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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omestories Dec 17. 2020

영감이 필요해.

옷은 시대를 관통한다. 인간의 생활양식인 의식주 중 첫 번째로 오는 것이 의(衣)이니, 당연한 말이기도 하다. 가장 인상적인 시대는 1940~50년대인데, 1940년대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향으로 밀리터리 룩과 유틸리티 클로스(utility cloth)가 유행했다. 전쟁 중 군복에서 영향을 받은 각진 어깨, 테일러드 슈트, 물자부족으로 인해 짧고, 폭이 좁은 타이트스커트가 유행하며 밀리터리 룩이 생겨났으며, 영국에서는 유틸리티 클로스에 대한 규정을 발표해 의류회사의 스타일, 원단 사용, 디테일을 제한하여 물자를 절약하려 했고, 공습이 계속되어 여성들이 바지를 입기 시작했다. 종전 이후인 1950년대는 밀리터리 룩에서 벗어난 여성적이고 부드러운 패션에 대한 향수가 일어 실루엣이 유행하였다. 디오르(Dior)가 둥근 어깨, 잘록한 허리, 풍성한 스커트를 통해 뉴 룩(New Look)을 발표해서 큰 성공을 거두고, 이브 생 로랑, 발렌시아가, 지방시, 발망 등이 다양한 실루엣을 발표하며 라인(Line)의 시대가 열렸다. 전쟁의 발발과 종전이 주는 극명한 시대의 온도 차가 패션에도 그대로 반영된 것이다. 먼 과거가 아니라 근시대를 보자면, 주 5일제가 시행된 후 주말에 시간적 여유가 생긴 사람들이 캠핑, 등산을 가면서 폭발적인 아웃도어의 시대가 열린 것처럼 말이다.


회사에서 일 할 때는 특정 시대에 영감을 받아 되풀이되는 유행에 현재의 라이프스타일이 더해져 반발쯤 앞선 트렌드에 대비하여 미래에 나올 상품을 기획했고, 빈티지를 다루는 지금은 과거의 옷을 트렌드와 적당한 취향을 섞어 셀렉을 한다. 그때나 지금이나 같은 것은 패션은 늘 과거를 근간으로 두고 새로운 변화를 시도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역사, 그리고 그 시대를 사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패션에서 꽤나 중요하다. 그래서 나는 새로운 생각이 필요하거나, 시각적으로 자극되는 영감이 필요할 때 과거의 것을 찾아보곤 하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드라마’이다. 넷플릭스가 생긴 후에는 더 다양한 시대와 장르의 이야기를 참고할 수 있어 요긴하게 사용하고 있다. 시대 배경에 따라 다른 주인공의 스타일링, 컬러를 사용하는 방법, 배경으로 나오는 공간의 배치와 소품, 때로는 한 줄의 대사, 긴 호흡으로 드라마를 보다 보면 예측할 수 없는 방면에서 영감을 주는 자극제가 튀어나온다. 마음에 드는 주제와 시대, 그리고 스타일링이 합쳐진 드라마 한 편은 ‘영감종합세트’가 될 수 있기에 새로운 드라마가 나오면 첫 화면이라도 열어보곤 한다.


근래에는 더체스 다이어리, 래치드, 에밀리 인 파리, 퀸즈 갬빗 등을 통해 자극을 많이 받았고, 그 중 올해의 영감 상에 임명될 만한 드라마를 꼽는다면 바로 “걸보스(Girl Boss)” 되시겠다.


2017년도에 나온 드라마로 요약하자면, 소피아라는 주인공이 빈티지 온라인 스토어를 열면서 생기는 우정, 사랑, 성장에 대한 좌충우돌 스토리이다. 제 멋대로에 못돼 처먹었고 (진짜다. 주관 없이 주인공의 성격이 이러하다), 간단한 나쁜 짓은 서슴없이 하는 주인공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괴팍한 성격을 가진 주인공이 자신만의 사업을 일궈나가는 모습을 가공되지 않은 날 것의 느낌으로 보여주어 간단한 플롯임에도 재밌게 보았다. 그런 드라마가 있었지, 하고 잊고 있었는데 얼마 전 문득 생각이 나서 다시 보게 되었다. 드라마는 같지만 그때의 나와 지금의 나는 달라서, 빈티지 사업을 시작한 후 보면 어떤 것이 보일지 궁금했다.


주인공인 소피아는 여전히 보기 드물게 못됐고, 매력적이었다. 1화의 소피아는 대체 성격이 왜 저래? 라고 생각하면서 보게 되지만, 조금만 꾹 참고 보다 보면 회차가 넘어갈수록 고군분투하는 그녀를 응원하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첫 화부터 잦은 지각에 제멋대로 굴다가 직장에서 해고당한 소피아는 홧김에 빈티지 가게에 들러 9불에 1970년대의 빈티지 레더 재킷을 구매한다. 그리고 그것을 시험 삼아 이베이에 올리면서 이야기는 시작된다. 처음 드라마를 보고 3년 사이에 나는 주인공과 같은 직업을 가진 사람이 되었고, 재미와 스타일링 참고용 정도로 느꼈던 드라마는 공감과 밑줄 칠만한 대사를 가진 이야기가 되었다. 빈티지 사업을 본격적으로 시작하기로 하면서 온갖 장소를 돌아다니며 옷을 사고, 몸집보다 훨씬 큰 보따리를 둘러매고 돌아다니는 소피아, 주문받은 드레스의 수선을 위해 밤새 바느질을 하는 소피아, 재고를 리스트업 하고, 모델 촬영을 하고, 리뷰를 읽으며 웃고 우는 소피아, 업로드를 위해 다룰 줄 모르는 툴을 공부하는 소피아, 장면 장면에 나와 같이 일하는 동료의 모습이 투영돼 깊이 빠져서 보았다. 그리고 그중 몇 장면은 내가 빈티지 가게를 운영하면서 생각한 가치관과 같은 이야기를 하고 있어 더욱 공감하며 보았다.

 

#톱8

소피아가 절친한 친구인 애니와의 여러 가지 추억을 회상하는 에피소드에서, 첫 만남에서 우연히 소피아의 집에 가게 된 애니는 침대 발치에 있는 소피아의 웨스턴 부츠를 집어 들고 이렇게 말한다. 나도 이런 부츠 신으면 좋겠다.” “신어(You can), 유행이라고  따라  필요는 없잖아.”

마음속 누구나 소녀가 있다, 공주도 있고, 악녀도 있다. 누구나 마음속에 가지는 어떤 것이 있지만, 하면 좋겠다는 생각으로 끝나는 경우가 많다. 때로는 ‘~하면 좋겠다’조차 자각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다. 여기서 소피아는 ‘You can’이라고 말한다. 내가 빈티지를 판매하면서 항상 마음속으로 하는 말이기도 하다. 유행이라고 다 따라 할 필요는 없고, 원하는 것이 있다면 하면 된다는 마음 말이다. 뜻대로 하세요 라는 의미의 빈티지 가게를 운영하는 사람으로서 매장에 이 장면만 잘라내기를 해서 반복재생하고 싶을 정도랄까.


#롱 힙 팬츠

이베이에서 점차 명성을 쌓은 소피아는 어느 날 초인종을 누르는 불청객을 맞는다. 이베이에서 빈티지를 판매하는 경쟁자가 자신의 1930년대 트위드 팬츠를 잘라서 150$에 판매한 소피아에게 항의하기 위해 9시간 동안 기차를 타고 그녀의 집에 방문한 것이다. 과거란 상자에 담아 그대로 잘 보존해서 후대에 물려줘야 한다는 가치관을 가진 경쟁자와 빈티지를 자신의 고객들에게 맞게 변형해서 현재에 맞게 만드는 것이 맞는다고 생각하는 소피아는 강하게 대립한다. 그리고 소피아는 여기서 이런 말을 한다. 기억을 보존한다고요? 그것도 좋아요.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돕죠.” 나의 일이란 어떤 것일까. 과거의 한 조각을 집어내 새로운 기억을 만드는 것을 돕는 일, 과거에 만들어진 물건을 지금의 트렌드에 맞는 것을 찾아 현재로 이어주는 가교역할을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1분 남짓한 장면이었지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다른 각도로 정의해볼 수 있는 에피소드였다.  


2008년을 배경으로 한 드라마라 소피아의 적당히 빈티지한 스타일링을 보는 재미도 톡톡하고, 점점 성장해가는 그녀의 사업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무엇보다 나이에 따라 읽을 때마다 다른 감동과 해석이 있는 어린 왕자처럼 드라마를 통해 달라진 나를 경험하는 것은 색다른 묘미다. 누구나 영감을 받는 매개체는 다를 수 있지만, 외부적 요소를 통해 나를 다른 시각으로 비춰보는 시간은 언제나 생경하면서도 반가운 순간이다. 그 반가운 시간을 위해 나는 오늘 밤도 넷플릭스 창을 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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