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냈던 일에 대해 써라
작가라는 꿈을 포기한 나는, 전공과 그동안 쌓아둔 스펙을 살려 광고/마케팅 업계에 취직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그렇게 학교를 다니며 취업 준비를 하다 갑자기 '졸업 전에 유럽 여행을 꼭 가야겠다'고 다짐해 버렸고, 1년간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정말로 여행을 떠났다. 그리고 한 달간의 유럽여행을 떠난 24살의 가을은 내 인생의 전환점이 되었다.
캠퍼스를 떠나 유럽의 곳곳을 다니며, 학교 선후배가 아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던 경험은 내게 어떤 깨달음을 주는 동시에 삶에 대한 위로이기도 했다. 여행이 나에게 '꼭 다른 사람들처럼 멀쩡하게 살지 않아도 돼'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내가 한국으로 돌아와 처음으로 한 일이 지금까지 써온 시를 모아 시집을 인쇄하는 것, 그리고 여행을 다니며 찍은 사진으로 엽서를 만들어 판매하는 것이었다.
어렸을 때부터 어도비 프로그램을 다루는데 익숙했던 나는 시집을 직접 편집하고 디자인했다. 정식 출판이 아닌 소규모로 인쇄한 책이었고, 대부분 내 지인들에게 선물했다. 일부는 플리마켓과 독립 서점에 위탁 판매했다. 나는 내 시집을 삼류 로맨스 장르라고 불렀다. 내가 느끼기에도 유치하고 부족한 시들이었고, 남들이 비판하기 전에 내가 먼저 내 것을 깎아내리는 게 나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내가 시집을 만들었다는 기억이 희미해질 때마다 지인들은 내게 연락을 해왔다. 오랜만에 내 시집을 읽었는데, 다시 보니 어떤 시가 참 좋더라는 식이었다. 그럴 때마다 나는 어디론가 숨고 싶으면서도, 고개를 빼꼼히 내밀고 다시 그 말을 듣고 싶을 만큼 좋았다. 특히 나의 시어머니는 나의 팬을 자처하며, 내가 글 쓰는 걸 포기하지 않도록 끝까지 응원해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나는 스스로를 '글쓰기에 재능 없는 사람'으로 생각했고, 재능 있는 작가들의 소설을 읽으며 감탄하고 기죽을 뿐이었다. 세상에 이렇게 글을 잘 쓰는 작가들이 많은데, 내 못난 글을 보탤 이유가 없었다. 내 글이 세상으로 나온다면, 난 분명 사람들이 좋아해 주길 기대할 것이고, 그러다 결국 사람들에게 외면받을 때 그 기분을 감당하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다. 그러다 셰릴 스트레이드의 '와일드'를 만났다.
작가 셰릴은 바닥 인생, 아니 바닥에 굴러다니는 쓰레기가 된 것 같은 인생을 살다 수천 킬로미터의 퍼시픽 트레일을 혼자 횡단하며 겪은 일들을 책으로 써냈다. 그리고 이 책은 21개국에 출간되어 밀리언셀러가 되었다. 나는 와일드를 읽으며 완전히 셰릴의 인생에 빠져들었고, 떨리는 마음으로 발을 동동거리며 한 장 한 장을 넘겼다. 책을 다 읽고 나선 미친 듯이 뛰고 싶었다. 마치 내 안에 고여있던 열망이 몸 밖으로 나가려고 아우성을 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날 이후로, 글을 쓰고 싶어졌다. 잘 쓰고 싶은 게 아니라 그냥 내 이야기를 쓰고 싶어졌다. 셰릴 스트레이드라는 사람의 이야기가 내 안으로 흘러들어 왔을 때, 나는 글 쓸 용기를 얻었다. 셰릴처럼 나도 이야기가 있고, 그 이야기는 내 것이기 때문에 나만 쓸 수 있는 것이었다. 내가 남들보다 특별하거나 우여곡절이 많았기 때문이 아니라, 세상에 나라는 존재는 고유하기 때문이다.
나는 작가가 되기 전에 사람이 되어야 했다. 작가가 되지 않아도 상관없는 사람이 되어야 했다. 내 고통과 슬픔이 애틋하고, 무지와 무능력이 자기혐오의 이유가 되지 않는, 그런 사람이 되어야 했다. 그러니 내 글에 대한 사람들의 평가가 나에 대한 평가가 아니라는 것도 가능해지고, 초고부터 잘 쓰려다 결국엔 몇 줄도 못쓰는 일 없이, 내 이야기를 끝까지 손으로 써 내려갈 수 있게 되었다.
나는 셰릴 스트레이드가 제안한 15개의 주제로 15편의 글을 썼다. 나는 해냈다. 그가 말한 대로 기꺼이 내 마음을 무너뜨릴 작정으로, 어딘가 잘못된 사람처럼 정신 놓고 글을 썼다. 무너질 것 같았던 마음이 따뜻하게 채워졌다.
그럼에도 나는 여전히, 내 글이 많은 사람들에게 읽히길 바라고 사람들의 긍정적인 반응을 기대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나는 글을 쓸 것이다. 내가 글을 쓰는 이유는 내 성취욕과 인정욕을 채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셰릴의 이야기가 내게 왔던 것처럼 내 이야기가 다른 사람의 마음에 흘러들어 가서 용기를 주었으면 하기 때문이다. 살면서 단 한 사람만에게라도 그런 용기를 줄 수 있다면, 나는 기쁠 것 같다.
(연재 끝,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