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3 무례한 아무개들을 글로 털어내며
미국에서 이주민에 대해 연구하는 한국인 A의 요청으로 그의 논문 인터뷰 대상자가 되기로 했다.
비 오는 지난 월요일, 우리는 4시간 30분 동안의 대화를 했다. 불편했던 나의 감정들이 무엇인지 정확히 짚어준 시간이었다. 해방감을 얻었다.
"방장 선생님, 의도와 상관없이 차별은 존재합니다."
연구자 A의 가치관과 말들이 내게 긴 여운을 가져다주었다. 인터뷰가 끝난 날 집으로 돌아와서 나는 울었다. 슬픔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나를 외면하고 있었음을 발견하고 과거에 차별받았던 상처에 대한 애도의 눈물을 흘렸다. 그동안 외면했던, 나를 답답하고 화나게 만들었던 사람들이 밀물처럼 밀려왔다.
대학원 동기C,
"방장, 중국 사람들 원래 입이 그렇게 싸?"
"방장, 너 되게 까졌다!"
신발 가게 사장S,
"퉤 퉤 퉤, 중국ㅅㄲ 더러워!"
비슷한 시기에 창업한 지인 Z에게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었다. 그에게 무료 수업 장소를 제공하고, 일찍 오면 가벼운 식사도 챙겨주고, 응원하고 싶은 마음에 그의 수업도 신청해서 듣고, 생일에 3만 원권 서점 상품권까지 주었다. 내가 오지랖이 넓어도 한참 넓었다. 그와 소통하고 나면, 함께 프로젝트를 끝내고 나면 늘 끝이 찝찝한 기분이 들었다. 나에게 고마움보다 더 많은 걸 바라는 기분도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Z는 상견례 후 고민을 나에게 틀어놓은 적이 있다. 비슷한 시기에 결혼을 하는 거라, 나의 생각을 물었고 나는 해결책을 제시해 줬다. 그 이후로 그의 태도의 변화가 더 선명하게 보였다. 네가? 감히 나에게 조언을? 물론 이건 나의 느낌이다. 그리고 나는 이 느낌을 외면했다.
이와 비슷한 느낌을 주는 지인 Q도 있었다. Q는 일부러는 아니겠지...라고 생각하지만, 내가 결혼식 하는 전날 밤 9시까지 일을 하게 만들었고, 신혼여행 중에도 밤 낮 시간 가리지 않고 문자를 했다. Q는 무언가 결정할 때 주위에 의견을 많이 묻는 사람이다. 물론 나에게 기대하지 않고 타인에게 물어보듯이 습관적으로 질문을 했다. 그리고 그에게 맞는 해결책을 내게서 듣자 미묘하게 변하는 그의 눈빛을 나는 기억한다. "방장, 너 의외다. 생각보다 주관이 뚜렷하구나!" 그 이후로 함께 하는 프로젝트에서 나를 부정하고 누르려는 느낌을 받았다. 네가? 나에게 조언을? 물론 이것 역시 나의 느낌일 뿐이다.
함께 프로젝트 했던 R,
"방장님, 원래 중국사람들은 그런 식으로 일해요?"
"방장님, 제 기준 방장님은 간절하지 않고 노력함이 부족합니다."
"방장님 나이에는 그럴 수 있어요. 저도 그랬으니깐요."
"방장님 가족 보면 너무 화목해 보여요. 70~80년대 한국 가정 보는 것 같아요."
"방장님, 저는 제가 지금 한 말을 들으면 화낼 것 같아요."
"방장님, 이해합니다. 누구나 사정이 있습니다. 말해 주니까 이해가 됩니다."
"방장님, 언제 다시 손 놓을까 봐 두렵습니다. 방장님과 함께 못할 것 같습니다."
함께 프로젝트하면서 많은 배움을 준 E, 고마운 것만 기억하려고 했다.
내가 이해받지 못했고, 어쩌면 가스라이팅을 받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그와 함께 할 때에도, 프로젝트가 끝나서도 나는 정말 오랜 시간 동안 스스로를 의심했다. 내가 너무 미숙하고 너무 못 나서 이렇게 된 것이라고...
일년에 1~2번 연락하는 지인 B,
"방장님, 밤 9시 반 수면 모드 하신 거 저는 이제 알게 되어서 괜찮지만, 다른 사람은 방장님이 전화 거절하신 줄 알 수도 있어요..." (그럼 밤 9시 반 이후 전화 안 하시면...)
대관 손님 P,
"방장님, 이따 모임에 준비한 과일인데, 씻어주세요."
"방장님, 대관은 무료로, 음료도 할인해 주세요."
"방장님, 18시까지 알겠는데, 18시 30분에 다음 모임 있는 것도 알겠는데, 20분까지만 공간을 조금 더 사용할게요."
이미 약속된 시간이 지나고,
"방장님, 약속 시간에 도착하지 못할 것 같아요. 방장님 하시는 일 먼저 하시면서 기다려주세요."
"방장님, 오늘 대관 다음 주 목요일 같은 시간으로 미뤄주세요."
고맙다,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가 이토록 사치스러운 말인 줄은...
......
싫은 소리를 하지 못했고, 서둘러 긍정적으로 상황을 넘기기 급급했다. 그러다 너무 힘들면 모든 활동을 멈추고 나의 동굴 속에서 잠만 자며 간신히 일상 생활 할 수 있을 만큼의 치유를 하고 다시 '고상한' 어른으로 살아왔다. 카페 폐업을 앞두고, 훌훌 털어버리는 기분으로 불편했던 기억들을 글로 적어본다.
한국에 와서 만난 불편했던 동기의 언어적 차별, 카페를 하면서 협력했던 사람들의 언어적, 비언어적 차별 속에서 나는 스스로가 피해자임을 거부해 왔다. 나는 '고상'하기에, 착한 아이 증후군과 같이, 어쩌면 나는 고상한 어른 콤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긍정적으로 불편함을 해소하려고만 했다. 그 사람도 뭔가 사정이 있겠지, 나쁜 의도는 아니었을 것이야...
의도와 상관없이 차별이 존재하고, 불편함이 존재할 수 있음을, 뒤늦은 분노를 하며 깨닫는다.
눈물과 분노로, 글로 충분한 애도의 시간을 가지면서, 앞으로는 멋을 아는 어른으로 살아가고 싶어 진다. 그러자 비로소 서로 존중하는 좋은 사람들이 여전히 곁에 있음을 발견하고 감사한 마음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