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 날다

- 김혜나, 『그랑 주떼』

by 김뭉치

작가의 말을 보고 깜짝 놀랐다. 8인의 여성 모두 비슷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는 이야기. 모두가 다 예정이 겪은 것처럼 엄청날 순 없겠지만 ‘폭행’이 아닌 ‘추행’은, 여자라면 대개 어린 시절 저 끄트머리에 접어둔 침묵의 페이지가 아닐까.


나도 작가와 작가가 몸담고 있던 영화 동호회 멤버들 같은 경험이 있다. 어느 날 대학 친구들과 차를 마시며 소소하게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한 시간 두 시간이 흐르고 어느 덧 카페에 앉은 지 세 시간이 넘어갈 무렵, 이야기는 자연스럽게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한 아이가 먼저 자신의 이야기를 툭 던졌고 그러자 연달아 이야기들이 쏟아져나왔다. 어릴 때 아빠 친구가 목말 태워준다는 핑계로 치마 사이에 손을 넣었던 일, 생판 모르는 남자가 남녀공용 화장실 문을 잠근 채 코너로 몰던 일, 옆집 남자가 나체로 집에 쳐들어와 옷을 벗기려던 일 등 입에 담기 껄끄러운 이야기들이 공기의 흐름을 탔다. 그땐 너무 어려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저 이상하다, 무섭다 당황하고 왠지 모르게 수치스러워하면서 울던 경험. 그리고 그때까지 기억 저 깊숙이에 넣어놓고 의도적으로 먼지가 쌓이도록 방치했던 경험들이 급류를 탄 채 쏟아져나왔다.


그런데 유독 이런 경험은 여자들이 많이 겪는 것 같다. 일반화할 수는 없겠지만 주변의 남자 지인들에게 물어봐도 이런 경험을 했다는 사람이 없다. 그런 경험을 했다면 필시 너무 고통스러워 기억하고 있을 텐데, 그런 고통이 전무하다는 거다.


<그랑 주떼>의 예정 역시 고통스러운 경험을 안고 살아간다. 낯모르는 아저씨와의 만남, 이후 그와 마주친 기억, 모두가 잊으라고 잊어버리라고 말하는 것에 대한 두려움 -심지어 엄마는 그 사건 이후 예정이 동네 주민들에게 도와달라 외친 것에 대해 윽박지르기까지 한다. 앞으로 동네 창피해서 어떻게 살겠느냐고.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아 소설적 극화로 여겼지만, 실제 이런 엄마가 없으리란 법도 없으니 그런 엄마를 두지 않은 것을 감사히 여겨야 하나 싶다- 등. 폭력적인 짝꿍과 아이의 말은 모두 웃어넘기는 어른들과 제 자식을 지키려는 고모 등 모든 상황은 예정을 당황시키고 절망시킨다. 그래서 예정은 리나 같은 친구가 있어도 늘 그녀에게 상처 받지 않을까 두려워하고 따돌림을 내면화한다. 오래된 절망이 몸속에 녹아내려 자리잡은 채 점점 더 크게 똬리를 틀어 그녀를 잡아먹고 있었던 거다.


그녀의 절망이 너무 강해 책을 읽는 내내 우울했고 슬퍼졌으며 모든 상황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발레 수업에 온 아이들의 옷을 벗기며 벌벌 떠는 그녀의 현재 상황까지 숨을 옥죄어올 때쯤에는 챕터마다 교차되는 과거와 현재도 아무 의미가 없어졌다. 그녀의 과거가 곧 현재고 현재가 곧 과거로 읽혔기 때문이다.


그러나 숨막히는 절망은 두 다리로 날아올라 다리를 일직선으로 펴며 그랑 주떼를 해내는 예정의 마지막 모습에서 비로소 잠잠해진다. 사실 발레를 소재로 한 작품(예를 들어 영화 <빌리 엘리어트>)에서는 대개 그랑 주떼로 끝을 맺나, 이게 가장 편한 결말인가 싶기도 했다. 그러나 <그랑 주떼>의 예정에게 있어 이 ‘그랑 주떼’는 자신을 받아들이는 행위로 느껴져 안도감이 든 게 사실이다. 바닥을 치던 절망의 늪에서 비로소 한 발이 빠져나온 느낌이랄까?


원래 나는 불편한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누구나 그렇겠지만 침잠해 있는 힘든 상황만 보여주는 게 아니라 그런 상황에서 깜빡이는 등불 하나쯤은 보여줬으면 하는 게 개인적 바람이다. 희망을 전면화하는 건 진짜 허구더라도 그림자나마 보여줬으면 싶다. 그래야 보는 이도 조금은 숨통이 트이지 않겠는가. 김혜나의 <그랑 주떼>는 우울의 끝을 보여주는 듯했음에도 작가의 말간 문체와 뒤로 갈수록 손에서 책을 놓을 수 없는 흡입력 때문에(챕터 5부터는 미친 듯이 예정의 삶에 빠져들었던 것 같다. 그래서 더 절망스럽고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결국 담담한 희망의 춤을 볼 수 있었다.



요즘은 갈수록 긴 글을 읽기가 어려워지는 시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래서인지 은행나무 노벨라 시리즈는 더욱 반가웠다. 편집도 깔끔했고 디자인도 무난하다. 개인적으로 <그랑 주떼>는 겉표지보다 속표지가 더 마음에 든다. 겉표지가 예정의 절망을 나타내고 있다면 환한 오렌지색의 속표지는 이제 더 이상 절망에 묶여 있지 않겠다는 예정의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서다. 예정 같은 아픔을 겪었던, 겪고 있는 모든 이들이 절망 속에서 풀려나길. 희망의 그랑 주떼를 해내길. 간절히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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