁고 서늘한 길에 당도하게 된 셈이다. 『대지』가 대륙의 외연을 보여주었다면, 루쉰은 그 땅을 딛고 선 인간의 가장 비겁하고도 아픈 내면을 해부한다. 나는 이제 그가 닦아놓은 길 위에 서서, 백 년 전의 아Q가 아닌 오늘날 우리 사회와 내 안에서 살아 움직이는 또 다른 아Q를 직시해 보려 한다.



2. '정신승리'라는 이름의 달콤한 독약


먼저 루쉰이 탄생시킨 불멸의 용어 ‘정신승리(精神勝利)'가 무엇인지 짚어볼 필요가 있다. 이는 현실의 패배나 굴욕을 직시하는 대신, 머릿속에서 논리를 왜곡하여 스스로를 승자로 둔갑시키는 비겁한 심리 방어기제를 말한다.


가장 흔한 예는 이솝 우화의 <여우와 신 포도>다. 포도를 따지 못한 여우가 "저 포도는 어차피 셔서 못 먹을 거야"라고 핑계 대는 순간, 여우의 '능력 부족'은 '현명한 선택'으로 둔갑한다.

소설 속 '아Q'의 방식은 더 처절하고 기괴하다. 그는 동네 건달들에게 몰매를 맞고도 "나는 아들뻘 되는 놈에게 맞은 셈이다. 요즘 세상은 정말 말세야!"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을 도덕적 '아버지'의 위치로 격상시킨다. 현실의 매질은 여전하지만, 마음속에서만큼은 자신이 승자가 되어 유유히 걸어 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정신승리는 고통을 잊게 해주는 즉각적인 마취제이지만, 동시에 현실을 개선할 의지 자체를 마비시키는 치명적인 독약이기도 하다.


3. 아Q의 비극적 도식: 본질을 가리는 허상의 연극

하지만 루쉰이 묘사한 아Q의 정신승리는 단순히 자기 위안에서 멈추지 않는다. 소설의 결말부로 갈수록 이는 자기 파멸적인 '세 가지 비극적 도식'으로 진화하며 우리 시대에 무거운 질문을 던진다.


첫째, ‘본질을 가리는 집착’이다. 사형 집행장에다 글도 몰라서 동그라미로 서명한 후 아Q는 죽음이라는 본질 대신 ‘동그라미를 얼마나 예쁘게 그리느냐’라는 기술적 완결성에 매몰된다. 이는 현대 우리 사회에서 명분 없는 내란 행위를 저지르고도 “시간이 짧았고 다친 사람이 없지 않냐”라며 지엽적인 조건에 집착하는 권력자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죄의 유무라는 본질은 사라지고, 오직 행위의 매끄러움만 따지는 비겁한 변명이다.


둘째, ‘가상 무대 위의 주인공’이 되려는 욕망이다. 처형장 수레 위에서 아Q는 구경꾼을 향해 혁명가 노래를 부르며 영웅주의에 빠진다. 자신의 과오를 ‘국민 계몽’이라 명명하며 심판자가 아닌 관객을 기대하는 이들은, 아Q처럼 현실을 ‘연극’으로 상정한다. 그들에게 대중은 소통의 대상이 아니라 자신의 가짜 영웅담을 완성해 줄 들러리일 뿐이다.


셋째, ‘허무한 종말과 역사의 냉소’다. 총구 앞에서야 “사람 살려!”라고 비명을 지르고 싶었지만, 아Q의 정신승리는 안개처럼 흩어지고 구경꾼들은 “총살은 목을 치는 것보다 볼만하지 않다”며 냉소한다. 본인은 ‘계몽가’라 우겨도 역사는 그를 ‘실패한 음모자’로 기록할 뿐이다. 자의적인 승리는 잠시의 위안일 뿐, 역사의 찬바람 앞에서는 한낱 지루하고 불쾌한 변명으로 전락하고 만다.



4. 마법사가 걸어놓은 저주라는 핑계


이러한 아Q의 비극적 도식은 비단 거창한 정치적 무대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내 삶이라는 작은 트랙 위에서도 나는 교묘하게 나만의 ‘아Q정전’을 써 내려가고 있었다. 2019년 12월, 42.195km를 완주하며 느꼈던 성취는 한때 나의 정직한 길이었다.

그러나 2020년 찾아온 팬데믹은 마치 돈키호테의 앞길을 가로막은 사악한 마법사 '프레스톤'처럼 나타났다. 돈키호테가 자신의 패배를 마법사의 농간이라 부르며 기사로서의 자존심을 지켰듯, 나 역시 ‘코로나’라는 거대한 마법사를 소환해 내 나태함을 가리기 시작했다

"아Q의 정신승리는 고통을 잊게 해주는 아편이었지만, 루쉰의 희망은 고통을 딛고 나아가는 근육이다."

나는 내란을 계몽이라 우기는 자들의 뻔뻔함을 비웃으면서도, 정작 운동화 끈조차 묶지 않는 내 나약함을 ‘코로나’라는 숭고한 핑계로 포장하고 있었다. 나 역시 본질(나태함)을 지엽적인 조건(환경)으로 가리려 했던, 또 다른 형태의 찌그러진 동그라미를 그리고 있었던 것이다.


5. 에필로그: 다시, 흙먼지 날리는 땅 위로

아Q는 매를 맞으면서도 "나는 예전에 잘 나갔던 집안사람이다"라는 과거의 영광을 끌어와 현재의 굴욕을 덮었다. 이제 나는 내 안의 아Q, 그리고 우리 사회가 강요하는 온갖 세련된 정신승리와 작별하려 한다. 루쉰은 말했다.


"본래 땅 위에는 길이 없었다. 걸어가는 사람이 많아지면 그것이 곧 길이 되는 것이다."


길은 ‘있었던 것’이 아니라, ‘지금 걷고 있는 상태’여야 한다. 나의 새로운 버킷리스트인 '산티아고 순례길(Camino de Santiago'은 더 이상 머릿속의 별이 아니라, 내 발밑의 흙이 되어야 한다. 수천 년간 수많은 보행자의 발바닥이 짓눌리고 부르트며 만들어낸 그 길 위에서, 과거의 기록은 아무런 힘이 없다.


나는 더 이상 눈 감으면 펼쳐지는 거짓된 승리의 무대에서 벗어날 참이다. 대신, 조금은 비틀거리고 더딜지라도, 발바닥에 솔직한 고통이 새겨질 길을 걷고자 한다. 희망은 이미 마중 나와 있는 것이 아니라, 발끝에 실린 첫걸음의 미세한 떨림 속에서 비로소 피어나는 것이니까. 당장 내일 아침, 먼지 쌓인 운동화 끈을 묶는 그 익숙한 손길에서부터 나의 ‘산티아고’를 시작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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