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충'의 사회학, 영화 <기생충>
언젠가부터 우리 사회에 '~충'이라는 단어가 퍼지기 시작했다. 예를 들어 매사에 진지한 태도를 취해 대화할 때 주변 사람들을 답답하게 만드는 사람을 '진지충'이라고 부르거나 지나치게 설명적인 사람, 굳이 설명해주지 않아도 되는 것까지 설명하려 하는 사람을 '설명충'이라 부르는 식이다. 여기에서 '~충’이라는 말은 특정 집단을 비하하는 단어로, 차별과 조롱의 언어라 할 수 있다.
'기생충'이라는 단어의 원뜻은 "다른 동물체에 붙어서 양분을 빨아 먹고 사는 벌레"다. 그러나 영화 <기생충>을 보면서 나는 다른 의미의 '충'을 떠올렸다. 차별과 배제의 언어로서의 '충'과 그 언어 좀 더 너머에 있는, 좀 더 원초적인 타자와 나의 ‘구별짓기’ 말이다.
부르디외는 상이한 계급들의 경합과 투쟁에 따라 사회 공간이 분화된다고 말한다. 또 부르주아들은 자녀에게 최고급의 교육을 제공함으로써 경제 자본을 교육자본으로 전환한다고 말한다. 올해 최고의 화제작이었던 TV 드라마 <스카이 캐슬>을 떠올려보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영화 <기생충>에서도 기우(최우식)와 기정(박소담)은 계속해서 대학 입시에 실패하면서도 그 끈을 놓지 못한다. 현재 우리나라에서 계층의 사다리를 타고 상승할 수 있는 유일한 가능성이 교육에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계속되는 집안 경제의 하락으로 함께 곤두박질쳤을 그들의 교육 사다리는 어쩌면 한때 그들이 꿈꿨을, '일리노이 주립대'로 위시되는 명문 해외 대학으로 거짓 전환된다. 그리고 아마도 유학을 가지 못해 자격지심이 있을 것만 같은 부잣집 마나님 연교(조여정)는 해외 명문 대학생들에게 자녀들의 교육을 맡긴다. 여기에서 '교육'은 전혀 다른 두 계층이 유일하게 부딪힐 수 있는 교집합에 해당한다.
두 가족이 만나고 나면, 공간이 더없이 중요해진다. 봉준호는 구구절절 설명하는 대신 기택(송강호)의 반지하와 박사장(이선균)의 주택을 통해 두 계급 간의 환경이 얼마나 다른지를 '보여준다'. 여름철 땡볕조차 귀한, 빛이 들지 않는 기택의 반지하와 그 땡볕을 감상하는 듯한 박사장의 주택. 기택의 반지하는 세상에 없을 것처럼 희한한 구조이고 박사장의 주택은 마치 성북동의 한 부분을 떼어온 것만 같다. 기택의 반지하는 꿉꿉하고 박사장의 주택은 모던하다. 거의 대부분의 스토리가 두 집이라는 공간 안에서 전개되기 때문에 영화는 마치 연극 같다. 이 공간들에서 자기만의 선을 그어놓고 그 선을 넘어오는 걸 견디지 못하는 박사장의 치졸함이, 자신의 가족을 보며 코를 쥐는 박사장네 가족을 바라보는 기택의 차오름이 지독한 여름철 땡볕 아래 끓어오르며 적당히 판타지 같고 또 적당히 현실적인 인물들이 탄생한다.
그리고 여기에, 계단이 있다. 영화 속 계단은 마치 계층의 사다리처럼 작동하며 두 가족은 계단을 오르거나 내려간다. 수직의 미학은 공간의 미학과 함께 <기생충>을 받치는 또 다른 축이다. 수직과 공간, 이 두 가지 축은 영화의 장르를 추동하고 영화는 장르의 범주 안에서 또 밖에서 움직이며 적당히 관객을 들었다 놓는다. 감독이 조금 더 치밀하고 리얼했다면 <기생충>의 전반적인 톤은 곧 비극이 되고 신파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봉준호는 절묘하게 완급 조절을 하고 엇박자를 통해 영화 전체에 기묘하고 기괴한 장르영화의 유머를 흩뿌려놓는다.
<기생충>의 탁월한 점은 영화가 단순히 계급 불평등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차별과 배제의 언어 너머 좀 더 원초적인 그 무엇, 정서적이고 상대적인 박탈감과 우리 사회에 만연한 문제인 자존감 상실을 다룬다는 데 있다. 가난은 단순히 물질적인 풍요의 정도를 말하는 게 아니라 당사자의 감정적 목줄을 쥐고 흔든다. 가난한 사람의 자존감과 정서는 함께 가난해지며 반대로 부자의 자존감은 의도치 않게 오만이 되기도, 그리하여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가난한 이들에게 생채기를 내기도 한다.
너무나도 이성적이라고 주장하는 우리들의 기저엔 감정이 도사리고 있으며 그 분노를 폭발시키는 기제는 자신도 모른 채 쌓이고 쌓여 어느새 폭발한다.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적당히 착하고 적당히 비겁하며 따라서 적당히 나쁘다. 그것이 '교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기 전, 미성숙했던 어느 날, 우리에겐 누군가에 대해 말할 때 냄새, 외양 등 원초적인 그 무엇으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평가받았던 적이 분명히 있었다. 거기에는 나는 타자와 다르다는 생각, 타자보다 우월하다는 생각, 열등감과 피해의식이 있다. 결국 우리가 이 영화를 보고 해석해야 할 것은 너무나도 직접적인 상징들이 아니라 우리 내면 어두운 곳에 깊숙이 자리 잡고 있는 다층적 차원의 감정들이다. 우리의 밑바닥에서 그 감정들을 건지고 말려 뭉쳐놓으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것의 공포가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그 실체를 바라보게 된다. 공포는 자존감 상실에서 오고, 자존감을 상실하게 만드는 것은 공고하게 유지되고 발전되는 자본주의 사회의 시스템이다.
이 영화가 찝찝했다면 그 감정은 결코 보고 싶지 않았던 공포의 실체를 목도한 데에서 온다. <기생충>은 평가하고 평가받았던 어느 날에 우리를 던져놓고 그를 추체험하게 하는 동시에 '교양'으로 포장했던 우리의 민낯을 까발린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끊임없이 타자와 나를 구별짓고 조롱하는 '충'의 사회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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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뭉치의 에세이 『엄마는 행복하지 않다고 했다』도 많이 사랑해주셔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