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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뭉치 Dec 26. 2018

행복한 날의 일기

- 수요일입니다

나는 행복한 날에는 일기에 사실만 적는다. 그날의 날씨, 입은 옷, 걸은 거리, 먹은 음식, 음식의 맛, 색깔, 모양, 누군가 한 말, 그때 그 사람의 표정, 스쳐 지나간 행인, 행인의 모자, 모자에 붙은 먼지, 그 먼지를 문득 떼어주고 싶다고 생각했던 마음, 그리고 내 구두코, 그 구두가 밟고 있는 보도블록, 블록들 사이의 골, 그것의 색깔과 모양.


오늘은 문보영 시인의 시 일기 딜리버리 「설명을 안 하면 토하지 않을 수 있어요」를 읽다 보영 시인님처럼 일기를 적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행복한 날이라는 말이겠다.



날이 차졌다. 크리스마스에는 오후 두 시 반부터 앓아누워 밖에 나가질 못했다. 그래서 어제의 날씨는 알 수 없으나 이브 때보다 확실히 차가워졌다. 점심이 되니 바람이 많이 불어 더욱 추웠다. 장갑이 없으면 나는 더욱 추워지는데 새파랗게 질린 손톱을 보면 역시 장갑은 필수다.


어제 친구들과의 크리스마스 파티에 입고 가려다 앓는 바람에 입지 못한 빨간 벨벳 원피스를 꺼내 입었다. 카라와 단추가 화이트와 골드의 조합이라 딱 그런 컬러의 귀걸이를 했다. 이제 부츠의 계절이 돌아왔다. 부츠가 아니면 다리가 추워서 좀처럼 원피스를 입을 수 없다. 베이지색 부츠를 신고 갔더니 선배가 예쁘다고 해 주셨다. 점심 미팅이 있었는데 H 출판사 대표님께서 오늘 저녁에 파티가 있냐고 물으셨다(ㅋㅋ). 어제 못 낸 크리스마스 기분을 이어 보는 것이라 말씀 드렸다. 나는 옷이 정말 좋다. 올 겨울엔 옷만 수백만 원어치를 샀다. 예전에도 좋았는데 요즘 들어 더 좋아졌다. 세상에 같은 색조 없듯 세상에 같은 옷도 없다!


요즘 영상 편집에 재미 들려서 출근길에 브이로그를 찍어보려 했는데 오늘따라 바닥과 나무들이 예뻐 보이지 않아 관뒀다. 다시 가을이 와서 찬란하게 은행잎이 나부끼는 모습을 보고 싶다. 투명한 햇살들이 금빛이 되어 떨어지는 모습도 보고 싶다. 새로 산 베이지색 부츠의 구두코가 걷는 모습과, 걸을 때마다 부츠의 굽에서 들리는 또각또각 소리를 담고 싶었는데... 나는 생활 음향을 참 좋아한다. 내 귀는 언제나 쫑긋 열려 있다!


바나나테이블에서 팟타이와 닭요리와 청경채가 들어간 당면 요리와 게살볶음밥을 먹었다. 나는 청경채가 좋다. 홍콩에서도 딤섬집에서 청경채 요리를 엄청 시켜 먹었다. 오늘도 많이 먹고 싶었지만 어제 병의 여파가 남아 있어 무리하면 안 될 것 같아 양을 조절해가며 먹었다. 다음 주엔 한 상 제대로 다 먹어 버리고 싶다(하하).


H 출판사 대표님께서 서점에 대한 얘기를 해주신 게 인상 깊다. 상해의 서점에 갔을 때 관계자가 지역의 서점은 지역성을 살려야 한다고 말씀해주셨단다. 체인점이라 하더라도 그 지역성에 맞게, 그 지역 사람들을 위해 꾸려야 한다는 거다. 어쩌면 가장 중요한 사실을 잊고 있지 않았나 싶다. 서점의 본질은 역시 책이고, 누가 무슨 책을 찾더라도 그 책을 척척 꺼내주고 상황에 맞는 책을 골라주고 독자에 맞는 책을 추천해줄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무엇보다 나의 서점을 찾는 고객에게 마음을 열고 깊은 대화를 해 보아야 할 것이다. 지역성은 거기에서 나올 것이다.


출근길에 지하철에서 『일하는 마음』을 읽고 있는 독자를 봤다. 30대 중후반의 여성분이었고 까만 롱패딩을 입고 계셨다. 완벽하게 메이크업된 얼굴로 출근 지하철에 앉아 계시니 아마도 직장인이실 거란 생각이 들었다. 나도 정말 재미있게 봤던 책이라 그 독자님께 다가가서 "그 책 정말 좋죠?"라고 책 이야기를 건네고 싶었지만, 갑분싸가 될 것 같아 참았다. 출판인으로서 정말 반갑고 고마운 분이었다.  




보영 시인님처럼 일기를 적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행복한 날이라는 말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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