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의 물동이
'자발적 혼자'라는 말을 종종 사용한다. 맞지 않는 사람들과 있는 공간에서는 나는 기꺼이 '자발적 혼자'가 된다. 그런데 친한 언니는 '자발적 혼자'가 되는 것이 쉽지 않다고 했다. 원하지 않는 사람들이라도 자신을 좋아하지 않으면 힘들다고 했다. 언니에게는 변하지 않는 사랑이 필요한 것 같아서 "언니 옆에는 내가 있어요!"하고 언제나 이야기해주고 있다. 따뜻한 말의 물동이가 가득 채워지면 고독의 물동이가 생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은 싫어, 나 혼자가 좋아!'의 마음이 아닌 '다른 사람도 좋지만 혼자의 시간도 좋아'라는 마음이 생긴다. 싫어서 혼자인 것과 모두 좋지만 혼자인 것은 다르다. 함께도 즐기고, 혼자도 즐기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엄마에게 혼자의 시간이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던 사람들도 엄마가 되고 나면 혼자 있고 싶다는 엄마들의 이야기를 자주 듣는다. '엄마'라고 부르는 소리에서 잠시나마 해방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귀여운 '엄마'라는 말도 분 단위로 들으면 힘들 때가 있다. 아이들이 둘 다 어린이집에 가고 나서 나의 취미는 혼자 카페 가는 것이었다. 일주일에 두 번은 꼭 카페에 혼자 갔다. 집안일 때문에 집중할 수 없었던 독서도 하고, 브런치에 글도 가끔 썼다. 이 시간이 나를 긍정적으로 생각하게 하는데 도움을 주었다. 혼자 머무는 시간은 '나'로 사는데 큰 도움을 준다.
고독에 대해 생각하게 된 계기
부산에 독서모임 '두잇'이라고 있다. 심리학자 스터디, 철학자 스터디도 함께 했던 곳인데 주부들도 꽤 있고 두잇지기님도 친절해서 많은 공부가 되었던 곳이다. 이 모임의 새벽독서모임에서 '고독'에 대해 처음 읽었다. 그때가 한창 고독사가 이슈라서 고독이라는 단어는 왠지 쓸쓸하고 처량한 것으로 느껴졌다. 그때 라르스 스벤젠의《외로움의 철학》이라는 책을 만났다. 독서모임의 좋은 점은 내가 절대 고르지 않을 책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두잇지기님의 추천으로 만난 이 책은 외로움과 고독에 대한 생각을 완전히 바꿔놓기에 충분했다. 외로움을 다각도로 보자 그 뿌리를 다양하게 조명해 보며 나를 돌아볼 수 있었다.
37p 알다시피 상황적 외로움은 외부원인에서 비롯된다.
고질적 외로움은 외부의 변화에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는 점에서
자아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 듯 보인다.
라르스 스벤젠 《외로움의 철학》
이 부분을 읽으며 상황적 외로움은 상황적인 것이라 중요하지 않게 느껴졌다. 상황이 끝나면 끝날 외로움이니까. 문제는 고질적인 외로움, 사람들 사이에 있지만 외롭고, 어떤 행동을 해주지 않아 외로운 것은 내 내부에 있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스스로가 어떤 감정을 해소하지 않으면 상황적 외로움을 만들어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그 '외로움'도 주관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20대 중반정도까지의 나는, 혼자 있는 사람은 외로운 사람이라는 생각을 했었다. 그때의 나는 왜 그런 생각을 했을까?
엄마들의 관계는 어려워
엄마들의 관계는 생각보다 어렵다. 나와 그 사람의 관계뿐 아니라 내 아이와 상대 아이의 관계까지 생각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들끼리는 싸우고 경험하며 배워나갈 수 있다. 하지만 엄마가 개입되면 엄마의 시선으로 아이들을 보게 된다. 그리고 비언어적, 언어적으로 그 시선이 아이들에게 전달된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초등학교에 가고 스스로 다닐 수 있을 때즈음에 엄마들과의 만남은 최소화하고 아이들끼리 만나도록 하였다. 아무리 엄마들끼리 관계가 좋아도 가정마다 육아관이나 교육철학, 가정문화가 다를 수 있기 때문이다. 내 교육관을 지키며 아이를 키워낸다는 것은 외로움을 동반해야 가능한 일이다. 몰려다니면서 나의 기준을 이어가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알았다. 이 시기에 만난 엄마들은 각자가 아이의 기질에 맞는 교육관을 가지고 있다. 아이들끼리의 갈등은 아이들의 몫이다. 아이들은 엄마가 없는 곳에서 더 자유롭게 갈등을 조율해 갈 수 있다. 이런 시기에만 잠시 거리를 유지하면 관계도, 나도 지켜낼 수 있다. 삶의 기준도 마찬가지다. 늘 주변사람들과 몰려다니면 내 기준이 흔들린다. 하이데거는 혼자가 되기 두려워 자신의 결정에 따라 행동하지 않는 것이라고 말했다. 많은 사람이 하는 대로 따라서 사는 것은 타인의 지배를 받고 있다고 보았다. 이렇게 사는 삶을 '그들-자기', '비본래적인 자기'로 불렀다. '본래적인 자기'로 살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는 사람과 함께하면서 서로 영향을 받는다. 내가 한 결정 같지만 그렇지 않은 순간이 더 많다. 매 순간 내가 선택한다는 착각 속에서 빠져나올 때 그들(불특정다수)의 세계에서 벗어나 자신의 세계로 나아갈 수 있다고 한다. ( 참고 : 임선희 글, 최복기 그림 만화《하이데거 존재와 시간》) 그 착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꼭 필요한 시간은 '혼자만의 시간'이다.
그럼에도 혼자가 어렵다면
그럼에도 혼자가 어렵다면 독서를 꼭 권유하고 싶다. 나는 나를 데리고 평생 살아야 한다. 특히 엄마는 남편과 자녀도 데리고 산다. 반대도 마찬가지다. 그들도 나를 데리고 산다. 마음이 튼튼한 나로 살면 어디든 즐거운 발걸음으로 갈 수 있지만, 마음이 약한 나로 살면 작은 돌부리에도 넘어지느라 즐거운 발걸음을 옮기기 어렵다. 그러니 내가 가장 재미있는 주제를 선택해서 독서를 했으면 좋겠다. 나도 고독에 관한 책을 읽고 나니 많은 철학자, 시인들이 '고독'에 대해 이야기했다는 걸 알았다. 이전에는 보이지 않는 세계였다. 이렇게 많은 분들이 말한 고독이라면 한 번쯤 독서를 통해 스스로에게 그 경험을 제공해 주면 어떨까? 나도 독서하는 시간들을 통해 나에게 독서의 세계를 경험시켜 주었다. 아이에게만 좋은 경험을 해주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도 원하는 경험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엄마가 자신의 보호자가 되어 필요한 경험을 자신에게 시켜주고, 앞으로 나아가도록 독려하는 내가 되어야 한다. 나도 이것을 서른일곱에 배우고 지금까지 실천하고 있다.
혼자라도 괜찮다.
나와 맞지 않은 사람과 함께해서 괴롭다면 혼자인 게 낫다. 예전에 나는 혼자를 잘 견디지 못했다. 혼자 있다는 건 내가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어서인 것 같다. 사람들이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한 적도 있다. 그렇다면 상처 준 사람을 원망하면서, 상처를 치료해 줄 사람을 찾으면서 살아야 할까? 물론 그래야만 할 만큼 큰 상처도 있다. 그럴 때는 충분히 원망하고 충분히 도움을 받아야 한다. 하지만 그게 조금 나아졌다면 내가 나의 엄마가 되어, 내가 나의 어른이 되어 나를 보듬어 줘야 한다. "정말 힘들었지? 누구라도 그랬을 거야. 넌 정말 최선을 다했어"라고 말이다. 나는 이 모든 것을 마음성장학교라는 곳에서 공부하면서 배웠다. 김은미 대표님의 언어에 따라 스스로를 위로하고 감싸 안으면서 나를 충분히 안아주었다. 그러자 괜찮아졌다. 누군가 안아주지 않아도 나로서 있는 그대로 괜찮아졌다. 혼자가 어렵다면 그 길을 먼저 간 누군가에게 배우는 것도 나를 위하는 멋진 일이다. 이제 나는 김은미 대표님 덕분에 아이들의 엄마이자, 나 자신의 엄마로 나를 돌보아 가고 있다. 누구나 상처는 있다. 그것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느냐에 따라 각자의 삶은 달라진다. 내 상처를 돌보지 않는 것은 강인한 것이 아니라 나에게 인색한 것일 수도 있다. 각박한 세상 속에서 (하하의 유행어) 나에게까지 인색해질 필요는 없다.
엄마에게 고독의 물동이가 필요한 이유
육아를 하면서 중요한 소양 중 하나는 '일관성'이다. 아이들은 비일관적인 부모의 태도에서 불안과 혼동을 느낀다. 그래서 아이가 안정적으로 자라기 위해 '일관성'이 중요하다. 우리가 누군가와 관계를 하다 보면 상대를 배려하기 위해 내가 세워놓은 기준을 무너뜨릴 때가 많다. 그리고 사람들을 자주 만나다 보면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에게 배려와 양보를 계속 알려주게 된다. 적절한 시기에 배려와 양보를 알려주지 않는 것 또한 부모의 도리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러나 배려와 양보를 강요받은 아이는 자신의 욕구를 무시하고 다른 사람에게 맞추는 것을 배우게 된다.
그러니 엄마가 고독할 수 있어야 한다. 아이들도 친구들과 떨어져 혼자 지내는 시간이 필요하다. 특히 우리 아이들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혹은 감정적 변화가 있는 시기에는 엄마가 민감하게 반응하여 아이들의 감정을 보살필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아이가 컨디션이 좋지 않은데도 "약속했으니까 지켜야지!!"라고 아이에게 말하기보다, 상대 엄마에게 "미안해요. 아이가 컨디션이 좋지 않네요"라고 말하며 조그만 선물 하나 건넬 수 있는 용기가 있어야 한다. 아이의 컨디션이 자주 들쭉날쭉한다면 한동안 약속을 잡지 않는 것도 방법이다. 가정에서 자신을 최우선으로 배려받아본 아이만이 세상에 나가서 스스로를 소중하게 돌보는 아이가 된다. 이것은 아이를 왕처럼 받들어야 한다는 이야기는 절대 아니다. 모든 것에는 정도가 중요하다.
이러한 기준들은 스스로 만들어간 것도 있고, 경험하며 수정한 것도 있고, 유아교육을 배우며 정립해 간 것도 있고, 다양한 관점이 물동이를 채워준 방세영 교수님께 배운 부분도 많다. 하지만 기준을 만드는데 꼭 필요한 시간은 혼자서 다각도로 고민해 보는 시간이었다. 지인에게 물어서 쉽게 답을 찾으려고 하는 것이 아닌 (결론적으로 지인과 나는 다른 성향의 아이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큰 도움이 되지 않을 확률이 높다) 스스로 관련 책도 읽고 전문가 영상도 찾으며 알아보는 것이다. 자신만의 기준을 가지고 혼자 있을 수 있는 용기가 있을 때 우리는 오롯이 자녀에게 집중할 수 있다. 그럴 때 나와 아이에게 맞는 육아관과 교육관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엄마에게 고독의 물동이는 중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