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정의 물동이
우리 집은 칭찬의 평균이 낮다. 그래서 쉽게 서로의 인정욕구를 채워준다.
인정욕구
지난 일요일, 아이들이 일어나서 볶음밥과 네모나게 썰어놓은 당근, 오이스틱을 모두 다 먹었다. "너희 진짜 야채를 좋아하네~다음에 또 해줄게"라고 말했다. 그리고 남편이 지나가자 "아침에 아이들 밥 싹 다 먹었어~ 당근이랑 오이도 많이 먹었고"라고 말했다. 그러자 남편이 "와... 진짜? 우리 아이들은 야채도 잘 먹네"라고 말한다. 아이들은 딴청을 피우지만 우리 부부의 말을 모두 듣고 있다. 이렇게 인정욕구는 오이를 잘 먹는.. 사소한 일로도 채울 수 있다. 대단한 것으로 칭찬해야 인정욕구가 채워질 것 같지만 의외로 별거 아닌 것에 뿌듯해지기도 한다. 사소한 칭찬을 들어본 사람은 안다. 직접적인 칭찬이 아니어도 된다. 우리는 가끔 다른 사람들에게 전해 들은 칭찬에서 더 뿌듯함을 느끼기도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도 마찬가지다. 부모들의 대화 속에서 뿌듯함을 느낀다. 음식을 골고루 잘 먹다고 칭찬받으면 아이들이 자신이 먹는 것에 알게 모르게 신경을 쓴다. 둘째는 가끔 "엄마, 이건 건강한 거야?"라고 물어본다. 은연중에 건강한 식재료를 신경 썼던 엄마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물론 실제로는 아주 건강하게 먹이지는 못한다. 하지만 아이들은 나에게 자신이 먹는 것을 한번 더 생각하는 습관을 배운 듯하다.
삶의 만족도에 중요한 것
"너희는 좋겠다. 좋은 아빠 만나서"
"엄마는 참 잘한 것 같아. 좋은 아빠를 선택했잖아"
내가 실제로 아이들 앞에서 하는 말이다. 이 말을 하면 대부분의 엄마들은 '그것도 쿵짝이 맞아야지!'라고 말한다. 정말 맞는 말이다. 괜히 칭찬해 주었다가 과하게 우쭐될 남편이 상상되어해 주기 싫다는 엄마도 있었다. 이쯤에서 불편한 말을 좀 하자면, 나는 남편과 쿵짝이 맞기 위해 많은 노력을 했다. 남편과 대화가 통하기 위해 신혼 때부터 노력해 온 것이 있는데 그 이야기는 옆길로 새니 다음 글에 담아보겠다. 아무튼 위에 말한 두 가지 칭찬은 일타이피다. 오늘 그대로 남편을 칭찬해 봐도 효과가 있을 것이다. 남편에게는 좋은 아빠가 되기 위한 동기부여가 되어 좋고 아이들이 아빠에게 고마워할 수 있는 기회가 되어 좋다. 부부가 서로를 존경하고 칭찬해야 한다는 말은 정말 중요한 말이다. 부모가 서로를 욕하는 것은 아이를 욕하는 것과 같기 때문이다. 남편을 비난하면 아이들은 알게 모르게 나 자신이 비난받은 것 같은 느낌이 들기도 한다. 혹은 엄마를 따라 아빠를 비난하거나 그 반대상황이 되며 죄책감을 느낀다. 그러다 점점 무뎌져 부모를 무시한다. 사람은 누구나 그런 가정에서 인정욕구를 채울 수 없다. 인정욕구를 채울 수 없는 공간에서 우리는 절대로 행복할 수 없다. 예전에 그림책 '강아지똥'을 읽은 적이 있다. 이 그림책을 읽으면 그렇게 눈물이 났다. 강아지똥이 자신을 하찮게 여기는 주변들 사이에서 자신의 존재와 쓸모에 대해 생각해 나가는 이야기다. 강아지똥도 이렇게 자신의 쓸모를 찾아 헤매는데 사람이라고 그렇지 않을까? 내가 누군가를 함부로 대한 적은 없는지 돌아보기도 하고, 내가 강아지똥처럼 쓸모를 찾아다닌 적은 없는지 떠올려보는 시간이 되었다.
누구나 나에게 만족할 수 있다.
인정의 물동이는 내가 채워 줄 수 있다.
마음공부를 하다 보면 지금 이 자리에서 행복해지라고 말한다. 처음에는 그 말이 참 어려웠다. 그런데 그때는 이 말의 모순을 이해하지 못해서 어려웠던 것 같다. 이 자리에서 행복해지라는 말은 내 안의 부정성과 싸워서 이기는 것이라고 나는 이해했다. 누군가에게는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것이 식은 죽 먹기처럼 쉽겠지만 누군가는 자신 안의 회의주의와 싸워야 할 수도 있고, 누군가는 자신 안의 허무와 싸우고, 무기력과 싸워야 행복해질 수도 있는 것이다. 내 안의 나(에고)를 극복할 때 만족을 쟁취할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러나 이것은 외부의 상황이 아니라 , 나를 바꾸면 되는 것이니 지금 당장 행복해질 수 있다는 말과 같다. 그래서 나는, 나를 이해해 주기를 시작하며 지금 당장 행복해지기를 선택했다. 방향을 틀면 행복이다. 우리는 너무 완벽한 종착지를 꿈꾼다. 그래서 어제보다 더 나은 나에게 집중하기보다 아직도 부족한 나에게 집중한다.
나와 자주 통화를 하는 언니가 있다. 언니가 과거의 내 모습과 같아서 전화코칭도 자주 했다. (나는 한국코치협회 KAC코치다) 언니에게 지금보다 더 편안한 삶이 있다는 것을 조금 더 명확하게 알려주고 싶었다. 하지만 언니 안에 답이 있기에 초기에는 자세한 이야기를 해줄 수 없었다. 나는 코칭을 통해 언니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고 질문을 던졌다. 그리고 언니는 스스로 답을 찾아갔다. 그 태도가 멋있고 감사했다. 예전에 언니는 미워하는 사람을 매일 떠올리고 반추하는 삶에 빠져있었다. 오랜 대화를 통해 매일매일 조금씩 나아졌지만 언니는 여전히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집중을 했다. 스스로를 자책하며 자신은 하지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내 눈에는 발전하는 언니가 확실히 보였는데 말이다. 하지만 어느 순간 언니가 조금씩 나아지는 부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성장은 빨랐다. 미워하던 사람을 떠올리지 않는 법을 스스로 알아갔고, 엄마에게 고맙다는 마음이 들기 시작했다고 한다. 시선을 바꾸니 스스로를 바라보는 관점이 달라졌다. 어느 날 언니는 나에게 전화해서 "나 정말 좋아졌다. 니 덕분이다. 이 말하려고 전화했다"라는 말을 했다. 너무나 따뜻한 말이었다. 그 말의 여운을 느끼며 전화를 끊었다. 그런데 나는 안다. 고마워하는 언니가 모두 스스로 한 것이라는 걸. 나는 이런 편안한 마음이 있다고 이야기를 하고, 코칭을 제안했을 뿐이다. 그 편안함을 향해 노력한 건 모두 언니의 몫이다. 그리고 그건 참 쉽우면서도 어려운 일이다. 언니의 인정의 물동이에도 물이 차는 소리가 들렸다.
인정의 물동이
요즘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인정을 갈구하는지 모른다. 그 요인을 꼽으라면 누구나 SNS를 꼽을 것이다. 나도 나름대로 열심히 산다고 자부하지만 왜인지 어디 가서 당당하게 이야기할 수는 없다. SNS에는 아이 셋을 키우면서 많은 연봉을 받으면서, 아이 교육도 신경 쓰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그래서 집에서 아이만 키우고 있는 엄마들이나, 일을 하느라 아이를 잘 돌보지 못하는 엄마들이 모두 주눅이 든다. SNS가 없었다면 보지 못했을 '기준'이다. 비교하는 기준이 높아졌다. 아이를 키우면서 날씬한 엄마들이 많고, 육아를 하면서 능력을 펼치는 엄마들이 많다. 그 와중에 진짜를 가려내고 참고(參考)하는 것은 각자 엄마들의 몫이지만 눈앞에서 보이는 것을 부정하기가 참 어렵다. 그럴 때일수록 나에게 집중하는 것이 중요하다. 내 안에서 찾는 것. 내 기준을 가지는 것. 앞으로의 시대에 필수교양과목이 '나만의 기준을 만드는 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기준이 외부로 가 있는 사람은 쉽게 흔들린다. 남을 쉽게 폄하하고, 쉽게 공격하고, 진심이 불편해진다. 내 안에서 힘들게 생각을 잡아간 사람들은 안다.
육아할 때 인정의 물동이가 중요한 이유
인정의 물동이가 가득 찬 사람은 타인의 인정을 갈구하지 않는 다는 것을 발견했다. 기준이 내 안에 있는 사람도 마찬가지였다. 인정의 물동이가 채워져서 태어나는 아이들도 있지만 엄마가 인정과 사랑을 끊임없이 부어줘야 하는 아이도 있다. 하지만 걱정하지 않아도 된다. 인정의 물동이는 가정에서 충분히 편하게 채워줄 수 있다. 그 방법은 아이를 지금 칭찬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태어난 그대로를 인정받을 때 마르지 않는 인정의 물동이를 가지고 사회에 나갈 수 있다. 그래서 장점을 보는 엄마의 눈이 중요하다. 예를 들어 내성적인 아이에게 나서기를 강요하면 이 아이의 인정의 물동이는 비어 간다. 태어난 대로의 나를 긍정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것은 물고기에게 나무에 오르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내성적인 아이들의 빛나는 장점에 집중하면 지금 당장 칭찬할 부분이 무궁무진하다.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빛이 날 때 스스로 필요한 부분을 채워갈 수 있다. 물고기에게 헤엄을 잘 쳐서 멋지다고 칭찬하는 것은 태어난 그대로를 칭찬받는 것과 같다. 편안한 내가 되었을 때 칭찬받는 것, 나는 그것이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첫째 아이는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필요하다. 그래서 새로운 기관에 갈 때마다 적응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렸다. 그런데 사람들은 적응을 빨리 하지 못하면 무언가 잘 못되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냥 다른 것이다. 타고나길 다른 것이다. 첫째 아이는 처음에 적응이 힘들지만 적응하면 나름대로의 속도로 잘하는 아이다. 그래서 충분히 기다려주었다. 그리고 아이에게는 이번에도(초등학교) 잘 적응할 거라고 말해주었다. 걱정하는 아이에게 "그게 뭐 어때서? 누구나 적응하는 시간이 달라. 엄마는 네가 준비가 되면 편하게 적응할 거고, 늘 그렇듯이 잘할 거라는 걸 알고 있어"라고 말해주었다. 늦게 적응하는 것은 정말 아무것도 아니다. 어느 날 첫째 아이가 나에게 말했다. "엄마는 용기를 주는 사람이야" 이 말이 참 고마웠다. 걱정이 되지 않은 건 아니었지만 엄마는 아이를 믿기만 하면 된다. 아이를 믿는다는 건 어렵고도 쉬운 일이다. 1등이 되면 칭찬해 주고, 글씨를 잘 쓰면 칭찬해 주는 것 말고, 있는 그대로의 아이를 칭찬하는 건 중요하다. 못하고 있다면 "너 지금 노력하고 있잖아! 그럼 돼지"라고 아무렇지 않게 말하는 엄마의 말에서 아이는 용기를 얻는다. 시도가 실패가 아닌 과정이라는 걸 경험으로 안다. 나는 그런 엄마가 되기위해 계속 노력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