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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omestories Dec 19. 2020

베를린에서 산다면

    

베를린에서 산다면 


빈티지 가게를 오픈하면서 우리는 반기에 한 번 정도는 해외 출장을 가기로 계획했다. 좋은 아이템을 구하기 위한 우리만의 ‘트레져헌팅’이 필요하기도 했고, 빈티지 문화가 잘 녹아 있는 곳에 가서 직접 보고 느낀 것을 바탕으로 세 명이 같은 방향성을 가지는 것에 모두 동의했기 때문이다. 첫 번째 출장 장소가 나 혼자 다녀온 퇴사여행을 겸한 캐나다였다면, 두 번째 목적지는 셋이 함께 떠나는 유럽으로 정했다. 넓디넓은 유럽의 많고 많은 도시 중 어디를 갈 것이지 정하기부터 쉽지 않았다. 기준은 ‘빈티지 문화가 살아있고, 느낄 수 있는 도시일 것’, ‘여행자로서 매력적인 도시일 것’.


가난하지만 섹시한 도시. 

통일 이후 동독 지역 발전을 위해 문화 육성 정책을 펼치고, 물가가 저렴해 세계 각지의 예술가들이 몰려들어 지금의 예술지구가 되었다는 배경과 그 별칭이 우리를 사로잡았다. 패션을 사랑하는 도시라는 설명과 함께 다양한 컨셉과 규모의 빈티지 가게가 있어 출장의 목적에도 부합하고, 대규모 플리마켓이 열리는 마무어파크도 있다. 성악 공부를 하는 동료의 동생이 독일의 가까운 도시에 살고 있고, 절친한 고등학교 동창도 베를린에 살고 있었다. 지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든든한 데다, 캐나다에 사는 동생도 마침 휴가라 합류하기로 해서 시끌벅적한 여행이 될 것 같았다. 게다가 왠지 모르게 떠올리기만 해도 낭만적인 파리와 멀지 않아 두 도시를 가볼 수 있다는 지리적 장점도 있었다. 그렇게 우리는 베를린과 파리를 거치는 9일간의 출장을 가기로 했다. 


여행과 출장을 준비하는 것은 다른 일이다. 여행은 여행자의 시선으로 본인이 원하는 컨셉에 맞춰서, 혹은 가고자 하는 곳의 관광 명소에 따라 동선과 일정이 정해진다. 준비물 또한 편의를 위한 것에 맞춰진다. 출장은 철저하게 목적에 따라 움직인다. 사는 것이 목적인 만큼 베를린과 파리의 관광지는 배제되고, 지도에 표시한 빈티지 가게의 푸른 라벨을 따라 최대한 낭비 시간 없이 움직일 수 있는 동선과 일정을 정한다. 준비리스트 또한 튼튼하면서 부피가 큰 캐리어, 가지고 다니다 필요할 때 꺼내서 쓸 수 있는 폴더블한 장바구니, 바잉한 물건들을 정리하고 패킹할 수 있는 넉넉한 공간을 가진 숙소예약 등이 우선순위에 오는 것이다. 그래도 한 가지 포기할 수 없는 것은 입장이 어렵기로 악명 높은 세계에서 가장 유명하고 핫한 클럽인 베르크하인(Berghain)을 방문해보는 것이었다. 입장 여부가 가드 마음대로, 기준도 없고 2~3시간 기다렸다 문 앞에서 퇴짜를 맞는 사람이 부지기수라니 어이가 없으면서도 호기심이 폭발했다. 욕쟁이 할머니 가게가 잘 되는 것 같은 심리랄까. 유튜브에 베르크하인 입장하는 방법에 대한 컨텐츠까지 찾아보며 출장 준비에 열의를 불태웠다. 


10월 말의 베를린은 조금 쌀쌀하고, 흐렸다. 흐린 날을 좋아하지 않지만, 베를린과 잘 어울렸다. 처음 만난 베를린의 인상은 깊은 네이비 컬러의 캐시미어 같았다. 도시의 공기는 차갑고, 사람들은 차분하고 단단해 보인다. 햇살이 비치는 순간 숨겨둔 광택감을 드러내는 결을 가진 캐시미어처럼 반짝이는 따뜻함이 있다. 베를리너들은 패셔너블하다. 트렌드가 아닌 자신의 것을 오롯이 가진 사람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여유로운 태도가 개성 있는 아웃핏을 만나 빛을 발한다. 그 조용하지만 웅장한 주파수에 나는 이 도시와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중간에 파리의 방브(Vanves) 벼룩시장을 다녀오기로 해서, 그 일정 전후로 크게 나눠 베를린을 살피기로 했다. 예술가와 창작자들이 모여 있는 미테(Mitte)지구와 베를린의 을지로라고 불리는 힙한 동네 노이쾰른(Bezirk Neukolln)을 숙소로 정했다. 


베를린의 저녁 한 가운데


베를린의 빈티지 가게들은 심플하면서도 간결하며 소재의 힘이 느껴지는 아이템들이 많았고, 특히 보기 드문 컬러와 잘 가공된 가죽 제품들이 많았는데 두고 온 아이들은 일 년이 훌쩍 지난 지금도 여전히 눈에 아른거린다. 체인으로 운영되는 대규모의 빈티지 가게들도 있어서 빈티지 시장 규모가 꽤 크다는 것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킬로샵(Kiloshop)의 형태도 있는데, 상품을 컬러링으로 태그해두고 해당 컬러의 Kg당 가격을 책정해서 무게 단위로 구매하는 곳이었다. Kg당 가격만 보면 저렴하게 느껴지지만 고르다 보면 오히려 비싼 경우가 발생할 수 있어 정신을 바짝 차려야 한다. 


눈에 아른한 아이들 


미리 찾은 정보를 기반으로 구글맵에 표기해둔 대로 착실하게 다운타운을 중심으로 형성된 상권의 빈티지 가게들과 꽤 떨어진 상점들도 다 다녀왔는데, 정작 우리가 보물 같은 물건을 발견한 곳은 지도에 없는 곳이었다. 우버를 타고 지나가다가 우연히 도시 외곽으로 빠지는 도로 갓길에 있는 커다란 빈티지 가게를 보았다. 재빨리 구글맵을 켜서 위치기반으로 현재 위치에서 짐작해 방금 본 가게를 찾았다. 리스트업 할 때 컨셉이 맞지 않거나 평점이 좋지 않은 곳은 제외했는데, 평점이 좋지 않아 준비과정에서 제외한 듯했다. 하지만 스치듯 지나며 가게 밖을 본 느낌이 좋아 감을 믿기로 하며, 다음 날 동선에 포함했다. 다음 날 찾은 그곳은 밖에서 보이는 것과 달리 안으로 들어갈수록 카테고리에 따라 분리된 공간이 계속해서 나오는 어마어마한 규모의 공간이었다. (이런 곳을 놓칠 뻔하다니! 어제 우버 타고 지나가면서 본 나 칭찬해) 입구에 들어서 계산대 가까운 쪽은 할인하는 상품들과 가을에 입기 좋은 두께 감의 옷들이 카테고리에 따라 양옆으로 진열되어 있고, 분리된 안으로 들어가면 벨트, 가방 등의 소품이 진열된 공간이 나온다. 한 번 더 꺾인 공간으로 들어서면 지금까지 본 것보다 더 넓은 공간이 나오는데 이 중 제일 안쪽이 하이라이트이다. 입구에서는 보이지도 않는 출구와 제일 먼 안쪽 공간에는 겨울 아우터가 모여 있다. 재킷, 롱코트, 가죽코트, 퍼코트 등이 한쪽 벽을 두르며 섹션을 나누어 정렬되어 있다. 택에는 탄생 시기가 기재되어 있고 1960~80년대 만들어진 옷들이 많았는데, 디자인이 근사한 것은 물론이고 컨디션도 좋았다. 1970년대에 만들어진 폭이 둥글고 넓은 카라를 가진 진한 와인색의 시슬리 울 재킷, 같은 시대의 군더더기 없이 똑 떨어지는 핏에 탄탄한 소재의 네이비 코트, 1960년대의 넓은 래빗 퍼 카라에 큼지막한 단추가 달린 부클 소재의 그린 코트, 따뜻한 밀크티가 생각나는 헤링본 체크 패턴의 롱코트, 일자로 떨어지는 견고한 실루엣에 사랑스러운 핑크 컬러의 믹스매치가 매력적인 울 재킷 등을 발견하는 순간의 기쁨은 지금도 생생한 감각으로 남아있다. 족히 몇만 벌은 될 하나뿐인 옷들 사이에서 눈에 띄는 것을 고르고, 착용감을 체크하고, 흠이 없는지 살펴보고, 그리고 다시 고민하는 시간은 넘치게 행복했다. 

주인 할아버지, 잘 지내시나요?


출장의 밤은 낮만큼 바쁘다. 


일할 때 일정에 차질이 없을 수 있게 충분한 자료를 바탕으로 계획을 세우는 것을 선호한다. 많은 준비와 노력을 들이더라도 결과가 좋지 않을 수도 있다. 계획은 불확실성으로 인해 오는 실패 확률을 줄여주는 안전장치가 된다. 가보는 도시, 셋이 처음 떠나는 출장, 만만치 않은 경비에 좋은 소재가 될 만한 아이템을 찾지 못하게 되거나, 준비가 미흡해서 혹시나 시간을 낭비하게 되지는 않을까 마음에 가득 쌓이는 불안은 몇 달에 걸친 충분한 조사와 철저한 계획으로 상쇄하는 방법밖에 없었다. 준비된 계획 사이로 잠깐 오는 여유에서 우리는 우연이 주는 선물을 발견한다. 아는 만큼 보인다는 진리는 언제나 옳다. 그래서 나는 성실의 힘을 믿는다. 


베를린에서 클러버가 될 거야! 자신만만했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갔다. 상점 오픈 시간에 맞춰 나가 온종일 돌아다니며 바잉한 물건을 이고 지고 저녁쯤 숙소에 돌아오면 녹초가 되어 있었다. 클럽은커녕 저녁 식사 후 물건을 정리하고, 리스트업 하면 어느새 자정이 가까운 시간인 매일이었다. 독일까지 가서 베를린 장벽도 가보지 못하고, 베를린의 관광지를 대라면 하나도 말할 수 없으며, 먹는 건 잘 먹어야 한다고 베를린에 살았던 친구에게 야무지게 맛집 리스트까지 얻어왔지만 동선 근처의 식당에서 겨우 끼니를 때우고, 옷가게가 열기 전 새벽의 산책이 유일한 자유시간이었던 한 주였다. 그래도 좋았다. 여행자의 관성을 지우고, 차곡차곡 채워가는 시간은 내가 빈티지를 다루는 일을 업으로 삼은 사람이 되었다는 사실을 한층 실감하게 했다. 


바빠도 저녁은 귀엽게 먹습니다. 


하루 만 보가 훌쩍 넘는 보행 거리에 다리가 퉁퉁 부어도, 옷 먼지로 기침을 콜록 대면서도, 보물 같은 가게를 발견하면 엔도르핀이 샘 솟는다. 마음속에서 북 치고, 장구 치고, 꽹과리 치고, 피리도 부는 축제가 열린다. 나 이 일 정말 좋아하나 봐. 마음속 축제의 틈바구니에서 새로운 일을 시작한 나에 대한 확신이 견고하게 들어찬다. 비록 클러버는 되지 못했지만, 베를린에서 보낸 늦가을은 직장이라는 안정적인 소속을 벗고 자영업자라는 불안정한 선택을 한 지금의 내가 딛고 있는 땅이 좀 더 단단해짐을 느낀다. 땡큐 베를린! 


땡큐! 베를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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