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
탈진실의 시대(객관적 사실이 공중의 의견을 형성하는 데 있어 개인적 신념과 감정에 호소하는 것보다 영향력을 덜 끼치는 환경을 의미), 진실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고 도리어 권력이 진실이 된다.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은 이러한 시대의 호흡을 감각적이면서도 발랄하게 다룬 영화다. 2019년의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줄 수 있는 최대치를 이 영화는 끌어낸다. 볼거리 이상의 생각거리를 던져주는 과학기술과 시대의 철학이 다층적인 레이어를 통해 겹겹이 담겼다. 모든 신들을 소장하고 대사들을 기억하고 싶을 정도로 완벽하다. 전작 <스파이더맨 : 홈커밍>에 비해서 액션의 스케일이 커져 더욱 더 흥미를 자극한다.
* 여기서부터는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영화의 내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상태에서 보시는 게 가장 좋습니다. 아직 영화를 보지 않으신 분들은 '뒤로 가기'를 눌러주세요. 영화를 보신 뒤 이 글을 감상하시는 편을 추천합니다.
베니스, 프라하, 런던 등 미국이 아닌 유럽에서 펼쳐지는 다채로운 전투 신, 마지막 드론과의 전투에서 보여주는 아름답고 재빠른 웹 스윙, 그야말로 '팅글'이 느껴지는 스파이더맨의 육감, 스파이더 센스 "피터 찌리릿"으로 예리하게 적의 수법을 간파해 미스테리오를 격파하는 신은 그야말로 최고의 액션이었다. 재미, 의미, 감동을 한 번에 잡기는 쉽지 않은데 그 어려운 일을 이 영화는 해낸다. 짧은 상영시간 내에 많은 이야기들이 굉장히 빠르게 전개되기 때문에 지루할 틈이 없다는 것도 이 영화의 장점이다. 그리고, 그렇게,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은 애니메이션 <스파이더맨 : 뉴 유니버스>와 더불어 내 생애 최고의 스파이더맨 영화가 됐다.
<파 프롬 홈>의 오프닝은 가히 역대급으로 기억될 만하다. 영화 <보디가드> OST로 유명한 휘트니 휴스턴의 <I will always love you>가 흐르며 마블의 타이틀 롤이 올라갈 때는 웃음이 나면서도 뭉클하게 추억으로 침잠하게 된다. 모두가 아이언맨과 캡틴 아메리카, 블랙 위도우의 죽음을 알고 있는 블립(The Blip) 이후의 세계(캡틴 아메리카의 실종을 이 세계의 사람들은 죽음이라고 믿고 있는 듯 보인다). 남겨진 사람들의 죄책감과 그리움, 트라우마는 아이언맨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피터의 모습을 통해 극대화된다. 마블은 아이언맨을 사랑한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의 마블을 만든 게 아이언맨이기 때문이다. 아이언맨의 죽음은 단순히 마블 캐릭터 한 명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었다. 관객에겐 지금까지 MCU와 쌓아온 한 시기와의 작별이었고 마블에도 역시 그러했을 것이다. 피터는 이 위대한 아이언맨의 뒤를 이어 차세대 아이언맨으로 주목받는 것에 심하게 부담을 느끼는 동시에 자신은 자격이 없다는 생각에 끊임없이 괴로워한다. 물론 이 영화는 피터가 아이언맨의 빈자리를 채워야 한다는 주변의 압박을 받으면서도 끝내 아이언맨이 아닌 스파이더맨으로서 각성하는 이야기가 될 테다. 그렇다면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은 그 서사의 결말에 가 닿기 위해 어떤 과정을 보여줄 텐가.
일단 위대한 아이언맨의 유산 이디스(Even Dead I'm The Hero)와 살상 드론이 등장한다. 아이언맨은 Even Dead, The Hero니까. 심지어 미스테리오가 이디스(선글라스)를 꼈을 때 그의 외양은 흡사 아이언맨의 현현을 보는 듯하다. 사람들이 미스테리오를 향해 토르와 아이언맨을 합친 것처럼 보인다고 하는 것도 과장은 아니다. 미스테리오 역시 아이언맨의 유산이다. 토니 스타크에 대한 증오가 쿠엔틴 벡을 미스테리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아이언맨에게 인정받길 원한 <홈 커밍>의 피터와 쿠엔틴 백은 한 끗 차이다. 피터가 조금만 비뚤어졌어도 쿠엔틴 벡이 될 수 있었단 얘기다. 이것이 페이즈 3라는 대단원의 막을 내리는 영화로 <파 프롬 홈>이 위대한 이유다. 아이언맨을 상실한 우리에게 토니를 중심으로 엮인 스파이더맨과 미스테리오는 또 한 번 토니 스타크의 빈자리를 되새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것이 코믹스에선 할리우드에서 일자리를 잃은 좌절한 특수효과 마법사였던 쿠엔틴 벡의 직업을 마블이 스타크사의 엔지니어로 전환시킨 이유다.
이제 청춘 로맨스와 성장담, 액션을 넘나드는 영화의 장르는 미스테리오의 등장으로 공포로까지 넘아간다. 미스테리오는 토니에 대한 피터의 죄책감을 이용해 두려운 환각을 불러일으킨다. 이 신을 통해 우리는 <블랙 미러>의 '베타테스트' 에피소드에서 느꼈던 공포와 유사한 불안감을 느끼게 된다. 감각적인 신들이 정서적으로 넘어가는 순간, 우리는 또 한 번 짜릿함을 체감한다.
사실 미스테리오는 오로지 과학 기술과 언론의 탈진실로만 만들어진, 트럼프 시대의 빌런이다. 그의 정체는 일반인이며 그의 무기는 드론과 사람들의 트라우마다. 예고편에서 등장한 멀티버스 개념은 미스테리오의 거짓말에 불과했다. 현실감각이 없는 사람들은 속이기 더 쉽다거나 "사람들은 믿을 게 필요해. 지금이라면 뭐든 믿을 거야"라는 미스테리오의 대사를 들으면 그가 우리 시대의 사람들을 어떻게 이용하는지가 확연히 드러난다. 지금 시대엔 진실이 없다는 조지 오웰의 문장을 읊는 MJ를 보면 <파 프롬 홈>이 던지는 메시지도 명확해진다.
이 영화는 포스트 트루스(Post truth) 시대를 사는 우리가 미스테리오의 거짓말을 물리칠 수 있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다만 진실은 존재하며 그것은 눈에 잘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조심스레 일러줄 뿐이다. 그리고 <파 프롬 홈>은 진실이 서로를 위험하게 하더라도 우리는 끝내 진실을 이야기해야 함을 MJ에게 자신이 스파이더맨이라고 고백한 피터를 통해 보여준다.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의 감각은 게임의 그것과 유사하다는 점에서 <존 윅> 시리즈가 떠오르기도 한다. 쿠키 영상의 스파이더맨 슈트 속 거미가 하얀색(벨로시티 슈트)인 것으로 보아 소니의 플레이스테이션 4 <Marvel's Spiter-Man>을 그대로 차용한 듯하다. 뉴욕의 마천루를 배경으로 자신의 셀카를 찍는 스파이더맨의 모습은 PS4 속 그것과 같다.
탈진실에 힘을 실어주는 언론의 모습은 <데일리 뷰글>을 통해 확인할 수 있다. 우리는 이미 코믹스를 통해 스파이더맨의 정체가 드러나는 것이 얼마나 심각한 일인지 알 수 있었다. 이제 한 편의 계약만이 남은 톰 홀랜드의 <스파이더맨>은 어떻게 될 것인가. 3편이 더욱 기다려지는 이유다.
"10대 로맨스와 슈퍼히어로 액션의 경쾌하고 예측할 수 없는 조합. <스파이더맨 : 파 프롬 홈>은 MCU의 다음 세대를 위한 무대를 스타일리시하게 선사한다." 로튼 토마토의 총평이다. 액션도, 사회적 메시지도 있지만 <파 프롬 홈>에서 빼놓을 수 없는 건 MJ와의 하이틴 로맨스다. 영드 <오티스의 비밀 상담소>(원제 SEX EDUCATION)가 연상되는 수줍은 로맨스가 연애 세포를 자극한다. 전작에선 그리 존재감 없었던 학교 방송국 앵커 베티도 주목해보자. 네드와의 알콩달콩 로맨스가 심하게 사랑스러우니.
나는 이 영화를 몇 차까지 관람하게 될 것인가. 일단은 N차 관람 확정이다. 당장 4DX로 또 보고 싶으니 말이다.
- 피터가 포장한 여행가방에는 BFP라는 이니셜이 붙어 있다. 아마도 피터의 삼촌인 '벤자민 프랭클린 파커'의 약자가 아닐까.
- 기내 엔터테인먼트 시스템에 대한 다큐멘터리 옵션 중 하나로 <와칸다 찾기>가 있었다.
- 피터의 방에는 나노 입자로 움직이는 아이언 스파이더 슈트가 충전되고 있다. 아이언 스파이더 슈트는 충전이 필수인 것이다.
- MJ가 좋아하는 블랙 달리아. 피터는 MJ에게 고백하기 위해 블랙 달리아 목걸이를 사지만 미스테리오와의 결투 이후 MJ가 그에게 내민 블랙 달리아는 산산조각 나 있었다. 1947년 1월 미국 로스앤젤레스에서 당시 22세의 여성 엘리자베스 쇼트가 끔찍하게 살해당했는데 이를 '블랙 달리아' 사건이라고 한다. 쇼트는 1947년 1월 15일 로스앤젤레스 레이머트 공원에서 허리가 잘려서 상반신과 하반신이 분리된 시체로 발견되었다. 생전에 검은색 옷을 즐겨 입었다는 데 착안하여, 당시 어느 기자가 마음대로 '블랙 달리아(Black Dahlia)' 사건이라고 불렀는데 이것이 굳어졌다. 피터가 MJ에게 선물한 블랙 달리아 목걸이가 산산조각 나 있었던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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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