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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editduaa Oct 23. 2022

소리를 삼키면 슬픔이 내장에 쌓이는 기분이 든다

사탕을 빼앗겨도 울지 않는 방법 02

언니의 장례를 치르던 때를 생각하면 뇌에 멍이 든 것처럼 또렷하지가 않다. 언니가 기혼자이기 때문에 부모는 상주를 할 수 없고 대신 형부와 형제들이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이유를 들은 것 말고는, 언제 어떻게 빈소에 갔는지, 영정사진은 누가 뽑아 왔는지, 상복의 사이즈는 고를 수 있었는지, 부고는 어떻게 보냈는지, 부조는 누가 받았는지, 아무 기억이 없다. 그래서 언젠가 한 친구가 이른 부친상을 당해 내게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어왔을 때도 명쾌한 대답을 주지 못했다. 정말로 기억이 안 난다.


그런데 장례식장에서 있었던 일 중 몇 가지는 수년이 지나도 잊히지 않는다. 언니의 절친 중엔 대학병원 레지던트인 친구가 있었다. 언니의 병도 그 친구가 발견한 것이나 다름없었고, 투병을 하는 와중에도 그 언니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부고를 듣고 서울에서 한달음에 달려온 그 언니는 영정사진 앞에 서서 몇 분을 꺽꺽 울었다. 말 그대로 대성통곡. 낯설었다. 우리 가족들은, 심지어 엄마도 그렇게 울지 않았다. 슬픔의 강도로 곡소리를 낸다면 우리가 가장 커야 할 텐데, 우리 가족은 울 때 소리를 삼키는 편이었다. 아무튼 누군가의 곡소리를 처음 들어 본 거나 다름없어서 속으로는 저렇게 울면 그다음은 어떻게 눈물을 그치는 거지 내내 궁금했다. 하여간 그 언니는 꽤 오랜 시간을 소리 내 울다가 눈물을 닦고 "아, 이렇게 울었으니 이제 보내줄 수 있을까"라고 말했다. 진짜 엉엉 울면 보내줄 수 있는 걸까. 그걸 들은 이후로 울면서 소리를 삼킬 때마다 슬픔이 내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기분이 든다.


또 하나의 기억은 언니의 대학 동기들이 방문했을 때였다. 그중에는 언니의 씨씨도 있었다. 헤어진 지 거의 10년이 지났을까. 언니의 스티커 사진에서 보았던 얼굴이 입구로 걸어 들어왔다. “오, 저 사람도 왔어.” 옆에 있던 작은 언니에게 귓속말로 전했다. 그 남자가 동기들을 대표해서 헌화를 하기로 한 모양인지 맨 앞에서 절을 하고 앞으로 나가 꽃을 집어 들었다. 한데, 이미 상에 올려진 꽃을 들어 옆에 있는 통에 도로 꽂는 게 아닌가. 그러곤 돌아와 애통한 표정으로 나와 맞절을 했다: 라디오에서만 듣던 웃픈 사연을 내 언니의 장례식장에서, 내 언니의 전 남자친구가 하다니. 그 남자의 존재를 모르는 형부의 눈치를 보랴 그걸 보고 터진 웃음을 참느랴, 그들이 돌아갈 때까지 혼미했던 기억이 난다.


마지막 기억은 발인을 준비하던 새벽이었다. 접객실은 발인을 함께 갈 사람들이 이미 눈을 붙이고 있어 발 디딜 틈이 없었고, 빈소에서는 잠이 오지 않아 멀뚱멀뚱 앉아 있는데, 형부와 형부의 남동생이 맥주와 안주를 들고 와 앞에 앉았다. 형부는 앞으로는 어떻게 지낼 생각이냐고 물었다. 휴학을 하고 지방에 내려와 간병으로 언니와 시간을 보냈으니, 이제 내 역할이 끝난 것이다. 처음 간병을 하러 내려와 달라고 했을 때는 나한테 얼마나 중요한 시기인데 병원에 틀어박혀 있어야 하냐고 볼멘소리를 하기도 했고, 보호자 침대에 누워서는 이건 언제 끝날까 한탄하기도 했는데. 끝이 이런 끝인 줄 알았으면 빨리 끝나게 해 주세요가 아니라 조금 더 있게 해 주세요라고 빌었을 것이다. "뭐, 학교 다시 복학해야죠"라고 별거 없는 계획을 말하고, 나는 괜히 사돈에게 결혼은 언제 하실 거냐고 물었다. 그리고 사돈은 형부한테, 형부는 다시 내 동생과 작은 언니에게 '앞으로 어떻게 할 건데'라고 물었던 듯하다. 다들 별 대답 없는 질문을 수건돌리기처럼. 그런데 그게 참 따뜻했다. 마치 어미 짐승이 새끼의 방둥이를 툭툭 밀어 앞으로 가라고 부추기는 것 같았다. 그래, 우리에겐 앞으로가 있지.


슬픔은 디폴트여서 그런가. 이런 이야기들만 뇌리에 남았다. 장례식장에서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이야기를 하고, 웃는다. 힘들 때면 이 기억들을 끄집어 낸다. 그러면 이상하게 앞으로 나아갈 힘이 생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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