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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omestories Dec 16. 2020

다 똑같은 건 재미없어.

빈티지를 구매한다는 것에 대해 가장 많이 알려진 가치는 아마도 가성비일 것이다. 동일한 소재와 퀄리티로 만들어진 기성품으로 구매할 경우의 가격 대비 약간의 사용감을 감수하고서 라도 훨씬 밑도는 가격으로 구매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한번 입고 던져둘 그런 옷을 더 특이하고 저렴하게 사는 재미에 빠져서 빈티지의 묘미는 가성비에 있다고 굳게 믿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런 시절을 지나 내가 빈티지의 진정한 매력을 알게 된 것은 상품기획 일을 시작하고 나서다.


패션 상품 기획자로서 필요한 여러 가지 역량이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것 중 하나는 브랜드 컨셉에 따른 가격대에 맞춰 원가를 역기획하는 프라이싱 능력이다. 즉, 그 브랜드에서 그 퀄리티의 스타일에 대해 고객이 가격을 지불할 수 있게 만들어 내는 것이다. 고객이 불만족해서 팔리지 않는 재고가 되게 원가가 낮아서도 안 되고, 원가가 너무 높아서 수익에 악영향을 미쳐서도 안 된다. 한 시즌을 통틀어 잘 팔리는 상품과 안 팔리는 상품의 평균치가 브랜드를 지속할 수 있는 수준으로 유지해야 한다. 그래서 원가를 설계하는 일은 매우 중요하고, 대부분은 원가의 80%는 원단이 차지하기에 가격 대비 좋은 소재를 고르는 것이 중요하다. (물론 하이엔드 브랜드의 경우는 이야기가 조금 다를 수 있지만, 내가 속해 있던 브랜드들은 보통 중저가의 내셔널 브랜드였다. )


그래서 기획자들은 시즌 준비 기간이 되면 원단 스터디에 정신이 없고, 기획해 놓은 스타일과 가격대가 맞는 원단을 찾는 것에 항상 많은 시간을 투여한다. (그 시즌이 되면 나의 정신이란 레이스나 다이마루가 필요하면 인도에, 기능성 원단이 필요하면 베트남에, 우븐이 필요하면 중국에 가 있는 식이다) 스타일이 정해지고, 원단이 정해진다면 옷을 만드는 공정 중 꽤 큰 부분이 정해진 것이다. 이제 디테일이 남아있다. 지퍼, 지퍼탭, 단추, 라벨 등등의 디테일은 보통 원가를 절감하기 위해 브랜드 컨셉에 맞춰 대량 발주를 하고 같이 사용하는 경우가 많다.


처음 입사했을 때는 SPA가 막 생겨나기 시작했던 시기라, 내가 속한 브랜드는 시즌별로 컨셉을 잡고 컬렉션을 제작해서 옷을 선보이는 형태로 MDP가 진행되고 있었다. (MDP란 merchandise development plan의 약자로 상품기획에 대한 계획 및 일정을 뜻한다) SPA 시장이 점점 커지고, 전체 패션시장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정도의 규모로 확장되면서 내셔널 브랜드도 그 흐름에 살아남기 위해 월별로 상품을 기획하고, 심지어 2일에 한 번씩 새로운 옷이 매장에 입고되는 SPA와 유사한 MDP를 가져가게 되었다. 시장의 큰 변화에 도태되지 않기 위한 그 몸부림을 통해 어떤 브랜드들은 살아남고, 어떤 브랜드는 사라졌다.

그 소용돌이 안에 있던 사람으로서 당연한 행보라 생각되지만, 옷을 좋아하는 개인으로서는 스피드와 다양성을 택하며 어쩔 수 없이 놓치는 부분들에 대해 아쉬움이 있었다. 한정적인 시간은 같은데, 스타일 수는 늘어났기에 비슷한 소재나 디테일이 비슷한 옷들이 점점 많아졌고, 대량발주해서 사용하는 부자재들은 늘어난 스타일만큼 더 자주 보였다. 이것은 비단 내가 속해 있던 회사뿐 아니라 전반적인 패션업계에 일이다. (백화점에 가서 브랜드 로고를 가리고 여성복 층을 한 바퀴 돌아보면 차이를 구별할 수 없는 브랜드가 꽤 있을 거다.)


나는 그런 개인적 아쉬움을 빈티지에서 해소했다. 여전한 가성비라는 매력을 차치하고서라도, 옷에 대해 더 알게 될수록 더 많은 매력 포인트를 발견했기 때문이다.


우선 빈티지는 그 매장에서 하나뿐이다. 사이즈도 하나뿐이라 내가 원해도 살 수 없는 일도 있다. 원해도 살 수 없는 물건이라니, 얼마나 매력적인가! 게다가 대부분 그 가격 대비 소재가 매우 좋다. 물론 이것은 소재를 잘 고를 수 있는 훈련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

옷을 만들 때 봉제를 한 번 더 하느냐, 마느냐가 공임비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가급적 효율적인 방식으로 패턴을 설계한다. 그런데 빈티지 옷은 보통 봉제선을 아끼지 않았다. 아낌없이 들어간 봉제선들은 옷에 입체감을 살려준다. 그래서 오랜 세월을 지낸 옷이라도 어떤 옷은 오히려 더 생명력이 느껴진다.


하나 더, 디테일이 살아있다. 예전에는 한 스타일을 여러 벌 만들지 않아서인지, 빈티지 중 양장점에서 맞춘 옷들이 많아서인지 포인트가 되는 디테일들이 꼭 있다. 그중 가장 내가 좋아하는 부분은 단추인데, 빈티지 옷들은 대부분 독특한 단추가 달려있다. 사이즈가 큼지막한 세공된 금장단추, 정성스레 제원단으로 만든 싸개단추, 세공된 금속으로 바젤처리하고 스톤을 올려준 단추, 따뜻한 기운이 가득한 우드 단추, 동물 모양이 조각된 플라스틱 단추, 햇살이 비치면 다양한 컬러로 투영되는 플라워 모양의 단추 등등. 마치 그 옷 한 벌만을 위해 만들어진 듯한 소재, 패턴, 봉제와 꼭 맞는 단추가 달린 경우가 많다.

전체적인 옷의 모양새만큼이나 옷에서 한눈에 잘 보이는 것이 단추라는 디테일이기에, 그리고 옷을 입고 벗을 수 있는 문이 되는 요소이기 때문에, 이렇게 다양한 단추를 만나볼 수 있는 것은 빈티지의 아주 큰 매력이다.


파레토의 법칙을 성실하게 따르는 매출 상위 몇 스타일이 전 매출을 끌고 가는 상품 기획의 속성 때문에 한 스타일에 몇만 장 씩 팔리는, 소위 대박 상품을 만드는 것에 주력하면서 거기서 오는 개인적인 피로감, 내지는 아쉬움을 빈티지를 통해 해소하면서 나의 옷 입기는 조금 더 즐거워졌다. 코디의 단짠단짠, 코디의 소떡소떡화랄까.


간혹 나뭇잎이 색을 입기 시작하는 가을의 어느 날, 지하철 한 칸에 모든 여자가 베이지색 트렌치코트를 입었다거나 (물론 나 포함), 코끝이 시린 한겨울, 버스정류장의 모든 사람이 검은색 패딩을 입고 있는 경험을 한 적이 있다. 모두가 비슷한 착장을 하고 있을 때 나만 다르지 않다는 묘한 안도감이 있기도 하지만, 매일이 그렇다면 얼마나 재미가 없을까 싶다. 가끔은 가을의 베이지코트 사이에서 핫핑크 재킷 차림이 되기도 하고, 블랙 패딩 사이에서 파스텔 체크 코트가 되기도 하는 거다. 비슷한 일상 속에 옷을 통해 나만의 작은 이벤트를 만들어주면, 아침에 문을 열고 나서는 발걸음이 조금 더 즐겁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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