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 리딩으로 길어 올린 우리 시대의 뿌리와 ‘신여성’의 꿈
이사 간 날, 첫날밤 세 식구가 나란히 누운 자리에서 엄마는 감개무량한 듯이 말했다.
"기어코 서울에도 말뚝을 박았구나. 비록 문밖이긴 하지만 비록…."
여섯 칸짜리 집이지만 없는 게 없었다. 안방·마루·건넌방· 부엌·아랫방·대문간 이렇게 여섯 개의 방이 공평하게 한 칸씩이었다. 마당도 있었다.
- 박완서, 『엄마의 말뚝』 중에서 -
아주 오래전, TV 명작극장을 통해 스치듯 본 드라마 한 편이 있었다. 제목은 <엄마의 말뚝>. 어린 마음에도 그 서사는 희미했지만, ‘엄마’와 ‘말뚝’이라는 얼핏 어울리지 않는 낱말의 결합만은 뇌리에 선명하게 박혔다. 다정함과 딱딱함, 부드러움과 날카로움이 공존하는 이 묘한 긴장감이 내 기억 속에 깊게 자리했다.
세월이 흘러 교단에 선 나는 2015년, 우리 교육계에 독서의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킨 EBS 3부작 <슬로 리딩, 생각을 키우는 힘>을 계기로 다시 이 작품과 마주했다. 일본 나다 중·고등학교의 하시모토 다케시 선생이 창안한 ‘슬로 리딩’은 한 권의 책을 천천히, 깊이 음미하며 질문을 던지는 독서법이었다. 교사로서 학생들과 진심으로 호흡할 ‘슬로 리딩’ 텍스트를 신중하게 찾기 시작했다.
텍스트 선정에서 내가 세운 기준은 분명했다. 첫째, 아이들의 내면 성장을 다룬 소설일 것. 둘째, 우리 민족 고유의 역사성과 정서가 깃들어 있을 것. 셋째, 무엇보다 우리말의 고운 결이 살아 숨 쉬는 작품일 것. 최종 후보에는 이미륵의 <압록강은 흐른다>와 박완서의 <엄마의 말뚝>이 올랐다. 두 작품 모두 빛나는 걸작이었으나, 나는 결국 박완서를 선택했다. 이미륵의 작품은 고귀한 기품이 넘쳤으나, 독일어에서 우리말로 번역되는 과정에서 우리말의 생생한 맛을 온전히 살리기에는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어린 시절 마음에 깊이 새겨진 그 ‘말뚝’ 앞에 나는 다시 섰다.
<엄마의 말뚝>을 슬로 리딩의 눈으로 깊이 들여다보면, 박완서 작가의 또 다른 자전적 소설 <그 많던 싱아는 누가 다 먹었을까>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연결이 보인다. 고향 개풍 박적골은 작가에게 ‘싱아’라는 자연의 생명이 가득한 땅이었다. 아이들은 들판의 싱아를 뜯어먹으며 자유를 만끽했지만, 서울로의 상경은 축복이라기보다 일종의 추방이었다.
어렵게 도착한 서울 현저동 산동네는 싱아 하나 자라지 않는 메마른 시멘트 세계였다. 어머니의 손을 잡고 이곳에 발을 들인 ‘나’는 고향의 감각을 잃고 ‘문밖 사람’으로서 소외감을 먼저 체득한다. 그러나 아이인 내가 받은 상실감과 대조적으로 어머니의 눈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날카롭게 빛났다. 시골의 ‘안채’라는 봉건적 굴레에서 벗어나 자식들을 ‘신여성’과 ‘선비’로 키우겠다는 의지가 그 안에 간절히 서려 있었다.
"신여성이 뭔데?"
"신여성이란 공부를 많이 해서 이 세상의 이치에 대해 모르는 게 없고 마음먹은 건 뭐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여자란다." 잔뜩 기대하고 있던 나는 신여성의 겉모양을 그려보았을 때보다도 더 크게 실망했다. 신여성이 그렇게 시시한 걸 하는 건 줄 처음 알았다. "
소설 속 어머니가 말하는 ‘신여성’은 단순한 학력을 뜻하지 않았다. 그것은 굽실거리지 않고 주체적으로 삶을 건사하는 근대적 인간상에 대한 열망이었다. 어머니는 거친 산동네 한편에 ‘괴불마당 집’을 마련하며 서울 땅에 자신의 첫 번째 ‘말뚝’을 단단히 박았다.
비록 좁고 초라해도, 그 집은 세상의 무시로부터 자식들을 지키는 성채이자 신분 상승을 향한 디딤돌이었다. “공부해서 신여성이 되어야 한다”는 어머니의 독한 명령은, 자신은 누리지 못했던 자유를 자식들에게 물려주려는 눈물겨운 투쟁의 선언이었다. 슬로 리딩으로 문장의 숨결을 더듬으며 학생들과 나는 어머니의 억척스러움이 무분별한 욕심이 아니라 시대의 거센 파고를 견디기 위한 처절한 생존 전략임을 깨달았다.
박완서가 우리에게 남긴 것은 바로 ‘뽑히지 않는 말뚝’에 대한 뜨거운 긍정이다. 고향의 싱아를 잃은 빈자리마다, 어머니는 제 온몸을 망치 삼아 그 억척스러운 말뚝을 박아 넣었다. 그 말뚝들 덕분에 오늘의 우리는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나’라는 집을 가질 수 있었다.
나는 이 슬로 리딩 수업을 통해 아이들이 활자 너머에서 전해지는 그 서절한 망치질 소리를 듣기를 바랐다. 우리가 오늘 무심히 딛고 선 견고한 일상은 결코 공짜로 얻어진 것이 아니다. 누군가의 살과 뼈가 깎여 나가 깊고 서늘해진 그 말뚝 위에 세워진, 위대한 유산이기에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