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런치북 화양영화 18화

21세기식 비극의 탄생

- 영화 <쓰리 빌보드> 스토리 분석

by 김뭉치

영화 <쓰리 빌보드>에서 가장 흥미로운 것은 플롯이다. 캐릭터(지구 상의 유일한 성격이므로 극단적일 수밖에 없음. 그 극단성이 얼마나 매력적인지가 중요)들은 평면적이지 않고 입체적이다. 그러다 보니 스토리는 예측 불가능한 재미가 있다. 밀드레드가 무조건 선인 것도 아니고 딕슨이 무조건 악한 것도 아니다. 캐릭터들이 충돌하는 지점에선 알 수 없는 스파크가 튄다. 그래서 끝까지 스토리를 따라가게 하는 힘이 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좋은 플롯의 조건 중 하나로 '덕과 정의에 있어서 월등하지는 않으나 악덕과 비행 때문이 아니라 어떤 과실 때문에 불행에 빠진 인물'을 꼽고 있다. 인상 깊은 것은 밀드레드와 딕슨이 껴안고 가는 복수의 딜레마다. 이들의 복수는 잘못된 방향으로 치닫고 비극을 파생시킨다.


『메데아』와 『햄릿』의 변주

<쓰리 빌보드>를 보며 두 비극이 생각났다. 세 개의 빌보드를 설치한 밀드레드가 압도적인 배척을 받고 그 잔여로서의 동정도 받는다는 점에서 그리스 비극 『메데아』가(신화학에서는 고대 그리스 사람들의 이방인과 여성에 대한 감정이 이 인물에 투사되어 있다고 본다), 현실은 계속해서 나빠지고 부조리해지며 주인공들 역시 거기에 휩쓸리고 후회할 일을 벌이고 만다는 점에서는 셰익스피어의 비극 『햄릿』이 떠올랐다. 특히 『햄릿』은 복수극이라는 인상이 짙지만 실제로는 부조리에 의해 부서져가는 햄릿의 모습을 치밀하게 묘사하고 있다는 점, 의도치 않은 결과가 계속해서 발생한다는 점에서 <쓰리 빌보드>와 유사한 정서가 있다. 『햄릿』에서는 오필리어와 레어티스의 아버지로 나오는 폴로니어스가 엉뚱하고 어딘지 모자라 보이는 모습으로 나오는데, <쓰리 빌보드>에선 극 중반부까지의 딕슨의 모습이 그러하다. 딕슨은 무지하고 무례하다. 결코 호감형 인물은 아니지만(완장형 인물) 그렇다고 사악한 인물은 아니다. 폴로니어스와 딕슨의 이러한 희극적 모습은 "희극적 요소의 가미가 비극성을 배가시킨다"는 고전적인 극 원리를 충실히 반영하고 있다. 게다가 밀드레드가 전화를 걸어 확인까지 했음에도 이어폰을 낀 채 노래를 듣다 결국 밀드레드의 방화로 화상을 입는 딕슨의 모습은 등장인물이 정확한 시간에, 정확히 잘못된 장소에 있는지 확인함으로써, 사건들에 운명이나 필연성의 감각을 빌려주는 플롯이라는 생각마저 든다.


복수의 딜레마와 죄의식

죽어가면서 강간당한 딸로 인해 밀드레드는 분노한다. 딸과의 마지막 대화에서 밀드레드는 강간이나 당해 버리라고 말한다. 내면 깊은 곳에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밀드레드의 분노는 정확한 곳에 가 닿지 못하고 자꾸만 다른 방향으로 튀어간다. 그녀의 분노는 복수로 해결되지 못하고 자꾸 다른 스토리로 전개돼 관객들은 괴로워진다.


밀드레드

잘못된 복수 - 죄의식 1. 강간범에게 가야 할 밀드레드의 분노는 서장 윌러비에게 가 닿고 서장은 자살한다.

잘못된 복수 - 죄의식 2. 빌보드를 불 지른 것은 다른 이들이나 밀드레드는 오해하고 경찰서에 화염병을 날림으로써 딕슨은 전신화상을 입는다.


딕슨

잘못된 복수 1. 밀드레드가 빌보드를 설치한 뒤 윌러비가 자살하자 딕슨은 빌보드를 판 레드 웰비를 구타한 뒤 창문에서 밀어 떨어뜨린다.

죄의식 1. 전신화상을 입은 딕슨은 병실에서 레드 웰비를 만난다.




사실 이들이 복수해야 할 대상은 실제 이들의 분노를 감내해야 했던 사람들의 것이 아니었다.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세계는 합리적이거나 이성적이지 못하며 오히려 불합리하고 부조리하다는 걸 영화는 보여주고 있다. 잘못 복수한 이들이 파생시킨 비극, 영화는 이 모든 것이 개인의 탓이 아니라 사회의 부조리 때문이라고 말하는 듯하다. 결국 영화의 시작점이었던 딸을 잃은 어머니의 복수는 죄의식의 문제로 옮겨 간다. 또 다른 주인공 딕슨 역시 죄의식을 가지고 살아간다. 21세기식 비극은 이렇게 탄생한다.


이 세계의 비극은 누구의 책임인가

<쓰리 빌보드>는 존 웨인식 고전 서부극을 오마주해, 미국 사회의 축소판으로 보이는 에빙이라는 가상의 공간 안에서, 복수의 딜레마가 낳은 비극을 껴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우리에게 묻고 있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야기할 뿐이라는 페넬로페의 대사는 밀드레드의 죽은 딸이 그녀에게 던지는 외침 같기도 하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지와 무례를 깨닫고 좀 더 나은 사람이 된다. 이제 그들은 전혀 되돌아보지 않았던 스스로를 바라보며 자신에게도 책임이 있음을 통감한다. "우리가 과연 잘하는 걸까?"



그렇다고 (더 큰 분노와의 차이가 무엇인지 알 도리가 없는) 사적 복수를 감행할까 말까를 "가면서 결정하자"는 그들이 마냥 착한 사람들로 보이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들은 책임지는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밀드레드와 함께 떠나는 사람은 무지하고 무례했지만 자신의 행동을 돌아본 딕슨일 수밖에 없다. 전남편 찰리와 떠났다면 이 영화는 그저 그런 개인의 복수극이 될 수밖에 없다.



극 전반부, 집에 찾아온 몽고메리 신부를 내쫓으며 밀드레드는 연대 책임을 묻는다. "설혹 범행과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범행 사실 자체에 대해 몰랐다고 해도 같은 집단에 소속된 사람이라면 면책되지 않아!"



극 결말부, 밀드레드와 딕슨은 알고 있다. 그들의 사적 복수의 대상이 밀드레드의 딸을 죽인 범인이 아니라는 걸. 그럼에도 그들은 과연 잘하는 것인지 물으며 가고 있다. 이러한 전반부 대사와 엔딩을 통해 영화 <쓰리 빌보드>는 우리의 이해와 책임에 대해,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말해주고 있다. 이 세계의 비극은 우리 모두의 책임이라고, 그러니 각기 다른 우리 모두를 서로 이해하고 연대하며 책임을 져야 한다고, 그렇게 스스로를 돌아보고 죄의식을 나누어 가진 채 이 비극의 세계를 살아내야 한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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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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