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레리에서 고라파니까지
그렇다. 아직 2일 차다. 새벽 5시부터 일어나 하루를 시작하니 하루가 길다. 국내선 비행기로 포카라로 이동하고 포카라 시내에서 울레리까지 버스와 지프차로 이동하고 나면 이제부터는 다리를 움직여야 할 때다.
지프차에서 내리니 현지 가이드 3명이 더 기다리고 있었다. 짐들은 포터들이 몸에 지고 고라파니까지 이동할 계획이라고 했다. 필요한 짐들은 미리 꺼내두고 우리는 걷기 시작했다.
울레리의 고도는 1,960m, 목적지인 고라파니의 고도는 2,860m였다. 낮은 곳이라 해도 약 2,000m 고도부터 시작한다. 처음 걸었을 때의 느낌은 당황스러웠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흐르고 호흡이 가빠졌다. 평소의 운동량을 생각한다면 당황스러울 수준이었다. 보통 이렇게 호흡이 흐트러지는 것은 한 3km 정도를 뛰었을 때였고 이 정도 땀이라면 보통 정상쯤 갔을 때나 흘렸다.
그렇다고 가파른 것도 아니었다. 깊은 호흡을 여러 차례 했다. 다행히 몇 걸음 정도를 천천히 걷다 보니 금방 다시 호흡이 정상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여전히 땀이 비 오듯 흐르는 상황. 일단 같은 운동이라도 평지보다는 힘들었고 고도가 높다 하더라도 네팔은 위도가 한국보다는 낮았다. 한낮에는 햇빛이 강해 생각보다 날씨가 더웠다. (구름이 낀 날이었는데도 더웠다!)
한 30분에서 40분 정도 걷다 보니 점심을 먹을 장소가 나왔다. 기대보다 날씨가 좋지는 않았지만 훤히 트인 풍경 좋은 곳에 위치한 식당이었다.
새삼스레 이곳은 누구나 이런 풍경을 보고 산다는 생각을 했다. 물론 이곳도 내가 모르는 사정이 있을 수도 있지만 말이다. (집마다 시세가 다를지도 모르고.) 하지만 서울살이를 오래 한 나에게는 이 정도로 전망 좋은 집이란 꿈도 못 꿀 일이다.
한때 일 때문에 70층 아파트에 사는 성공한 유명인의 집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아파트는 넓고 깨끗했고 전면이 통유리로 되어 탁 트인 전망이 일품이었다. 하지만 부럽지가 않았다. 마천루가 다 보이지만 공중에 붕 떠서 살아가는 사람들 같았다. 안정감이 없었다. 그래서 진짜 부자는 다 언덕 위에 집을 짓고 사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차에 점심이 나왔다. 점심은 한식이었다. 전체 산행에 네팔 요리사들이 동행했는데 한식을 기가 막히게 잘 만들었다. 물론 매일 같이 스마트워치가 하루 운동량 목표를 초과했다고 징징징 울릴 정도로 많은 운동량 때문에 무엇을 먹었어도 꿀맛이었을 테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매 끼니 다른 종류의 반찬과 한식 식단을 대접해 준다는 것은 이 고산에서 호사스러운 여행이 아닐 수 없었다. 음식을 사람이 이고 지고 와서 요리를 해준다는 것도 항상 감사할 일이었다.
그렇게 맛있는 점심을 먹고 우리는 다시 고라파니로 향했다. 대략 4시간에서 5시간 정도 걸린 것 같다. 울레리에 도착한 시간이 이미 늦은 점심이었던 터라 걷는 중간에 뉘엿뉘엿 해가 졌다. 점점 시야가 어두워지고 보이는 것이 없어지더니 어느 틈에는 발 밑이 안 보이는 수준에 이르러서는 헤드랜턴을 켰다.
신기하게도 현지 가이드는 랜턴도 없이 잘만 걸었다. 누군가 뒤에서 혼자 걸었으면 무서웠을 것 같다는 말을 했다. 그제야 내가 낯선 땅에 와서 밤에 산 길을 걷는데도 아무런 공포를 느끼지 않는다는 것을 알았다. 앞에서 뒤에서 보이는 사람들 때문이었다. 현지 가이드들도 든든했다. 앞서 걷는 현지 가이드가 나중이 되어서야 21살 밖에 안 되는 (내 입장에서는) 어린애였지만 그때 차분히 걷는 뒷모습은 든든하기가 회사 중역 같았다.
고라파니에 도착하니 저녁 7시쯤이었다. 살면서 처음 접하는 2,890m의 고도였다. 산행 첫날의 체력은 양호했다. (첫날이니까.) 뒤쳐져서 걷지도 않았고 힘도 남아 있었다. 처음 접하는 고도에 머리가 지끈거리며 쑤셨지만 힘든 정도는 아니었다.
가이드가 2,890m를 처음 접하는 거니 오늘은 샤워는 하지 말고 그냥 자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샤워 시설 자체도 없는 분위기였지만.
땀에 절은 몸이 끈끈했다. 머리는 물로 감지도 않았는데 머리를 감은 사람처럼 젖어 있었다. 이 정도라면 내가 10km 정도를 전력으로 뛰었을 때 나는 땀의 양이라고나 할까. 상상이나 했던가? 한 여름에 한껏 운동을 하고 속옷부터 겉옷까지 모두 젖었는데 그냥 잠옷으로만 갈아입고 자는 기분이란. 운동의 상쾌한 맛은 샤워에 있는 법인데!
땀에 절은 머리를 적당히 뒤로 넘기고 갈아입은 후드티를 뒤집어쓰고 침낭으로 들어갔다. 몸도 눅눅하고 공기도 눅눅하고 침대마저 눅눅했다. 히말라야 저녁의 찬 기운이 침대 밑에서부터 스멀스멀 올라왔다. 침낭 안에서 몸을 녹이라며 준 따뜻한 물을 담아준 물병을 생명줄인양 꼭 껴안았다.
‘아.. 나는 이곳에 왜 왔나? 아니야. 이 정도는 예상했잖아.’
아직은 실망하기에 일렀다. 나는 다음날 푼힐전망대에서 볼 360도로 펼쳐질 설산의 장관을 상상하며 스스로를 다독이고 잠이 들었다.
<계속>
[히말라야 여행의 꿀팁]
화장지는 넉넉하게 가져오세요. 화장실에 화장지가 없습니다. ^^
날진 물통 참 유용합니다. 밤에 뜨거운 물을 담아주는데 보온효과가 좋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