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ve the Lord your God and your neighbor
크리스천으로 살아가며 가장 많이 하는 질문 중 하나가 '하나님의 뜻'이 아닐까.
당신은 하나님의 뜻을 찾았는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주일 학교에 출석 도장만 찍은 학생이라도 이 구절 하나쯤은 외운다.
이 구절이 자주 암송되는 이유가 뭘까? 두 가지 이유가 있는 것 같다.
하나는 우리가 믿는 성경의 핵심 원리이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이 모든 것'을 받기 위한 확실한 방법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제사보다 젯밥에 관심이 간다고.
사실 이 말씀에 구미가 당기는 건 하나님의 나라와 의를 구했을 때 주실 것들이 궁금하기 때문이다.
나도 하나님이 물질이든, 지혜든 뭔가 이 세상을 살아가는 데 도움 될만한 것들을 많이 주시길 기대하며
이 말씀을 암송했었다.
그래서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한다는 게 어떤 행위일까 연구한 적이 있다.
기도를 많이 하면 될까? 성경 읽기 시간을 빼먹지 않으면 될까? 수요예배, 금요철야, 주일 오전 오후 예배를 다 드리면 되지 않을까? 지성이면 감천이라고 내가 하나님 앞에서 알짱거리며 알랑방구라도 뀌면 뭐라도 더 주시지 않을까 생각했던 날들이 있다.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내 성공과도 연결되어 있다고 믿었던 적도 있다.
엄청난 간증 집을 써서 유명해지거나, 사회적으로 성공해서 그분의 이름을 알리거나.
예를 들면 크리스천 배우들이 공식석상에서 "하나님 아버지께 이 모든 영광을 돌립니다."와 같은 것들이다.
아직 내 인생에 기회가 많다고 생각했던 20대까지는 내 사회적 성공 여부에 따라 그의 나라와 그의 의가 커지는 줄 알았다. 하지만 30대가 되고 잡지나 티비에 나올 만큼 유명세를 타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일이 내 생에는 없을지도 모른다는 자각을 하고 나니 모든 것이 의뭉스러웠다.
가난한 자는, 사회적으로 성공을 하지 못한 자는, 재능이 있지만 안타깝게도 기회를 얻지 못해 자신의 능력을 십분 발휘하지 못한 자는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이루지 못한 걸까?
최근 토마스 아캠퍼스의 <그리스도를 본받아>를 읽기 시작하며 그의 나라와 그의 뜻을 구하는 삶의 진정한 의미를 어렴풋이 확신하게 됐다.
하나님의 뜻은 복음의 단순성에 있었다.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이게 가장 첫째 되는 계명이다. 그리고 너의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 이게 두 번째 계명이다. 그리고 이게 전부다.!'
그냥 '사랑'이다. 그리고 그 사랑의 예시는 이미 그리스도께서 들어주셨다.
십자가를 통해 이미 선보이셨다. 전적으로 나의 유익을 구하지 않고 다른 이의 유익을 구하는 삶.
이 삶은 멀리서 찾지 않아도 된다.
나를 밟고 자신의 이익을 취한 동료나 친구를 용서하는 것.
자신의 상처에 집중하느라 자식이 상처받는 건 안중에도 없던 부모의 미숙함을 용서하는 것.
늙고 병들어가는 나의 부모를 위해 전화 한 통을 남기는 것.
잔액이 부족해 버스에서 내려야 하는 곤란한 상황에 처한 이를 위해 1200원을 대신 내주는 것.
배고파 보이는 친구를 위해 라면을 끓여주는 것.
병상에 누워 있는 친구를 위해 기차를 타는 것.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였지만 예배를 포기하지 않는 것.
내 삶의 어려움을 이야기하는 대신 상대의 삶의 문제들에 경청해 주는 것.
독박육아, 내 아이의 짜증에 온유함으로 반응하는 것.
직장 내에서 동네 북이 된 좀 모자라 보이는 직원의 뒷담화에 참여하지 않는 것.
복음의 파격성은 그 단순성에 있다.
어려운 말과 철학이 필요 없다.
그저 단순한 사랑의 실천에 모든 것이 들어 있다.
고단하고 지루하고 평범한 일상에서 사랑하는 방법을 익히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며.
하나님의 뜻에 담긴 단순성을 빨리 받아들이는 게 지혜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라'는 그 말씀의 단순성에 삶을 모두 내던지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유일한 뜻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