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개 낀 푼힐전망대
3일 차의 가장 중요한 일정은 푼힐 전망대였다. 가기 전부터도 푼힐 전망대에서 보는 풍경이 장관이라는 이야기를 숱하게 들었다. 붉게 타오르는 태양이 떠오를 때 그 빛을 받은 8천 미터가 넘는 산들이 그렇게 아름답다도 했다. 이걸 보기 위해 또 오는 사람도 있다고.
나도 이 날을 기대했다. 아무리 피곤하고 잠자리가 불편해도 그 장면만 본다면 모든 것을 보상받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래, 내가 이걸 보려고 여기까지 왔다!’ 이런 설레는 마음을 품고 잠이 청했었다.
푼힐전망대에 오르는 일정은 새벽 일찍부터 시작됐다. 새벽 5시에 따뜻한 복장을 하고 숙소 옆으로 난 길을 통해 올랐다. 끊임없는 오르막길의 연속. 땀이 비 오듯 흐르는 시간이 또 시작되었다. 손수건으로 땀을 훔치고 중간중간 멈춰 서서 따뜻한 물 한잔 마시며 산행을 지속했다. 헤드랜턴을 켜고 가는 길은 점점 더 밝아져 왔다. 발 밑이 보이기 시작했을 때에는 주위 경관도 서서히 눈앞에 나타났다.
높은 고산들이 둘러싸여 입이 떡 벌어지는 장관이 연출될지 알았지만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눈앞 1m 전방에 무엇이 있는지 조차 보이지 않았다. 저기에 분명 있는 것을 아는데.. 흠.. 아름답다는 장관은 유튜브 영상 속에서나 있었다. 상상으로 저 안에 설산이 있겠지 하며 걸었다. 분명 푼힐 전망대에서 아주 잠깐만이라도 보일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은 채. 그리고 아직 해가 안 떴으니까!
하지만 왜 슬픈 예감은 틀린 적이 없나! (주옥같은 가사다.) 푼힐 전망대에는 해가 뜨는 것도 보이지 않고 살풍경했다. 바람이 불고 안개는 코 앞까지 와 있었다. 20분 정도를 더 기다려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푼힐전망대라 써져 있는 표지판을 에워싸고 웃고 즐기며 기념사진을 찍었다.
아주 잠깐 설산의 꼭대기가 나오는지 사람들이 ‘와!!’ 하며 몰려가서 찍었는데 솔직히 구름인지 설산 꼭대기인지 구분도 안 가는 정도였다. 결국 아무것도 보지 못한 채 우리는 다시 숙소로 내려왔야 했다.
숙소에 내려오니 마차푸차레가 일부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얼마나 설레던지. 일출은 보지 못했지만 히말라야 여행을 와서 처음 보는 설산이었다. 밥을 먹다 말고 나와서 같은 산을 수십 장 찍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눅눅하기만 했던 숙소가 오늘 보니 절경 속에 놓여 있었다. 갑자기 숙소의 지위가 급상승하는 기분. 이런 곳을 떠나야 하다니! (사람의 마음이란 참 간사하다.)
커피 한 잔이라도 하면서 오래도록 설산을 구경하고 싶었지만 부지런히 걷지 않으면 오늘 저녁에 묵을 숙소에 도착하기 어려우니 우리는 떠나야 했다. 다시 한번 3,100m까지 올랐다가 내려가기를 반복하는 길이 이어졌다. 날씨는 점점 더 험해져 급기야 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안개가 낀 산에서는 길과 나무 밖에 보이지 않았고 솔직히 지리산이나 한라산이나 태백산이나 히말라야나 날이 흐리면 비슷했다. 나무와 돌과 동물과 곤충이 사는 곳. 조금 다른 점은 등산로 곳곳에 소똥과 말똥이 널려져 있다는 것 정도일까? (곰똥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똥이 많다.)
전체 약 11km를 걷고 또 걸었다. 약 8시간에 걸친 산행이 끝나고 5시쯤에 타다 파니에 도착했다. 2,680m의 높이였다. 숙소는 앞이 탁 트여 있는 것 같았는데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마치 영화 미스트의 한 장면 같았다. 창 밖으로 하얀 안개 외에 보이지 않고 사람들은 옹기종기 앉아서 몸을 녹이고 있었다.
오늘은 씻을 수 있다고 해서 1순위로 씻었다. 샤워 시설은 우리나라 시골보다 못했다. 여기저기에 벌레는 죽어 있고 옷을 제대로 걸 곳도 없었고 따뜻한 물은 나왔다 안 나왔다 했다. 차가운 물로 바뀌어도 씻는다는 기쁨이 있었다.
씻고나니 어제부터 하루 종일 걷고 걸어도 보이는 것 하나 없는 산행과 흐린 날씨, 열악한 시설에 지쳐가는 사람들이 보였다. 사실 나도 마냥 기분이 좋지만은 않았다. 산행이 이틀 째가 되자 피로가 누적이 되었고 오늘 하루 동안 걸은 거리가 길었다.
새벽 5시부터 푼힐전망대까지 3,200m를 갔다가 다시 고라파니까지 2,860m를 내려왔고 아침을 먹고 3,165m까지 올랐다가 반단티까지 (2,210m) 내려갔다. 그리고 다시 타다파니까지 2,680m를 올라왔다. 하루 종일 올라갔다 내려갔다 하는 일정이 이틀 째였고 매일같이 반나절을 걷고 또 걷는 일도 사실 처음이었다.
힘든 산행의 보상은 무엇을 보느냐에 달려 있는데 보는 것도 한국과 비슷했다. 심지어 아담하고 아기자기 한 맛은 한국의 산이 더 나았다. 일행 중에 슬슬 “요새는 단풍도 지고 이런 바위나 이런 건 설악산이 훨씬 예쁘다.”는 우스갯소리가 나왔다.
불안한 마음에 날씨를 찾아보니 A.B.C에서 하루 자고 다음날 일출을 보는 날 밤과 아침까지도 비가 계속 온다고 했다.
‘못 볼 수도 있다.’
실망감이 마음에서 불쑥 솟아났다. 360도로 펼쳐진 설산의 장관을 보려고 여기까지 왔는데 못 본다는 생각을 하니 기운이 쭉 빠졌다.
‘만약 아무것도 못 보고 가면 어쩌지? 그렇다면 나는 여기에 온 이유가 없는 것일까?’
불쑥 이런 의문이 들었다. 그렇게 심란하고 복잡했던 밤이 지나가고 있었다. <계속>
[히말라야 여행의 꿀팁]
히말라야도 기후 위기로 10월 말까지도 습한 날이 계속되는 것 같습니다.
패키지로 여행을 간다는 것은 못 봐도 고(Go!)라는 말입니다. 날이 좀 갤 때까지 기다려보자.. 이런 일은 일어나지 않아요.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날이 흐려 못 볼 수도 있다는 것도 염두에 두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