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한호미 6시간전

스쳐가는 사람에게 다정해야 하는 이유

깊이 생각한 것에 대해 써라



서울에서의 하루가 쓸쓸해질 때가 있다. 물건을 사러 종종 지하철을 타고 외출하면 적게는 수십 명, 많게는 수백 명의 사람을 마주치게 된다. 그럼에도 누구와도 눈을 마주치지 않고, 누구에게도 미소를 지어보지 않은 채로 집에 돌아올 수 있다. 


내가 실수로 행인의 어깨를 쳐도, 사과할 기회도 없이 아득히 멀어져 있다. 누구의 어깨를 친 건지도 모르겠다. 계산대에서 물건을 건네면 카드를 꼽기만 하면 된다. 요즘엔 키오스크로 주문한 것을 픽업하기만 해도 된다. 그러니까 이런 일들이 아주 가끔 나를 쓸쓸하게 만든다. 이건 나만의 이야기도, 대한민국 서울만의 이야기도 아닐 것이다.




잠시 살았던 뉴질랜드에서 내게 인상적이었던 건, 사람들이 모두 인사를 건넨다는 것이었다. 지나가다 눈이 마주쳐도 인사를 주고받았고, 식당에서 주문을 하거나 물건을 구입할 때는 인사가 스몰톡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날씨에 대한 이야기에서 비슷한 날씨에 대한 기억으로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흘렀다. 다시 만날 사이가 아닌데도 그들은 반갑게 말을 걸었고, 좋은 하루를 보내라며 인사를 남기고 떠났다.


나는 궁금했다. 왜 우리나라 사람들은 인사하지 않을까? 아니면 인사하지 않게 됐을까?


한국으로 돌아온 나는 스스로에게 다짐한 게 있었다. 하나는 같은 층이나 아래, 위 층에서 살고 있는 이웃들과 인사하며 지내기. 다른 하나는 대중교통을 이용할 때 직원 분들을 만나면 인사하기. 대부분의 사람들은 놀라긴 해도 인사를 잘 받아주었다. 그래도 2분 이상 대화를 지속하길 원하는 사람은 별로 없었다. 일부는 자신에게 누군가 인사를 할 것이라 기대도 하지 않았다는 듯 대답도 없이 가버리곤 했다. 


내 다짐은 점점 희미해져 갔다. 인사는 짧아졌고, 목례만 하기도 했다. 그래도 모르는 사람과 스몰톡을 나누는 경우는 종종 있었다. 주로 반려견인 초롱이를 데리고 나갔을 때였다.


 



귀여운 반려견을 보고 반응하는 모습은 사람마다 천차만별이다. 어떤 사람들은 조심스럽게 다가와 '강아지가 너무 귀여운데, 만져도 되겠냐'고 물어온다. 이런 배려에도 감동하는 나는 코로나19 바이러스가 한창일 때 빼곤, 그들을 거절해 본 적이 없다. 그렇게 사람들과 반려견에 관한 대화들을 몇 분이고 나누곤 했다.


반면 일부 사람들의 행동은 내게 불쾌감을 주기도 했다. 이를테면 아무런 말도 없이 갑자기 다가와서 초롱이를 만진다거나 입으로 쭙쭙 소리를 내며 손을 까딱거리는 행동 말이다. 나는 그럴 땐 초롱이를 안아 들거나, 목줄을 잡아당기며 자리를 피했다. 내 불쾌함을 표현하는 방식이었다. 


긍정적인 경험과 별개로 부정적인 경험은 내게 강력한 데이터로 쌓였다. 그렇다 보니 보통 내가 무례하다고 느낀 (부모 없이 달려오는) 어린 남자아이, 중년 남성, 노년 남성을 자연스럽게 피하게 됐다. 그러던 어느 날 내가 생각을 고쳐먹게 된 계기가 있었다.




초롱이와 산책 중이던 어느 날, 멀리서부터 무뚝뚝한 표정으로 초롱이를 향해 쭙쭙 소리를 내고 다가오던 할아버지를 만났다. 보통 때라면 '만지지 말아 주세요, 죄송합니다'하고 지나갔을 텐데, 그날은 초롱이가 흥분해서 달려가는 바람에 둘의 만남을 막지 못했다.


좋아서 날뛰는 초롱이를 여기저기 쓰다듬던 할아버지는, 시선을 초롱이에게 고정한 채로 내게 말을 걸었다. 그가 애지중지하며 15년 동안 키우던 반려견이 몇 년 전에 무지개다리를 건넜다는 이야기였다. 반려견이 떠난 빈자리가 너무나 커서 한참 동안 괴로웠는데, 초롱이를 보니 그 녀석이 생각이 난다고 했다. 


그렇게 그 할아버지는 '내게 불쾌감을 줄 매너 없는 사람'에서 '내 미래'가 되었다. 초롱이를 통해 한 사람의 이야기가 내게 흘러들어온 것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내가 뉴질랜드에서 경험한 친절한 인사를 한국에서 경험할 수 없었던 건 내가 방어적인 사람이었기 때문에, 내가 사람들에게 무관심했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그날 이후로 나는 위험한 상황이 아니라면, 초롱이를 보고 다가오는 사람들을 모두 받아들였다. 초롱이는 모든 사람을 좋아해서 오히려 내 변화가 반가웠을 것이다.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누면 비슷한 질문에 비슷한 대답을 하게 된다. 그래도 그들에겐 초롱이와 나의 이야기가 새로울 것이고, 내게도 그들과 그들의 반려견 이야기가 새롭다. (가끔 강아지를 키우고 싶지만 부모님이 반대해서 슬퍼하는 어린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며칠 전 동네에서 초롱이에게 말을 걸어온 여성이 생각난다. 나는 말을 몇 마디 나누고, 그에게 발달 장애가 있다는 것을 알아차릴 수 있었다. 초롱이 곁을 맴돌던 그는, 만지고 싶으면 조금 쓰다듬어도 된다는 내 제안에도 머뭇거렸다. 그는 그러다 강아지 이름이 뭐냐고 물었고, 내 대답에 만족한 듯 손을 흔들며 떠났다.


나도 다시 발길을 돌려 15미터쯤 내리막을 걸어왔을 때, 그가 뒤에서 외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몇 걸음 가지 않고, 멀어지는 우리를 쭉 지켜본 듯했다. 그가 두 손을 모아 힘껏 외친 말에 내 마음이 따뜻해졌다. 한 사람의 마음이 내게 흘러들어왔기 때문이다. 


"초롱아! 아프지 말고 행복해야 해!"


초롱이는 모르겠고, 나는 그때 행복했다. 그가 고작 인사를 건넨 나와 초롱이를 위해, 행복을 빌어주었기 때문에. 



이전 11화 나를 사랑하는 법을 모르겠다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