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B와 D 사이의 C, 그리고 『말』에 대하여
학창 시절, 『구토』를 읽다 구토할 뻔했다. 『구토』의 주인공 로캉탱은 아무런 이유 없이 수시로 구토하지만 『구토』의 독자 나에게는 분명한 구토 사유가 있었다. 사르트르의 『구토』 때문이었다. 그렇게 사르트르는 나에게서 잊혀져 갔다. 그를 읽기가 힘들었다.
그를 다시 만나게 된 건 천희란 작가님의 추천으로 『말』을 읽고부터였다. 경쾌하고 까불거렸다. 『구토』의 난해함이 순식간에 잊혔다. 읽기와 쓰기에 대한 그의 자서전은 그 둘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읽기 쉽게 쓰여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읽기 파트가 쓰기 파트보다 재미있었다.
“한 줄이라도 쓰지 않은 날은 없도다.” 이것이 내 습성이요 또 내 본업이다. 오랫동안 나는 펜을 검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지금 나는 우리들의 무력함을 알고 있다. 그런들 어떠하랴, 나는 책을 쓰고 또 앞으로도 쓸 것이다. 쓸 필요가 있다. 그래도 무슨 소용이 될 터이니까 말이다. 교양은 아무것도, 또 그 누구도 구출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무것도 정당화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것은 인간의 산물이다.
“나는 오직 글쓰기를 위해서만 존재했으며, ‘나’라는 말은 ‘글을 쓰는 나’를 의미할 따름이었다”는 사르트르의 문장 앞에선 말문이 막힐 뿐이다.
그러나 ‘읽기’에 관해 이야기할 때면 사르트르는 한없이 가벼워진다. 아버지 없이 자라 슈바이처 집안(노벨평화상을 받은 A.슈바이처는 사르트르 어머니의 사촌이다)의 할아버지의 총애를 받기 위해 스스로에게 ‘신동’이라는 캐릭터를 부여하고 연극을 했던 사르트르는 이 세상 모든 어린아이와 다름없다. 자유와 자유로부터 비롯된 좌절이라는 부조리 앞에서 어쩔 수 없이 연극적으로 책을 읽어나갔던 사르트르에게 책의 세계는 그가 인식한 최초이자 유일한 세계였다.
그가 유년기에 경험한 부조리의 세계는 사실 사르트르 개인의 일화라기보다 우리 모두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우리가 나르시스트적이고 심지어는 강박에 가까운 자기애와 집착을 보여주는 이 책, 『말』을 굳이 읽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아버지가 몇 방울의 정액을 흘려서 아이 하나를 서둘러 만들어 놓”으면 사람은 태어나고, 자라면서부터 소통하기보다는 인정받기 위한 말들을 이어 나가게 된다. 프로이트가 말했던가. 언어란 욕망의 대체물이며, 이때의 욕망은 곧 타인에 대한 애정과 인정에 대한 갈구라고.
이러한 유년기를 거쳐 사르트르는 삶의 부조리를 깨닫게 되고 후설의 ‘의식의 지향성’ 개념을 받아들이게 된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인간은 자유이며 스스로를 창조하는 존재 이외에 다른 의미는 가지고 있지 않다고. 인간은 의식의 주체라고.
『말』은 사르트르의 실존주의 사상의 근간이 무엇인지 알 수 있도록 도와준다. 1964년, 사르트르가 『말』을 출판한 후 노벨문학상 수상자에 선정된 것도 그 때문일 테다(물론 그는 수상을 거부했다). 그리고, 비록 우리가 사르트르는 아닐지언정 각자 저마다의 『말』을 써 보는 재미도 누릴 수 있을 테다. 때때로 나는 궁금하다. 당신의 읽기와 쓰기에 대한 ‘『말』’이.
* 부제 중 ‘B와 D 사이의 C’는 사르트르의 말에서 따 왔습니다. 그는 말했죠. “인생은 B(Birth:탄생)와 D(Death:죽음) 사이의 C(Choice:선택)”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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