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0619
저녁 8시 15분부터 도서관에 가기 직전인 9시 10분까지, 아이는 1시간 가까이 자신의 학교생활에 대해 이야기했다.
에어컨을 켰다고, 음악을 듣고 있다고, 또 여러 이유들로 수시로 방문을 닫고 혼자 있는 시간이 비약적으로 늘어난 요즘의 모습을 고려할 때, 이런 시간은 내게 팬 서비스나 다름없는 귀한 시간이다.^^
학교 얘기를 하던 중에 초등학교 때 자신을 괴롭히던 아이의 얘기가 나왔다. 다시 만나면 한 판 뜨고 싶다고 말하면서도, 그 아이를 포함해서 아이 셋을 키우던 그 아이의 엄마는 괜찮은 분이었고, 그런 친구를 키우느라 오히려 힘들었을 거라고 말한다. 이런 반응은 충격적이기도 놀랍기도 서운하기도 하다.
‘지금 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네 엄마는 셋 못지않은 하나를 키우는 중이란다. 네 엄마의 힘듦은 알기나 하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참는다. 감정에 휩쓸려 친구의 엄마도 못된 사람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도 친구와 친구의 엄마를 분리해서 생각하고, 가족이 아니라 또 하나의 개인으로 그 엄마를 바라보면서 객관적으로 생각하고 판단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떤 면에서는 아이를 키우고 있지만, 어떤 면에서는 커가는 것을 그저 바라볼 뿐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내가 만들었지만 결코 다 알 수 없는 아들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나는 어떤 조력자가 될 것인가를 생각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