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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콩정윤 Oct 14. 2024

생쌀을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

시절 인연

예전에 시험을 치를 때 간혹 지문으로 ‘방망이 깎던 노인’이라는 수필이 나오곤 했었습니다. 요사이도 배우는지 모르겠습니다만 20년이 더 지난 지금도 수능 공부를 한답시고 읽었던 그 수필이 생각이 납니다.


특히 화자가 기다리던 기차 시간이 다가오는데 계속해서 방망이를 깎고 있는 노인을 재촉하며 그만 깎고 이만 달라고 하자 노인이 하는 말인 “끓을 만큼 끓어야 밥이 되지, 생쌀이 재촉한다고 밥이 되나.”하는 구절이 생각납니다.


이 구절은 생각할 여유가 없는 시험 중에도 묘하게 눈길을 잡아끌어 그 속에 담긴 의미를 곱씹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단어 하나하나의 의미를 되새기듯이 말이지요. 아무리 생각해도 별 말 아닌 이 말에 담긴 지혜가 놀라워 무릎을 탁 치며 고개를 위아래로 끄덕이게 됩니다.


‘다 때가 있는 법이다.’


할머니가 어느 날 마루에 걸레질을 하다 말고 지나가는 말로 했을 법한 이 말에는 오묘한 우주의 이치가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 평범한 표현에 말이죠. 우주의 모든 것은 절묘한 순간이 따로 있어서 그 순간이 되어야만 만들어지고 이루어지는 순간이 있고, 우리는 그때를 기다려야 하는 법입니다.


깨끗한 물을 기르고 쌀을 씻고 적절한 물을 담아 불에 올려놓았으면 그 후부터는 익는 순간을 기다려야 합니다. 때로 불 조절도 해가는 적절한 노력을 해가면서요. 세상 만고의 이치는 이 과정에 녹아 있는 게 아닐까요?


결과가 나올 만큼의 원인을 만드는 노력을 했으면 그 후로는 생쌀이 밥이 되는 시간을 좀 더 지켜봐야 합니다. 노인이 하는 말처럼 생쌀을 재촉한다고 바로 밥이 되지는 않는 법이니까요.


이렇게 말하면 스스로의 인생에도 조금의 위안이 됩니다. 가끔 극적으로 스타가 된 사람들을 봅니다. 동료나 후배 중에도 극적으로 인생이 바뀐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마치 어떤 물살을 타고 거침없이 앞을 향해 나아가는 것 같은 삶을요. 그런 것을 누구나가 운이라고 했습니다. 작은 우연들이 겹치고 이상적인 환경이 만들어지고 뜻밖의 기회와 함께할 사람들이 모여들면서 삶이 흐르고 상승하는 것 같이 살아가는 살아가는 사람들 말입니다.


애석하게도 저는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무엇인가에 올라탄 기분 따위는 경험해 본 적이 없습니다. ‘일이 이렇게 될 줄 몰랐습니다.’ 이런 말은 해본 기억이 없는 것 같아요. 애를 쓰고 이를 악물고 될 때까지 해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어쩌면 너무도 전전긍긍해서 어떤 흐름에 올라타도 내 서핑보드가 현재 파도를 가르고 있다는 자각을 못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럴 때에 내 마음은 울적했습니다. 나의 삶에는 무엇인가 완성되는 순간과 때가 오지 않은 기분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생각이 머릿속에 속삭일 때 방망이 깎던 노인이 하는 말을 떠올렸습니다.


‘아직 때가 되지 않은 것이다. 나에게는 나만의 때가 올 것이다.’


희망 고문 같은 이 말을 되뇌었습니다. 그러면 위로가 되었습니다. 같은 쌀이라도 만들고 싶은 요리에 따라 때는 다 다릅니다. 된 밥이 필요한 요리가 있고 진 밥이 필요한 요리가 있듯이. 때로는 누룽지가 필요한 요리도 있습니다.


그래서 '나는 어쩌면 누룽지가 되어야 하는 운명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생각하는 것이죠. 20대, 30대에 빠르게 자신이 있어야 할 자리를 찾고 안정을 찾아가는 사람들이 있고 40대가 되어도 아직도 쌀을 불리고 있는 나와 같은 인생도 있는 법이라고 말이죠. 오래 방황하고 뒤늦게 쓰임을 갖게 되는.


오늘도 나는 붐비는 1930년의 기차역에서 방망이를 깎던 노인처럼 앉아 방망이를 깎으며 그때를 기다립니다. 손에 딱 들어맞는 방망이를 만들기 위해서요. 제대로 된 물건이 되어 세상 어딘가에 좋은 쓰임이 되기 위해서 말이죠. 그 절묘한 때를 위해서 치기 어린 시절의 재촉은 내려놓고 있는 그대로의 되어가고 있는 모양새를 지켜보면서. 


입꼬리를 위로 올리고 깎아지며 모양을 갖추어 가는 방망이를 깎는 행위에 집중하고 즐기면서 앉아 있습니다. 방망이 깎던 노인도 분명 그랬을 것입니다. 그 과정이 즐거웠기에, 다 되었을 때의 느낌이 즐거웠기에 재촉하는 손님에게 안 팔 테니 다른 데서 사라는 어깃장을 놓을 배포가 있었을 테니까요.


다 때가 있는 법입니다. 그리고 그때는 꼭 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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