변화는 반드시 그것을 촉발시키는 원인 반드시 있다
누구에게나 계기가 있다.
그 계기를 기점으로 모든 것이 변한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특정한 부류를 가리지 않고 변화가 일어난다. 어떤 사람이 착하게 변하든 나쁘게 변하든, 그 변화에는 분명한 계기가 있고, 그 계기 뒤에는 명확한 이유가 존재한다. 사물 역시 자연의 섭리나 인간의 개입으로 원형이 변형된다. 이것이 바로 그 이유다. 그 이유를 따라가다 보면, 어떤 사건이 필연적으로 연관되어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그 사건은 일시적일 수도 있지만, 대개는 오랜 기간 지속적이고 반복된 행위를 통해 나타난다. 그렇게 해서 결과적으로 드러나는 현상이 바로 ‘계기’다.
대표적인 예로, 1789년 프랑스 혁명은 경제적 불평등, 계급 갈등, 계몽주의 사상의 확산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 그러나 이를 촉발한 직접적인 계기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 사건이었다. 즉, 어떤 사건이 발생하려면 오랜 시간 원인이 축적되다가 임계점을 넘는 순간, 결정적인 계기가 나타나며 폭발적으로 전개된다.
또 다른 예로, 평생 악한 짓만 하던 사람이 어느 날 갑자기 착한 행동을 시작하거나, 반대로 착하게 살던 사람이 갑작스레 흑화되어 “악한 짓만 골라 할 거야”라는 태도로 변할 수도 있다. 이런 변화는 처음부터 외부로 드러난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내면에서 선과 악의 갈등이 지속된 결과일 것이다. 그 임계점에 도달할 때까지 기다렸던 순간이 있었을 것이고, 어느 날 결심한 뒤부터 행동과 삶 전반에 걸쳐 변화가 나타난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선하거나 악한 결과를 떠나, 왜 그런 일들이 발생했는지 그 원인을 탐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대개 그 원인을 외부에서만 찾으려 한다. 왜 그럴까? 아마도 자신에게는 지나치게 관대하면서, 자신 외의 것에는 엄격한 태도를 취하기 때문일 것이다. ‘자기 객관화’는 우리에게 쉽지 않은 과제다. 자신을 들여다봐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신을 들여다본다는 것은 잘한 것과 잘못한 것을 낱낱이 살펴보는 것을 의미한다. 잘한 것은 드러내고 싶고, 잘못한 것은 감추고 싶은 것이 인간의 본성인데, 그 본성을 거스르려는 욕망 또한 인간의 본성에 속한다. 타고난 본성은 바꿀 수 없다고 하지만, 양육과 환경을 통해 얼마든지 다른 삶을 살 수 있다. 이는 관성처럼 이어지는 삶이기도 하다. 악한 본성을 지녔다 해도, 그 본성을 억누르고 선한 방향을 관성처럼 따라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동서양의 수많은 철학자들이 “인간의 본성은 선한가, 악한가”라는 주제를 두고 논쟁했지만, 결론을 내리지 못했다.
출처: Pexels.comⓒ2023 Gabriel Ramos
그럼에도 인간의 본성이 선한지 악한지가 때로는 중요하지 않을 수도 있다. 인간은 선함과 악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누군가에게는 좋은 사람이지만, 다른 누군가에게는 나쁜 사람일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런 예를 과거에도, 현재에도, 앞으로도 자주 목격하게 될 것이다.
“악의 평범성”을 주장한 한나 아렌트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학살을 주도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재판을 통해 이 개념을 정립했다. 그녀는 아이히만이 특별히 악한 인물이 아니라, 상부의 명령에 따라 행동한 평범한 관료였다는 점에 주목했다. 아이히만은 깊이 생각하지 않고 유대인 학살의 책임을 회피하는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물론 “상부의 명령을 따랐을 뿐”이라는 그의 주장은 설득력을 잃는다. 명령에 대한 비판적 판단이나 순응할 가치가 있는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출처: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 한나 아렌트 지음)
결국,
인간의 삶에서 선과 악, 변화와 본성에 대한 모든 논쟁은 하나의 공통점을 가리킨다. 그것은 바로 ‘계기’의 중요성이다. 계기는 단순한 시작점이 아니라, 오랜 축적 끝에 나타나는 결정적 순간이다. 프랑스 혁명의 바스티유 습격처럼, 혹은 한 개인의 내면에서 터져 나온 전환점처럼, 계기는 우리 삶의 방향을 바꾸는 열쇠다. 그러므로 우리가 무엇이 되든, 어떻게 변하든, 그 계기를 이해하는 것이야말로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첫걸음이 되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