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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한호미 Jul 20. 2024

한 번이라도 불안과 절망을 기쁨으로 바꿔보았다면,

길을 찾은 경험에 대해 써라




10년 전 유럽으로 여행을 떠날 때,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저 유럽을 한 달 동안 여행하겠다는 목표로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으길 1년, 출국 날짜가 다가올 때까지 기차 티켓과 숙소 예약 외에 다른 것을 계획할 에너지와 시간이 없었다. 그래도 난 믿는 구석이 있었다.


바로 내가 여행할 도시에 대한 모든 정보가 담긴 최신 가이드북 '00유럽'이었다. 물론 그 당시에도 네이버 카페를 통해 유럽여행에 대한 정보를 다양하게 얻을 수 있었지만, 나는 정보를 검색해서 읽을만한 힘도 없었다. 그저 가이드에 나온 기본적인 관광지만이라도 가보는 것이 내 여행 목표였다. 


1년간 돈을 모을 정도로 간절히 바랐던 여행인데, 무계획으로 다닌다는 건 나답진 않았다. 난 국내 여행도 촘촘히 계획을 세워서 다니는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가이드북만 믿었다. 내 여행을 책임져줄 나의 동반자. 그렇게 그 책을 품에 안은 채 떠난 유럽에서, 나는 멘탈이 붕괴되는 최악의 하루를 겪었다.




런던에서 파리로 이동하는 날 아침이었다. 나는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으로 가서 버스를 타고 게트윅 공항으로 가야 했다. 공항으로 가는 버스는 며칠 전 예매를 해두었고, 티켓만 인쇄하면 됐다. 그러나 하필 그날 아침에 숙소가 정전되는 바람에 프린터를 쓸 수 없게 되었다. 일단 나는 버스를 타는 곳으로 이동하기로 했다.


빅토리아 코치 스테이션 근처에 도착해서, 길을 물어물어 프린트가 가능한 인터넷 카페를 찾아갔다. 시간이 조금 빠듯하긴 했지만, 티켓을 인쇄하는 데 성공했다. 이제 구글맵을 따라 버스 타는 곳으로 이동하기만 하면 됐다. 그런데 아무리 주변을 걸어도, 터미널을 찾을 수가 없었다. 알고 보니 바로 코앞에 있었던 터미널을 마침내 발견해, 승강장으로 뛰어갔을 땐 이미 내가 타야 할 버스가 터미널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나는 오전 10시부터 완전히 진이 빠져버렸다. '예약한 시간에 예약한 자리에만 탑승 가능'하다는 티켓의 경고 문구를 보며, 나는 잠시 서서 멍을 때렸다. 비행기를 놓치면 어떡하지라는 생각뿐이었다. 정신을 차린 내가 직원에게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대수롭지 않은 표정으로 '그럼 다음 것을 그냥 타면 된다'고 했다. 


경고 문구에 쫄았던 나는 다행히 다음 버스의 빈자리에 앉아 공항까지 갈 수 있었다. 예정대로 파리 샤를드골 공항으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한숨 돌린 나는 가방에서 가이드북을 꺼냈다. 파리에 도착한 첫날을 어떻게 보낼지도 전혀 생각해두지 않았기에, 책을 봐야만 했다. 그러나 나는 마치 산소가 부족한 사람처럼 기절하듯 잠들어 버렸고, 내가 자는 동안 가이드북은 좌석 앞주머니에 꽂혀 있었다.


파리 샤를드골 공항에 도착해 위탁 수화물을 찾았다. 출구를 향해 걷던 나는 그제야 백팩에 마땅히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 여행의 유일한 기댈 곳이었던 가이드북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나는 급히 게이트로 돌아가 직원에게 도움을 요청했지만, 결국 책을 찾지 못했다. 나는 이제 파리 지하철에 대한 어떤 정보도 없이, 숙소를 찾아가야 했다. 당시 나는 데이터 용량이 적은 유심칩을 충전해서 사용 중이었고, 파리의 인터넷은 미치도록 느렸기 때문에 즉석에서 정보를 찾아가며 돌발 상황에 대처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자꾸 허공으로 탈출하려는 내 정신줄을 붙잡아야 했다. 그래서 행인을 붙잡고 길을 물어가며 공항에서 RER을 탔고, 숙소가 위치한 파리 북역에 도착했다. 이제 해야하는 일은 출구를 찾아 나가는 것이었다. 그런데 나는 도저히 맞는 출구를 찾을 수 없었다. 파리 북역은 거대했고, 표지판의 기호는 한국과 달라 방향이 헷갈리는 데다가 지나가는 파리 시민들은 영어로 말이 통하지 않았다.


나는 할 수 없이 구글맵을 의지해 2~3개의 출구를 나왔다 들어갔다 반복했다. 결국 영어가 가능한 파리지앵을 만나 제대로 된 출구를 찾아 나왔지만, 이미 나는 영혼이 빠진 껍데기 같았다.


그래서였을까, 출구에서 겨우 5분 거리였던 숙소를 찾지 못해 그 근방을 뺑뺑 돌았다. 길을 잘못 들어 내가 들어간 동네는 마지 뉴욕의 할렘가처럼 집집마다 앞에 있는 계단에 남성들이 잔뜩 모여 있는 곳이었다. 아무리 둘러봐도 동양인은 한 명도 찾을 수 없는 그 거리에서 핫핑크색의 캐리어를 질질 끌고 다니는 나를 모든 사람이 빤히 구경했다. 


나는 대낮인데도 완전히 겁에 질려 버렸다. 10분쯤 손을 덜덜 떨며 걷다가 결국 나는 시작 지점인 출구로 돌아갔다. 숙소에 전화를 걸어 울먹이는 목소리로 도저히 숙소를 못 찾겠다고 했다. 마중을 나온 사장님은 나를 의아하게 쳐다봤고, 나는 몰려오는 안도감과 피로로 터질 것만 같은 울음을 참으며 체크인을 마쳤다.


배정받은 6인실 방에 아무도 없는 것을 확인한 후 나는 꺼이꺼이 울었다. 하루종일 일이 꼬여도 어떻게 이렇게 꼬일까. 세상이 나한테 원수를 졌나. 게다가 이렇게 길도 못 찾는 한심한 바보가 무슨 여행을 한단 말인가. 당장 가이드북도 없는데, 무슨 수로 하루 만에 이 똥폰으로 정보를 찾아서 계획을 세운단 말인가. 다 때려치우고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심정이었다. 나는 밖으로 나갈 힘이 없어, 늦은 오후부터 베개에 얼굴을 묻고 울면서 잠에 들었다.


 



몇 시간이 지났을까. 나는 사람들이 왁자지껄 이야기하는 소리와 맛있는 음식 냄새로 인해 잠에서 깼다. 같은 방에 묵는 사람들과 사장님이 직접 요리한 음식을 함께 먹었다. 신기하게도 처음 만난 사람들과 이야기하며 하루종일 우울했던 마음이 따뜻해졌다. 


런던에서도 다른 한국인들과 한 방을 썼지만, 1분 이상 대화한 적이 없었는데 이곳은 달랐다. 이런저런 이야기를 저녁 내내 나누며 친해진 사람들과 나는 다음날 함께 여행하기로 했다. 서로의 정보를 주고받으며, 계획을 함께 세웠다. 그날 밤 나는 웃으며 잠에 들었다.


나는 그날 이후로, 거의 매일 처음 만난 사람들과 여행을 함께 했다. 숙소의 같은 방을 쓰는 사이도 있었고, 길에서 우연히 만난 사람들도 있었다. 혼자가 아니어서 즐거웠고, 왠지 그들이 있어서 내 여행이 더 풍성해지는 것 같았다.


어쩌면 계획대로 되는 게 하나도 없던 그날은 내게 필연적인 하루였을지도 모른다. 완벽한 여행 계획과 계획대로 흘러가는 여행은 없다는 것, 사람들에게 도움을 받고 도움을 주다 예기치 못한 시간을 보내는 것이 바로 여행이라는 것. 나는 이걸 깨닫기 위해 파리에 갔다.


내가 그동안 여행 계획을 세우고, 이번 여행엔 계획이 없어도 가이드북이 있으니 무적이라 생각했던 건, 내게 일어날 수 있는 모든 일이 불안했기 때문이었다. 기대하고 갔다가 실망하는 일, 알고 보니 더 좋은 곳이 있었는데 못가 본 일, 터무니없는 가격으로 바가지를 맞는 일이 일어날까 봐 불안했다. 그렇기에 가이드북을 잃어버렸을때 나는 무너지고 말았던 것이다. 되는 게 없는 운수 나쁜 날이었지만, 나는 그날 좋은 사람들을 만나 결국엔 기뻤다. 불안과 절망을 기쁨으로 바꿔 본 경험은 내게 중요한 것이었다. 내 여행에도 내 삶에도.


나는 유럽 여행을 떠나기 전 일기장에 시를 한 편 써두었다. 마치 내게 일어날 일을 미리 알았다는 듯이 말이다.



여행은

힘과 사랑을 그대에게 돌려준다

어디든 갈 곳이 없다면

마음의 길을 따라 걸어가 보자

그 길은 빛이 쏟아지는 통로처럼

걸음마다 변화하는 세계

그곳을 여행할 때, 그대는 변화하리라

-잘랄루딘 루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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