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른이 넘어가고 결혼을 하는 친구들이 많아지면서 관계의 양상이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어떤 친구들은 결혼식 참석여부를 놓고 관계를 끊기도 하고 일생의 큰 행사인 만큼 다양한 관계와 상황을 통한 섭섭함이 있었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가치 차이의 문제지만 그게 내 일이 되면 참 섭섭해진다. 사실 나와 남편은 결혼식 자체에 대해 큰 의미를 두지 않았다. 결혼식은 부모님의 행사라는 생각을 하고 진행한 편이다. 그 과정에서 다양한 일들이 있었지만 다행히 모든 것은 납득되는 공간 안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그 납득되는 이유가 다른 사람 앞에 놓이면 '절대 이해 못할 상황'이 되기도 한다는 걸 요즘 깨달아가고 있다. 물론 다른 사람은 그냥 넘기는 일이 나에게는 '큰 일'이 되는 경우도 있다.
시간이 지나면서 아이를 가진 친구들과 가지지 않은 친구들의 소통장애가 생기기 시작했다. 그 소통의 블랙홀은 아이를 가진 친구들의 배려와 가지지 않은 친구들의 배려가 필요한 공간이었고 이걸 극복한 관계와 잠시 보류 신청을 해둔 관계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렇게 자녀 유무를 뛰어넘고 나면 육아맘들끼리의 리그가 시작된다. 워킹맘은 오히려 소통할 시간이 없어서 괜찮은 경우가 많다. 일만 해도 머리와 몸이 피곤하기 때문이다. 전업맘들의 경우 라이프스타일에 따라 조금씩 나누어지기 시작하는데 라이프스타일에는 육아관, 경제관념, 소비패턴, 남편 직장 등 다양한 이유로 비슷한 친구들끼리 자주 소통을 하게 된다. 물론 이 모든 상황들에는 특별한 배려 없이도 상황을 뛰어넘는 관계가 존재한다.
그리고 자녀 유무나 라이프스타일과 관계없이, 그리고 이유도 없이 적이 생기는 곳이 바로 직장이다. 이건 여성에게만 국한되지 않는다. 남녀노소 누구나 직장에서의 인간관계 문제는 한 번쯤 겪어봤을 것이다. 운이 좋으면 평화로운 조직에 속할 수 있지만 3번 이상 이직해본 사람이라면 한 번쯤은 직장헬을 경험해보았을 확률이 높다. 오죽했으면 '원수는 직장에서'라는 말이 생겨났을까? 직장은 그런 공간이다.
선배 언니들의 말에 의하면 초등학교에 가면서부터 아이를 위한 내 관계가 또 시작된다고 한다. 그동안 붙잡지 못하던 감정의 끈도 '아이를 위해서'라며 모든 게 참아지는 수행과도 같은 시간이라 했다. 그러면서 스스로 성장하는 것 같다고 한다. 아직 초등학교에 들어가지 않아서 그 관문까지 넘기지 못했지만 고작 유치원 보내는 첫째 딸과 어린이집 다니는 둘째 딸이 있는 상황인데도 관계는 참 어렵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관계의 보류
요즘 주변에서 '관계의 보류'를 신청하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다. 대부분 상대방에게 선언은 하지 않지만 일방적으로 서서히 관계를 끊게 되는데 상대가 '아 시간이 좀 필요한 시기구나'라고 이해를 하면 그 관계는 유지될 확률이 높고 '갑자기 얘가 왜 이러지?'라며 이유에 집착하면 그 관계는 끊길 확률이 높다. 보통 이유를 찾을 때 100% 상대의 입장에서 이해할 수 있는 아량은 쉽게 길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대부분 혼자 이유 분석을 하게 되면 기억의 왜곡과 점점 커지는 감정으로 실제 사건보다 더 큰일처럼 느껴질 때가 많다.
(요즘 특히 많이 이루어지는) 주변의 '관계의 보류'를 보면 다양한 이유가 있다. 단순히 갈등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그 양상이 다양하다. 상대에 이유가 있다기보다 스스로가 모든 것이 버거워 보류를 할 수도 있고 입장 차이로 인해 보류할 수도 있다. 예를 들면 A는 서로 자주 봐야 충족이 되지만 B는 육아만 해도 지친다. 이럴 때 B가 '지금은 육아 외 다른 에너지가 없어 '라며 '관계의 보류'를 해버릴 수도 있고 A가 '나만 노력하는 이 관계! 더 이상 지속할 수 없다'라며 관계의 보류를 신청할 수도 있다. 코로나 때문에 팍팍해진 마음도 한 몫하는 것 같다.
코드(code)
결론적으로 이야기하면 이 모든 것을 통합하는 이유는 코드라는 생각이 들었다. 상황적이든, 감정적이든, 생각의 차이든, 유머든. 그리고 코드는 의도가 없다.
최근에 나는 정말 좋은 사람을 만났다. 친해지고 싶고 천천히 알아가고 싶은 관계를 오랜만에 만났는데 문득 이 감정은 나 혼자만의 속도와 감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더 많이 대화할수록 더 많은 오해가 쌓이고 그 오해를 풀고 싶어 든 예로 또 오해가 쌓이는 느낌이 들던 어느 날, 나는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그리고 인정하기 싫지만 내가 친해지고 싶었던 그 관계와는 '코드'가 다르다는 걸 깨달았다. 의도가 없다. 우리는 평소에 너무나 자연스럽게 상대의 행동을 내 식대로 해석을 해버린다. 그 사람을 잘 알기도 전에 모든 걸 파악했다고 생각하면 오해가 생긴다. 코드가 다를 때는 나와 다른 그 공간을 빈 공간으로 두어야 하는데 그걸 해석해버리면 상대를 있는 그대로 보기가 어려워진다. 그건 내가 해석한 상대방이지 상대 그 자체일 수 없다.
나는 특히 대화가 중요한 사람이다. 그리고 오해를 쉽게하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이 불편하다. 나 스스로가 빠르게 판단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도 하고 내가 어떤 것을 속단하려고 하면 생각을 보류하거나, 여러 각도로 생각하려는 편이다. 누군가는 나의 이런 부분이 피곤하게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상대의 의도를 상상하는 것이 더 피곤하게 느껴진다. 그래서 판단 자체를 신중하게 하는 것이 더 생산적이라는 생각을 한다. 물론 이 성격의 단점이 있다. 화날만한 상황도 참았다 터지기도 하고 무례한 사람들에게 선을 넘도록 허용하는 편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런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해서 오해를 하지 않는다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나를 깎아낼지 나를 지켜낼지를 고민하고 있다. 그리고 생각한다. 나도 지켜내고 좋은 관계도 지켜내고 싶다고. 나이가 들어도 관계는 참 어렵다. 이렇게 힘든 날이면 내가 튀어나온 부분과 각이 겹치지 않는 다른 관계로 위로받는다. 아직 미숙해서 슬프다. '관계 어른'은 언제 되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