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단의 물동이
"쟤는 저 초콜릿이 욕심이 나가지고 저러네~~"
책상에 있는 초콜릿이 먹고 싶어서 책상 주변을 어슬렁 거리는 아이(유아)를 보고 어른이 한 말이다. 가끔 이런 말을 들으면 슬퍼진다. '욕심이 난다'라는 말은 유아시기 아이들의 행동을 이야기하기엔 과한 설명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냥 "초콜릿이 먹고 싶나 보네"가 적당하지 않을까? 사실은 이 말 자체가 거슬린 건지, 그냥 그 사람이 거슬린 건지는 아직도 헷갈린다. 아무튼 초콜릿이 먹고 싶은 아이를 '욕심쟁이'로 판단해 버린 그 사람의 처사가 과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른도 초콜릿이 보이면 먹고 싶을 때가 있다. 보여서 먹고 싶은 마음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두 개 세 개 쥐고도 자신만 먹으려고 하면 욕심이라는 말을 붙여도 이해가 되겠지만, 그렇지 않을 때는 욕심이 아니라 자연스러운 마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는 가끔 자연스러운 마음에도 꼬리표를 붙인다. 잘하고 싶은 마음에도, 열심히 하고 싶은 마음에도, 최선을 다하고 싶은 마음도 '욕심'으로 뭉뚱그려서 표현해 버릴 때가 있다. 그럴 때 세상이 각박하게 느껴진다. 사람을 재단하고 판단하는 말들을 습관적으로 쓸 때 누군가에게 죄책감을 심어주기도 한다.
판단의 물동이
판단의 물동이는 살아가면서 꼭 필요한 물동이다. 가끔은 판단의 물동이를 그득그득 채워야 무언갈 해나가는 힘이 생기기도 한다. 나는 특히 직장에서 판단의 물동이가 필요했다. 어느 정도 일에 대한 판단이 서야 일을 할 수 있다는 느낌이 들었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 판단의 물동이가 찼을 때 안정감을 느낀다. 눈앞에 있는 상황을 알고 제어할 수 있다는 생각이 들면 효능감도 올라간다. 사회는 그렇게 적응해 나갈 수 있다. 하지만 육아를 할 때는 한 번씩 판단의 물동이를 비워내야 한다. 아이가 자아를 만들어가는 시점에 내 판단의 물이 아이의 물동이에 가득 채워질 수 있기 때문이다. 엄마의 판단이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는 육아지만 엄마가 그것을 경계하며 키우는 것과 경계하지 않고 키우는 것은 다르다.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다. 그래서 나는 이 부분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판단의 물동이가 주는 상처
어릴 때부터 여린 편이어서 엄마는 집에서 반려동물을 키우는 걸 허락하지 않으셨다. 동물은 우리보다 수명이 짧으니 그 끝이 벌써 걱정이 되어서다. 친척들을 만나면 헤어지기 싫어서 울고, 매일 보는 친구와도 헤어질 때 아쉬워했다. 그래서 좋아하는 만큼 쉽게 상처받았다. 좋아하면 기대하게 된다. 그래서 기대가 무너질 때마다 혼자서 상처받는 아이였다. 어린 시절 사람들에게 기대했던 것은 '있는 그대로 인정받고 싶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자신의 잣대로 나를 판단하는 사람들을 자주 만났다. 다른 아이들은 그 사람의 말들을 무시하고 넘어가곤 했지만 나는 그런 말들에 상처를 받았다. 별 것 아닌 것에 상처받는 나 때문에 상대도 기분이 상하고, 나도 자기판단대로 나를 보는 상대 때문에 상처를 받았다. 지나고 보니 기대하지 않아야 할 사람들에게 기대를 했다는 걸 알았다. 사람 보는 눈도 공부라는 것을 배워가고 있다. 판단하는 말들에 상처받던 내가, 원하는 마음의 온도를 언어로 표현하는 순간을 만났다. 알쓸신잡에서다. 알쓸신잡 2에서 유시민작가님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삶이 근본적으로 외로운 것이 그것 때문 아닌가? 그러니까... 내가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해, 다른 사람도 나를 완전히 이해해주지 않아요. 그런데 이것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면 외로워질 수밖에 없을 것 같아요. 그런데 이게 매우 정상적이라고 생각하면 완전치는 않지만 깊게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이 조금 있으면 세상이 밝아 보이거든요"
이 말은 이해받고 싶었던 순간과 상대를 끝까지 이해해보려 했던 순간들이 있었기에 할 수 있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확히 말하면 어떤 경험을 했기에 이런 말씀을 하실까? 하고 상상해 보게 되는 말이었다. 자세한 내용은 알지 못하지만 아주 뜨거워졌다가, 아주 차가워져도 보았다가 드디어 삶의 온도를 찾은 말 같아서 오래도록 내 마음에 남아있는 문장이다. 우리 모두는 서로에게 타인이다. 그래서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것 자체를 그냥 인정하면 된다. 뜨겁지도 않게, 차갑지도 않게. 더 나아가 나 또한 타인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다는 사실을 인정하면 된다. 오히려 서로 이해할 수 없다는 사실은 인정하는 것이 진짜 '이해'라는 생각도 든다. 저 사람이 나를 이해하지 못한다고 슬퍼하지 않는 것. 상대에게 섭섭한 마음이 들 때 나도 상대를 이해하지 못하는 지점이 있을거라 생각해 볼 때 판단의 물동이가 비워진다.
어른들의 판단의 물동이
부동산에서 집을 보러 온다기에 부재중일 때 비밀번호를 알려준 적이 있다. 매일 쓰던 비밀번호가 아닌 쉬운 비밀번호로 바꾸어 놓았는데 아빠와 엄마는 맨날 틀린다. 꼭 이전번호를 눌렀다가 새로 바뀐 번호를 누른다. 그래서 어느 순간부터 누가 들어오고 있는지 구분이 잘 되기 시작했다. 한 번에 누르면 두 딸들. 한번 틀리고 다시 누르면 엄마나 아빠다. 새로운 것에 적응하는 데 있어서 어른들은 아이들에 비해 한참 부족하다. 어른들은 무언가를 결정하면 잘 바꾸지 않는다. 사람에 대한 판단도, 자신의 결정도 바꾸지 않는다. 그래서 새로움을 잘 받아들이는 아이를 있는 그대로 보기 위해서는 어른들도 비워내야 한다. 예전에 라디오에서 들은 내용이다.
사회자 : 왜 이렇게 열심히 공부하세요? 이미 아는 게 많으신 것 같은데 왜 이렇게 열심히 배우세요?
답변자 : 말랑말랑해지려고요. 무언갈 배우지 않으면 딱딱해지잖아요. 그걸 경계하기 위해 배웁니다. 말랑말랑해지려고요.
어디서 들었는지, 누구의 대화였는지 기억이 나지 않아 늘 아쉽다. 답변자가 중년의 남자였던 것만 이것이 난다. 참고로 이 대화는 내 기억으로 각색된 대화다. 이 말의 요지가 좋았다. 말랑말랑해지기 위해 공부한다니. 중년의 남성이 하는 말 치고는 너무나 부드러운 말이었다. 이 문장이 나에게 영향을 많이 주었다. 배우지 않는 사람은 딱딱해진다. 딱딱한 사람들은 판사봉을 두드리듯 상대를 판단한다. 자신이 판사라도 된 양 자신은 돌아보지 않고 다른 사람만 판단한다. 하지만 배우는 사람은 열려있다. 열린 숨구멍으로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생각을 배운다. 말랑말랑하고 유연하게 상대를 받아들인다.
엄마가 판단의 물동이를 비워야 하는 이유
엄마딸 아니랄까 봐 첫째는 '오해'받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한다. 내가 보지도 않고 "이렇게 했지?" 하면 자리에서 50cm는 뛰면서 억울해한다. "좀 ~! 보고 말하라고!!" 내 딸 아니랄까 봐 발작버튼도 엄마랑 똑같아서 웃음이 난다. 그래서 나는 아이가 이해된다. 그리고 그 마음을 다스릴 수 있도록 알려줄 수 있는 엄마라서 기쁘다. (참고로 지금은 말이 안 통하니까.. 조금 더 크면 깊은 대화를 해보련다.) 아이를 키우면서 느끼는 건 우리 친정엄마도 참 힘들었겠다는 것이다. 우리 친정엄마는 나와 성향이 달랐으니 오죽 힘들었을까?
유아발달심리학을 배우면서 중요하게 느낀 용어 중 하나는 '강화'다. 행동주의심리학에 나오는 부분인데 어떤 자극이 유의미하게 미래의 행동에 영향을 주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반응을 자극하는 행동이기도 하다. 유아교육을 배우고 육아를 하면서 아이들에게 직접 적용하고 실천할 수 있어 감사한 시간이었다. 특히 아이가 어떤 부정적인 행동을 할 때 나의 반응이 아이의 행동을 강화시키는 건 아닐까? 생각하면서 키웠다. 그래서 선택한 것이 긍정강화였다. 부정적인 행동을 할 때 이야기하는 것보다, 아이들이 친절, 협력, 노력 등 바람직한 행동을 보일 때 칭찬하는 것이다. 물론 잘못된 행동을 할 때 훈육하는 것이 꼭 필요하기도 했다. 그러나 훈육을 하지 않아도 되는 사소한 행동은 그냥 지나쳤다. 엄마들이 볼 때 조금 거슬리고 부족하게 느껴지더라도 그 순간을 견디는 힘이 꼭 필요하다. 감정도 마찬가지다. 부정적인 감정을 붙잡아 누군가에게 말하고 나면 그 감정은 남는다. 살아서 힘을 갖는다. 하지만 부정적인 감정을 마음에 품었다가 혼자 흘려보내면 내 것이 되지 않는다. 그것처럼 아이의 부족한 순간을 붙잡지 않는 것이다. 그러면 아이도 스스로를 부족한 사람으로 인식하지 않는다. 아이는 엄마의 걱정 속에서 스스로를 부족한 아이로 인식하며 자라게 된다. 그래서 스스로 만족하며 자라는 아이로 키우기 위해서 엄마의 판단의 물동이를 비울 필요가 있다. 어떤 때는 비웠다가 어떤 때는 채웠다가. 그 중도(中道)가 참말로 어렵다. 하지만 흔들 흔들 시소타며 하는게 육아라는 생각도 든다. 어떤 때는 무지하게 자괴감 들었다가, 어떤 때는 자신감 빵빵이다가. 오늘도 글을 쓰며 내 판단의 물동이를 한번 점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