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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ecky Apr 04. 2020

#04-2 20년 지기의 웃픈 뒷담화

소시지를 먹자

M과 나는 영화관을 빠져나와 10분을 걸었다. 안주거리를 입 밖으로 꺼내지 않고 가서 어떤 소시지를 먹을까, 고민했다. 우리가 자주 가는 소시지 하우스는 원효로 3가 사거리에 있다. 옛 호프집 분위기가 물씬 풍기는 곳이다. 가파른 계단을 오르면 시장에서 파는 알록달록한 뻥튀기를 담은 봉지가 몇 개 문 앞에 세워져 있고, 작은 창문틀에 재떨이가 놓여있는 정말 오래된 동네 호프집. 그런데 호프집이라고 치부하면 안 된다. 여긴 진짜 숨은 맛집이다. 전자상가로 유명한 원효로 동네에 밀집한 전자기기 회사의 직원들이 밤마다 이곳을 들린다. 출출한 배를 체우는 소시지와 시원한 맥주 한 잔, 거기다 기본 안주로 나오는 뻥튀기 한 접시와 뚝배기 어묵탕이 가벼운 주머니 든든하게 받쳐준다.



“맥주 한 병이랑 소주 한 병, 찬 소시지 모둠 하나 주세요.”



주인아주머니와 아저씨 두 분 이서만 운영하기 때문에 주문은 신속하게, 음식은 느긋하게 기다렸다. 우리보다 먼저 와있던 한 무리는 언뜻 보기에도 회식 같았다. 50대 중반에 넥타이를 정갈하게 맨 남성분이 분위기를 주도했고, 여섯 명정도 되어 보이는 삼사십 대 남성들이 술을 주거니 받거니 즐겁게 떠들었다. 가만히 뻥튀기를 집어먹던 M이 사장님과 눈을 맞추기 위해 미어캣처럼 최선을 다해 음식을 준비하는 사장님에게 시선을 떼지 않았다. 그 노력에 응답이라도 하듯 사장님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지, 아무 말도 안 했는데 왜 서로 알아듣는 거지. 뭐야, 사장님 혹시 독심술...?)



M은 내게 자리를 옮기자며 가장 안쪽 창가 자리를 가리켰다. 바람이 잘 드는 자리라 여름이 아니면 잘 앉지 않는데, 회식 무리에서 가장 먼 자리였기에 M은 그 자리를 골랐다. M의 기분을 모두 맞춰주는 자리이기도 하고 나 역시 시끄러운 술집은 딱 질색인지라 토 달지 않고 옮겼다. 물컵, 수저, 가방, 겉옷을 바리바리 들고 몇 번을 왔다 갔다 했더니 회식 무리가 우리에게 시끄러워서 옮기는 거냐고 미안하다 사과했다. M은 손사래 치며 괜찮다며 맛있게 드시라는 말까지 덧붙였다. 속으로는 불편했지만 내색하진 않았다. 해피엔딩이면 됐다. M은 다시 뻥튀기를 하나씩 와작 씹어먹었고 나는 어묵탕 국물을 한 숟갈 마셨다.



사장님이 소시지와 샐러드가 가득 담긴 그릇을 우리 테이블에 내려놨다. 이곳의 소시지는 일반 맥주집에서 파는 소시지와는 다르다. 둥글고 기다란 일반적인 소시지를 떠올리면 안 된다. 이곳의 대표 메뉴는 찬 소시지 모둠과 따뜻한 소시지 모둠 2가지다. 특히 찬 소시지 모둠은 불에 익히지 않아 연분홍빛이 도는 찬 소시지 한 장을 반으로 접어 둥그런 가장자리에 맞춰 둥글게 올리고 중앙에 샐러드와 소스, 썬 파프리카와 토마토를 올린 한 접시가 나온다. 만두피처럼 얇게 썰어 익히지 않은 소시지에 땅콩 소스와 시리얼에 버무린 채친 양배추를 싸서 먹으면 짭짤하지만 달고 고소한 맛은 물론이고, 아삭한 양배추 식감이 일품이다. 함께 나오는 토마토나 파프리카를 취향껏 싸 먹으면 또 다른 맛을 느낄 수 있다. 흔히 소시지는 맥주 안주라고 알고 있는데, 성급한 일반화는 금물. 이곳의 찬 소시지 모둠은 소주 안주로 딱이다. 소스 맛과 소시지의 짠맛의 조화롭지만 맛이 강해 쓴 소주를 곁들이면 산해진미가 부럽지 않다.


신경질적으로 소시지를 포크로 찍는 M에게 잔소리가 하고 싶었다.



“그거 쌈 싸 먹는 거야.” 


“그런 게 어딨어. 먹고 싶은 대로 먹으면 되지.”



그렇지. 먹고 싶은 대로 먹어서 맛있으면 됐지. 암, 그렇고 말고.



“그래서 또 무슨 일 없었어?”


“없었어. 있었다 치더라도 욕해서 무엇하랴~ 그냥 내가 엮이지 않도록 조심해야지.”



M은 정해진 규칙을 따르면서도 따르길 싫어한다.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언제나 그렇다. 언제나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만인을 받아들이는 것 같다가도 한 번 토라지면 얕은 사이일수록 싸늘하게 돌아선다. 적어도 내겐 안 그래서 다행이다. (그런 면에서 엄마나 P보다 M이 더 무섭다.) 모두에게 사랑받으면서 모두를 사랑하지 않는 속을 알 수 없는 반전의 매력을 가진 친구다. 고집이 세고, 모 아니면 도인 나로서는 무척 부럽다.


가볍게 맥주부터 시작했다. 나는 병뚜껑을 땄고, M은 잔을 들었다. 잔을 뻣뻣하게 들고 있는 M의 손을 살짝 기울이고 비스듬히 그리고 천천히 맥주를 따랐다. 거품이 최대한 덜 나도록 가득 따라 한 번에 마실 심산이었다. 다음은 M의 차례였다. M이 맥주병을 받아 들고 내가 잔을 비스듬히 들었다. 제 성질대로 따른다. 맥주를 너무 빨리 따라 병입이 맥주를 쏟아내지 못해 뻐끔뻐끔 온갖 거품을 다 내면서 잔에 담겼다. 맥주 반, 거품 반.



“나 술 천천히 마시라고 배려해준 거지? 그렇지?”



꼬투리 하나 잡았다 싶어 놀렸다. M은 민망한 듯 웃으며 자기 잔과 바꾸자 했지만 나는 M의 손사래를 흉내 내며 됐다고 했다. M이 소주병 목을 잡는 걸 보고 바로 맥주잔을 들어 건배를 제안했다. M은 내키지 않는 듯 잔을 들어 내 잔에 자신의 잔을 부딪쳤다. 숨도 쉬지 않고 맥주를 들이켰다. 식도가 타들어가듯 따끔거렸다.



“그래서 심신은 괜찮고?”



P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했던 마음의 병을 며칠 전 M에게 털어놨다. 점심시간에 잠깐 산책을 나갔다가 이런저런 얘기 끝에 몸도 마음도 무척 지쳐서 이대로 있다가는 미칠지도 모른다고 말이다. 막내가 원고를 너무 늦게 끝냈다고 화를 내질 않나, 의견 차이로 P, K와 대화 중 P에게 심한 말을 뱉질 않나, 야근 중에 화가 나서 물건을 던지질 않나 평소 같으면 절대 하지 않을 행동들이 주변과 스스로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끼쳤다. 그래서 결국 회사를 그만두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만둘까 봐.”



M은 가뜩이나 동그란 눈을 더 동그랗게 뜨고 마시던 맥주잔을 황급히 내려놨다. 다음 말은 불 보듯 뻔했다.



“... 힘들면 그만둬야지. 사실 나도 내 포지션이 애매해서 그만둬야 하나 싶어. 나는 개발자가 되고 싶은데, 여기서 퍼블리싱을 하고 있고. 근데 퍼블리싱이라고 말하기도 뭐해. 이미 다 되어있는 사이트를 손보는 게 전부니까. 이직하면 백 프로 신입이야. 이 나이에.”



M은 나보다 빨리 사회생활을 시작했다. 개인적인 이유로 스무 살 초반에 가족들과 연을 끊고 스물둘이 되어서야 가족의 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개발자 교육을 받고 대학을 다니며 여러 회사를 다녔다. 남들보다 늦게 시작한 공부였지만 M은 수험생일 때보다 더 열심히 했다. 가끔은 실체 없는 부담에 쫓기는 것처럼 보였지만. M은 소시지 한 장에 샐러드와 토마토를 올리고 한 입 베어 물었다. 소스와 토마토즙이 후드득 떨어졌다. 내가 건넨 냅킨을 받아 든 M이 테이블을 닦으며 말을 이었다.



“언제 그만둔다고 말하게?”


“모르겠어. 우선 결론은 그래.”


“하긴. 내가 봐도 에디터들 너무 힘들어 보여. 마감 때야 그렇다 치지만, 일이란 일은 다 하잖아. 일에 구분도 없고, 체계도 없고. 신기한 게 왜 다들 토 안 달고 묵묵히 일해.”


“투덜은 대지. 그 많은 일을 우리가 안 하면 누가 해. 디자이너분들에게는 죄송하지만 디자이너 친화적인 회사잖아. 디자인 힘든 건 알아도 에디터 글 쓰는 거나 일하는 거 힘든 건 전혀 몰라. 저번 회의 같이 해서 알잖아. 대뜸 직원들 다 불러다 앉혀놓고 이 회사 다들 왜 다니는 거냐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말하라 그랬던 그날 말이야. 회사 4년 다녔더니 이제 와서 면접 보는 기분이었어.”



M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더니 내 맥주잔과 자신의 맥주잔을 치웠다. 그리고 소주잔에 각각 소주를 가득 따르고 내 앞에 내려놨다.



“됐어. 그냥 마셔.”

나지막한 욕이 들렸다. 잔을 들고 힘차게 부딪혔다. 회식 무리의 목소리에 우리의 한숨이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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