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받는다는 것에 대해 써라
유튜브에 '사랑받는'을 검색하면 '사랑받는 사람의 특징', '사랑받고 자란 사람의 10가지 특징', '남자에게 사랑받는 여자 되는 법' 등의 콘텐츠가 빼곡히 쌓여 있다.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타인에게 더 사랑받고, 관심에서 소외되지 않을 수 있는지 알고 싶어 한다.
나도 그랬다. 언제나 사랑받고 싶었다. 20대에 내가 했던 성찰들은 '내가 어떤 사람이고 싶은지'보다 '내가 사랑받을 만한 사람인가'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내가 뭘 좋아하는지보다, 사람들이 뭘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하는지 궁금해했다. 어느 모임에서든 사람들이 호감을 갖는 캐릭터가 되고 싶었다.
당시 이런 말들이 유행하기도 했다. '사랑받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자기를 사랑하는 사람이 돼라.' 나는 내가 이미 충분히 나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사실 어떻게 하는 것이 나를 정말로 아껴주는 것인지 알지 못했다. 그래서 나를 진정으로 아끼고 사랑해 줄 사람을 찾아서,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채우려고 했다. 지나고 보니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 줄 사람은 가장 가까운 곳에 있었다. 바로 어른이 된 나 자신이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면 어떤 사람들은 곧장 '나를 사랑하는 방법을 모르겠다'고 한다. 어떤 사람들은 '그런 건 이미 어렸을 때 사랑받고 자라서,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나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부모와의 애착 관계는 아이에게 중요하다. 평생에 걸쳐 모든 사람과 맺을 관계에 영향을 미칠 정도다. 하지만 부모와 경험한 애착 패턴이 아이의 인생을 결정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종종 어렸을 때 부모로부터 충분한 사랑을 받지 못한 나를 '피해자'로 두고, 세상에게 등을 진채로 익숙하게 외로운 길을 걷는 선택을 한다. 하지만 갈림길에서 언제나 어디로 갈지 선택하는 것은 결국 나다. 나는 때로 그게 고통스러울지라도 내게 익숙한 방식으로 사람들과 관계를 맺었다. 과거에 성공적이었던 경험의 패턴을 고수했다. 하지만 그게 낡은 방식이 되었다면, 새로운 길을 선택할 권한 또한 나에게 있었다. 내게 새로운 길은 심리 상담을 공부하는 길이었다.
나는 매주 집단 상담 형태를 가진 심리상담 독서모임에 나갔다. 모임을 주최하는 상담 선생님의 상담은 칼로저스의 인간중심상담과 유진 젠들린의 포커싱에 기반을 두고 있었고, 그래서 나도 내 마음을 공부하고 나를 더 사랑하는 법을 터득하는데 두 학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내가 모임에 나가면서 터득한 것은, 우리는 생각보다 간단한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는 것이었다. 바로 내 몸에서 일어나는 감각과 감정에 호기심을 갖는 것이다.
어린아이였던 우리는 감정을 처리하는데 모두 서툴렀다. 선생님은 이를 할 일은 많은데, 책상이 좁은 상태라고 비유했다. 우리는 책상이 좁은 탓에, 처리하기 어려운 감정들은 서랍에 넣어버리고 자세히 들여다보지 않는다. 그리고, 한번 어렵다고 생각한 감정은 성인이 되어도 계속 처리하기 어렵다고 느낄 확률이 높다.
지난주, 나는 대출을 받기 위해 은행을 방문했다. 저금리로 받았던 전세 대출의 연장이 불가능해, 다른 대출로 대환 하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나는 예상과 다르게, 부정하고 싶을 정도의 적은 금액만을 대출받을 수 있다는 현실을 마주해야 했다. 은행 전산이 판단한 나의 부채상환 능력이 터무니없이 낮게 나온 것이다.
프리랜서인 내가 작년에 벌어들인 돈이 꽤 된다고 생각했는데, 시기가 좋지 않았다. 종합 소득세를 신고하기 전이라 내 소득이 전산에 입력되지 않은 것도 있었고, 국가적으로 경제 상황이 좋지 않아 대출 조건이 까다로워지고 있었다. 그럼에도 나는 너무 괴로웠다. 고작 이 정도 한도의 돈밖에 은행에서 빌릴 수 없다는 사실이, 전세 보증금을 마련하지 못하면 이사를 가야 한다는 사실이 미치도록 화가 났다.
나는 하루종일 눈이 뻐근하고, 이마에선 열이 났다. 나는 이 감각과 감정을 들여다봐야겠다고 판단했고, 그 결과는 놀라웠다.
내가 화가 난 대상은 '은행 전산 시스템'이었다. 그러니까 자본주의 사회에서 판단 권력을 가진 무형의 존재에게 화가 났다. 나의 부채 상환 능력을 멋대로 하향 판단한 것에 대한 화였다. '네가 뭔데 나를 판단해?'같은 마음이었다. 나는 이렇게 과소평가받을 사람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쯤 되니 내가 은행 시스템을 상대로 과하게 화내고 있다는 걸 알아차릴 수 있었고, 이런 감정엔 깊숙이 숨겨져 있는 마음이 있을 것 같아 더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그 끝에는 아이 같은 마음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스스로를 언젠가는 세상이 가치를 알아봐 줄 '원석'이라고 생각했던 면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나는 '세상이 나 같은 보석을 알아보지 못한다'는 어린아이의 망상 같은 마음을 가지고 있었다. 나를 세상의 피해자로 설정했기에, 대출 한도에도 억울함을 느꼈던 것이다.
나에게 이런 마음이 있었다는 것을 알게 되자, 그런 내가 안쓰러우면서도 웃겼다. 마치 어린아이가 '저는요! 나중에 커서 세상에서 제~일 훌륭한 사람이 될 거예요!'라고 말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기분이 들었다. 여기까지 공부하자, 지끈거리던 머리가 맑아지고 화가 가라앉았다.
나는 내 대출 한도를 늘리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내 마음을 알아주었다. 나는 나의 유치하고 이기적인 마음의 욕구를 수용하면서 점점 나를 알아가고 있다. 내 감정과 감각에는 이유가 있을 거라는, 숨겨진 이야기가 있을 거라는 호기심 가득한 태도가 다정하게 느껴진다. 사랑받는다는 감각을 스스로 줄 수 있다는 것을 경험하고 있다. 그러니까 나는 나에게 사랑을 주고 있다.
우리는 어렸을 때, 우리가 겪는 마음에 이름을 붙여주지 못할 때가 많았다. 괴롭고 모호한 마음을 공부해서 이름을 지어주기엔 우리의 책상이 좁았다. 그러나 어른이 된 우리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넓은 책상을 가지고 있다. 우리는 감각과 감정을 존중하는 간단한 방법으로 자신을 사랑할 수 있다. 하지만 간단하다고 해서, 쉽다는 것은 아니다. 쉽지 않다고 해서 어렵다는 것도 아니다. 방법을 터득할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나는 나를 사랑하기 위해 오늘도 마음속을 헤매고 있다. 이름 없는 마음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