할 수 없었던 일에 대해 써라
첫 트로피를 손에 쥐었던 순간의 감정은 20년이 넘게 흐른 지금도 생생하다. 황금색 트로피의 받침대엔 'ㅇㅇ군 ㅇㅇ회 소설 부문 최우수상 한호미'라고 써져 있었다. 엄마는 그 트로피를 높아서 눈에 잘 띄는 곳에 오랜 기간 두었다. 나는 그 트로피를 볼 때마다 자기 암시를 했던 것 같다. 난 작가가 될 거라고.
아이들에게 부모님은 자신의 우주다. 우주에게 칭찬을 받았다면, 우주를 기쁘게 했다면 그게 무엇이든 반복하고 싶어 진다. 행동과 상황이 반복되면, 그게 마치 나인 것처럼 유지할 수 있게 된다. 내 경우엔 부모를 기쁘게 하는 방법이 전형적이었다. 집에선 첫째로서 동생들을 잘 돌보는 역할에 몰두했다. 학교에선 선생님들에게 인정받기 위해 모범생 역할에 몰두했다. 그런 내가 처음으로 가정과 학교를 벗어나, 넓은 세상에서 인정받은 것이 하필 '글쓰기'였던 것이다.
백일장 단편 소설 부문의 주제는 '30년 후 나의 모습'이었다. 초등학교 3학년이었던 나는 크게 고민하지 않고 내 미래를 그려나갔다. 어린 나의 상상 속에서 마흔이 된 나는, 거실에 난 통창으로 북유럽의 숲이 펼쳐지는 주택에 살고 있다. 나는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따뜻하게 내린 모닝커피를 마시며 풍경을 감상한다. 나는 원고지 위에 혼자 조용히 맞이하는 차갑고도 고요한 아침의 행복을 써 내려갔다. 먼 미래의 나는 성공한 작가였기 때문에 그런 여유를 부릴 자격이 있었다.
내 미래를 그린 글로 트로피를 받아버렸으니, 나는 내가 '작가'가 되지 않으면 안 될 운명 같은 것을 믿었다. 내가 어렸을 땐, 학기마다 선생님이 나눠 준 유인물에 장래희망을 적어서 냈다. 장래희망 란은 부모와 아이의 희망 사항으로 구분되어 있었는데, 나는 늘 '작가'를 써냈다. (부모님은 언제나 '교사'를 썼다)
아주 어릴 땐 동화 작가가 되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이가 할 수 있는 자연스러운 생각이었다. 중학생이 되자 소설 작가가 되고 싶어졌다. 초단편소설을 써서 친구들에게 보여줬고, 인터넷 소설 카페에 가입해 소설을 연재하기도 했다. 고등학생이 되자 현실 감각이 생겼고, 조금이라도 돈을 벌 확률이 높은 작가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드라마 작가가 되고 싶었다.
작법서를 사서 혼자 공부하고, 시나리오를 써서 공모전에 부치기도 했다. 중학교 때 인터넷에 연재한 소설도, 공모전에 보낸 소설도 다른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지 못했다. 그럼에도 나는 내가 작가로서의 재능이 있다는 믿음을 포기하지 않았다. 학교 대표로 참여하는 백일장에선 모두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대학교 원서를 넣을 때가 되었을 때, 나는 '문예창작과'를 가려면 어떤 대학교에 가야 하는지 검색했다. 하지만 어른들은 문창과를 나오면 돈은 못 번다고 말했다. 대학교까지 졸업했는데, 돈을 못 버는 건 내가 부모의 짐이 된다는 말이었다. 어린 나는 그들의 짐을 덜어주는 아이가 되고 싶었지, 걱정거리가 되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나는 결국 다른 과를 지원했다. 적어도, 글을 쓰는 직업과는 아주 멀지 않은 선택이라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하지만 대학생이 된 나는 내게 작가가 될 '재능' 따윈 없다는 것을 알아버렸다. 학교엔 나만큼이나 아니 나보다 훨씬 글도 잘 쓰고 말도 잘하고 똑똑한 사람들이 많았다. 작가는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글을 잘 쓰는 사람'이어야 하는데, 그래야 책이든 드라마든 베스트셀러가 되어서 성공할 수 있는데, 우물 밖으로 나오니 나는 글을 잘 쓰는 축에도 못 끼는 사람이었다.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해도, 나는 작가로 성공할 수 없을 것 같았다.
나는 부족했다. 그래서 글을 쓰지 않기로 했다. 남들보다 못할 바에는 하지 않는 게 나았다. 어쩔 수 없이 떠오르는 시상과 글감으로 떠밀리듯 쓴 습작들이 있었지만 만족스럽지 않았다. 글을 너무 쓰고 싶은데 동시에 전혀 쓸 수 없었다. 어차피 무시당할 글을 쓴다는 게 괴로웠다. 나는 내가 잘하는 것을 찾아야 했다. 아니, 글 쓰는 것보다 내가 잘하는 게 있다고 믿어야 했다.
(다음 편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