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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금 Nov 22. 2024

그건 쓸데없는 배려야

배려의 물동이 

남편과 백화점 푸드코트에 간 적이 있다. 홍콩 음식점에 들어갔는데 점심시간 바로 전이라 자리가 반쯤 남아있었다. 남편이 4인 자리에 앉으려고 하자 나는 2인 자리에 앉자고 말했다. 4인 자리는 직사각형이라 널찍했고 2인자리는 정사각형이라 한눈에 보기에도 좁았다. 남편은 의아한 표정이었지만 곧 내 말대로 2인 테이블에 앉았다. 그날따라 산 물건의 쇼핑백이 좀 커서 바닥에 쇼핑백을 두고 앉았다. 그런데 바로 뒤에 들어온 커플이 바로 4인 자리에 앉았다. 그러자 남편이 말했다. 


남편 : "이런 건 좀 생각해봐야 할 부분인 것 같아"

나   :  "어떤 거?" 

남편 :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배려를 하는 거... 여기는 식당이고, 자리가 충분했고 어디든 앉으면 되는데 두 사람이라고 2인에 앉는 건 굳이 하지 않아도 될 배려 같아. 직원들이 손님이 몰릴시간이면 우리에게 아무 데나 앉으라고 하지 않았겠지. 만약 자리가 붐빈다면 그건 직원들의 몫이지 우리가 신경 쓸 부분은 아닌 것 같아. 이런 것도 다 에너지를 쓰는 거잖아"  

 나   : "아... 진짜 그러네. 이런 부분은 내가 굳이 배려를 해서 불편함을 선택한 거네. 생각해 보니 이 일뿐 아니라 전반적으로 그런 경향이 있었던 것 같아... 음... 좀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다" 


거의 그대로를 옮긴 대화다. 나는 가끔 하지 않아도 될 배려를 한다. 이렇게 하는 게 편안해서 하는 것이지만 이렇게 과한 배려가 나도, 상대도 불편하게 하는 순간이 있다는 걸 안다. 하지만 잘 고쳐지지 않는다. 나는 되도록이면 조심하자 주의다. 쉽게 가까워지는 것도 경계하는 편이다. 조심하자는 의미에서 하는 배려는 좋지만 무엇이든 과하면 좋지 않다. 


아이가 나와 같은 태도를 가지게 된다면? 


내가 이 태도를 바꿔야겠다고 생각한 건 이 대화 때문만은 아니다. 아이들을 떠올리면서부터다. 문득 우리 아이들도 나와 같은 태도를 취한다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배려'는 내가 원해서 선택한 태도지만 우리 아이들이 이런 태도를 취한다면 썩 기분이 좋은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그런 기분이 드는 순간, 내가 과한 배려를 하고 있다는 알아차림이 있었다. 아이들 덕분에 또 한 번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그래서 상대가 원하는 배려 외에는 가만히 있기를 선택하기로 했다. 내가 해야 할 것은 배려하고 싶은 순간을 견디는 것이다. 이 것은 나와 함께 하는 상대와 나를 모두 위하는 태도라는 생각이 들었다. 모든 것은 정도다. 긍정적인 태도도 적당해야 그 의미가 살아 숨 쉰다.  


아이가 있는 지인을 만났을 때 


어른들이 아이들을 동반하고 만나는 자리에서는 아이들끼리의 케미가 꽤 중요하다. 어른들의 사이가 아무리 좋아도 아이들끼리의 케미가 좋지 않으면 아이를 동반한 만남은 지속되기 힘들다. 며칠 전 아는 언니집에 아이들을 데리고 놀러 갔다. 언니네 딸과 우리 첫째 딸은 동갑이다. 그날 언니의 딸과 첫째 딸이 살짝 대립을 했는데 그날따라 첫째가 주장을 많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딸에게 조율을 하도록 권유했다. 그러자 첫째는 "엄마는 늘 친구들 편만 들고..."라고 말한다. 그 순간에 둘 사이를 조율하는 것은 '옳은 일'이었지만 딸과의 관계에 전혀 '도움이 되는 일'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다음 만남 때는 언니와 미리 이야기를 나누고, 되도록 아이들끼리 조율하도록 두자고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아이에게 알려줘야 할 일이 있다면 각자가 자기 전 잠자리에 누워서 대화를 나누어도 충분하다는 생각을 했다. 아이들이 크게 잘못한 부분은 하나도 없었기 때문이다. 되돌아보니 엄마의 마음이 불편했을 뿐이다. 

아이들을 동반한 만남에서는 어른들이 서로 보기가 민망해서 각자의 아이들에게 배려를 하도록 권유하기도 한다. 그런데 어른들끼리 미리 대화를 나누어 놓고 아이들끼리 조율하도록 한 다음 집에 가서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어도 충분하다. 아이들의 감정이 상하면 어떤 말도 들리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울거나, 목소리가 커지거나 신체적인 힘이 가해지면 부모가 무조건 개입해야 한다. 아이가 때려도 개입하지 않는 엄마들도 생각보다 많다. 개입할 때와 개입하지 않아야 할 때를 엄마들도 고민해보아야 한다.

이런 일도 있었다. 며칠 전, 등교 전에 첫째가 친구와 통화하는 걸 들었다. 친구는 첫째에게 같이 가자고 이야기하고 첫째는 혼자 가겠다고 말했다. 한동안 친구의 설득과 첫째의 방어가 지속되었다. 그 자리에 있으면 "세민아 그냥 친구랑 같이 가"라고 말할 것 같아서 자리를 떴다. 아이도 분명 혼자 가고 싶은 이유가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경우에 내가 아이에게 친구와 가라고 말을 했다면 아이에게 이런 메시지를 주는 것과 같다. "네가 혼자 가고 싶은 마음이 들겠지만 참아. 그리고 친구가 원하는 걸 들어줘"라고 말이다. 누군가는 말 한마디에 뭘 그렇게 생각을 하냐고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아이들에게 한마디와 어른들에게 한 마디는 완전히 다르다. 무뎌진 어른들은 대부분의 말을 흘려듣는 반면, 아이들은 예리한 감각으로 한 마디, 한 마디에 영향을 받는다.  '니 욕구를 참고 다른 사람을 배려해'라는 메시지를 반복적으로 받은 아이는 점점 자신의 감정을 알아차리기 힘든 아이로 자라날 것이다. 오히려 배려가 편한 나처럼 말이다.   


과한 배려를 하지 않아야 하는 이유


내가 공손하게 하면 상대도 공손하게 할 것이라는 예상을 할 때가 있다. 정확히 말하면 상대도 배려하길 바라서 먼저 배려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삶은 그렇게 호락호락하지 않다. 지구는 넓고 사람들은 다양하다. 그래서 배려를 대하는 자세는 사람마다 다르다. 나의 배려를 당연하지 않게 생각해서, 다시 나를 배려해 주는 사람이 있는 반면, 나의 배려를 보고 만만하게 보는 사람들이 있다. 스무 살 때 친구와 이야기를 나눈 적이 있다. 나는 "강한 사람이 친절할 수 있는 거야"라고 말했고, 친구는 "무언가를 바라니까 친절해지는 거야"라고 말했다. 누가 맞고 틀리다는 없다. 우리는 각자의 경험에 따라 그때 나에게 필요한 신념을 선택했을 뿐이다. 하지만 나는 이 대화로 분명히 배울 수 있었다. 서로를 위해 베풀었던 친절이 누군가에게는 약한 모습으로 비칠 수 있다는 말이다. 상식이라는 건 사람에 따라 기준이 달라진다. 배려가 좋다는 건 모두 내 기준이다. 배려의 방법도, 배려의 시기도, 배려의 정도도 상대에 따라 다 달라진다. 


개입해야 할 때와 개입하지 않아야 할 때 


개입해야 할 때와 개입하지 않아야 할 때의 기준은 늘 주관적이다. 이 또한 사람에 따라 달라지기 때문이다. 이 쯤되면 엄마가 개입해서 저지를 해줘야 할 것 같은데 하지 않는 엄마가 있고, 알아차리는 순간 아이에게 알려주는 엄마가 있다. 사실 나는 후자의 엄마와 함께할 때 훨씬 편안하다. 그래서 자꾸 개입을 하게 된다. 개입하는 엄마가 좋다는 생각을 해서다. 하지만 아이의 입장에서는 어떤 상황이 더 나은지 생각해봐야 할 문제이기도 하다. 나는 '낄끼빠빠' , '알잘딱깔센'이 단어들을 들을 때마다 실전철학 같다는 생각이 든다. 실전철학이란 이론이 아니라 실제 삶에서 이루어지는 철학이라는 뜻으로 방금 사용해 본 단어다. 중용을 아는 자세야말로 '낄끼빠빠'가 아닐까. 육아를 할 때 엄마들은 '낄끼빠빠빠빠빠빠'의 자세로 개입하며 현명하게 대처해야 할 것이다.'빠빠빠빠'가 오히려 참 어렵다. 


엄마의 배려의 물동이


엄마의 배려의 물동이는 반정도 차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내 배려의 물동이가 과한지, 부족한지 한 번쯤 점검해보아야 하는 일이다. 내 과한 배려가 아이의 독립성과 고유성을 헤칠 수도 있다. 과유불급이라고 했다. 과한 것은 미치지 못함과 같다는 이야기다. 그런데 가끔 육아를 할 때는 과한 것보다 미치지 못하는 것이 낫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다르게 말하면 에고가 강한 엄마가 아이를 더 망치는 경향이 있는 듯하다. 에고라는 적이라는 책에서 저자인 라이언 홀리데이는 '자기 자신이 가장 중요한 존재라고 믿는 건강하지 못한 믿음'이라고 에고를 설명했다. 엄마가 에고가 강하면 아이보다 자신의 생각이 앞선다. '아이는 무지한 존재야. 그러니 내가 알려줘야 해. 나는 다 알고 있으니까'라고 생각하며 아이의 생각에 계속 개입한다. 엄마가 많이 개입한 아이들은 딱 엄마만큼 생각하며 자라난다. 이것이 내가 경계해야 하는 부분이기도 하다. 배려가 몸에 베여있는 엄마의 태도가 아이들에게 닿지 않을 리 없다. 분명 아이를 과하게 챙기는 면이 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적당히 배려하는 엄마가 되기 위해 스스로를 경계한다. 타고나길 적당히 놓아두는 엄마가 되지 못해서 나를 점검하는 편이다. 그래서 타고나게 적당히 배려할 수 있는 사람들이 부러워지기도 한다. 하지만 나는 안다. 이렇게 경계하고 노력하다 보면 어느새 적당히 개입하는 엄마가 되어있을 것이라는 것을. 어떤 사람이 되기 위해 노력해 본 사람들은 안다. 노력하다 보면 가능하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오늘도 내 배려의 물동이를 점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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