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반려견 초롱이와 나, 반려인 우리 셋이 자주 가는 산책로를 걷고 있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 뒤를 걷던 한 가족이 있었는데, 그중 아주머니가 문득 이런 말을 했다.
"요즘 젊은 사람들은 저렇게 애는 안 낳고 개만 키우면서 살더라~"
그의 말이 충분히 들릴 정도의 거리였다. 나와 내 반려인은 모르는 척,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말을 던진 아주머니는 가족의 동의를 받지 못한 눈치인지 그 뒤로 아무 말이 없었다. 아마 나와 비슷한 또래였던 자녀들의 저지를 받았으리라.
나는 그 아주머니가 그때 우리에게 무례했다고 생각했다. 몇 년이 지난 지금도 나는 그의 말이 여전히 무례하게 느껴진다.
우선 우리를 겨냥한 말을 바로 뒤에서 들리게 말했다는 것이 그렇고 다음으로, 보이는 찰나의 모습으로 우리 가족의 형태를 판단해 버렸다는 것이 그렇다. 우리는 아이가 정말로 없었을 수도 있고, 이미 아이가 있었을 수도 있다. 우리는 부부가 아니었을 수도 있고, 초롱이는 우리의 반려견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리고 같은 말을 지금 들었다면 나는 마음이 아팠을 것이다. 우리 부부는 1년째 아이를 기다리는데, 아이를 만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아이의 자리를 반려견이 대체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는 점에서 무례하다. 나는 사람의 자리를 개가 대신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마찬가지로 개의 자리도 사람이 대신할 수 없다. 나에게 반려견 초롱이는 초롱이다. 아이뿐만 아니라 다른 개도, 똑같이 생긴 개라도 초롱이의 자리를 대신할 순 없을 것이다. 초롱이는 내 인생에 하나뿐인 고유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아마 그 아주머니는 반려동물을 키운 적이 없거나, 키웠더라도 나와 같은 마음이진 않았을 것 같다. 요목조목 그가 무례한 이유를 나열하긴 했지만, 사실 나는 그가 그의 입장에서 충분히 할 수 있는 말을 했다고 생각한다. 그가 아니더라도 나는 비슷한 말을 많이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들이 쌓여, 내가 이 글을 쓰는 원동력이 되었다.
앞으로 쓰게 될 글은 초롱이와 나의 역사다. 어떻게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며 존중하게 되었는지 쓸 것이다. 물론 필자의 주관적인 서술로 초롱이의 입장은 왜곡될 것이다.
나는 초롱이를 통해 사랑을 배웠고, 신을 배웠다. 나는 초롱이가 있어 아이를 가질 용기를 낼 수 있었다. 그렇게 나는 사랑할 용기를 내는 과정에 대해 말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