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년이 온다/한강/창비/2014
"흐느낌 사이로 돌림노래처럼 악절과 악절들이 부딪치며 생기는 미묘한 불협화음에 너는 숨죽여 귀를 기울였다. 그렇게 하면 나라란 게 무엇인지 이해해 낼 수 있을 것처럼." P.18
2024년 10월 10일을 한강절이라고 한다. 언어의 장벽으로 쉽게 넘지 못할 듯 보였던 노벨문학상을 한강 작가가 받았다. 이에 출판계가 들썩이고 AI디지털 교과서를 쓴다면 종이책이 어떻게 될까 걱정하는 최근 종이책을 다시 잡아 든 이들이 많아지는 계기가 되었다. 본인도 그중 한 명이다. 작가의 권유대로 자신의 작품 중 우선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 한 이 책 '소년이 온다'를 다시 잡아든다. 전에도 몇 번 집었다가 놓았다가 이사할 때 잃어버려 다시 구입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흰', '여수의 사랑', '작별하지 않는다', '채식주의자'까지. 노벨문학상 작품을 자신의 모국어 원서로 읽을 수 있다는 영광을 놓치고 싶지 않다. 노벨문학상 받는 그 주 책을 구입하기 어려웠지만 이제 수월해졌다. 구입한 책 작가 소개란에 "2024년 한국 최초로 노벨문학상을 수상했다"라는 문구가 씐 걸 보고 우리나라 인쇄업 관련 분들이 늦은 밤까지 고생하며 찍었구나 싶기도 하고, 자본의 힘으로 혹시 건강을 해치며 고생하신 인쇄업자분들은 계시지 않을까 싶기도 하다.
이 책 저자인 한강 작가는 1970년 겨울에 태어났다. 나도 겨울에 태어났는데. 처음에 시로 등단했다. 1993년 <문학과 사회> 겨울호에 시 <서울의 겨울> 외 4편을 발표하고 이듬해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단편소설 <붉은 닻>이 당선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했다. 여전히 현대시를 이해하기가 난해하지만 작가의 시도 관심을 가져야겠다. 그리고 장편소설 <검은 사슴>, <그대의 차가운 손>, <채식주의자>, <바람이 분다, 가라>, <희랍어 시간>, <소년이 온다>, <흰>, 소설집 <여수의 사랑>, <내 여자의 열매>, <노랑무늬영원>까지 이어진다. 제주 4.3을 다룬 최근작 <작별하지 않는다>까지. 앞으로 읽어볼 책이 많아 반갑다. 그래서 학교 도서관 한강 작가 도서를 검색해 보았는데 한 권도 없었다. 그래서 바로 구입했다. 초반과 달리 그래 출판사는 그리 밀리지는 않았다. 다 출판업계와 인쇄업체 분들의 노고다. 노벨문학상 수상 소식을 접하고도 요란스럽지 않고 덤덤하게 그리고 차분하게 말하는 모습과 문학적인 소감문에 더 감동해 이곳에 기록한다. 그 음색과 결이 고스란히 전해지고, 낭독 아니 당시 분위기가 전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현장 분위기를 글로 묘사하고 표현하는 것도 능력이리라. 그게 안 되면 유튜브로 봐야 할까.
원래 이틀 전으로 기자회견이 예정되어 있었는데, 그것을 진행했다면 이렇게 많은 분들이 걸음 하지 않으셨어도 되고, 이 자리를 준비하신 분들께도 이만큼 폐가 되지 않았을 것 같아 죄송한 마음입니다. 이렇게 찾아와 주셨으니, 허락해 주신다면 수상소감을 말씀드리기에 앞서 간략하게나마, 아마도 궁금해하셨을 말씀들을 취재진 여러분께 잠시 드리겠습니다.
노벨 위원회에서 수상 통보를 막 받았을 때에는 사실 현실감이 들지는 않아서 그저 침착하게 대화를 나누려고만 했습니다. 전화를 끊고 언론 보도까지 확인하자 그때에야 현실감이 들었습니다. 무척 기쁘고 감사한 일이어서, 그날 밤 조용히 자축을 하였습니다. 그 후 지금까지 많은 분들이 진심으로 따뜻한 축하를 해주셨습니다. 그토록 많은 분들이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주셨던 지난 일주일이 저에게는 특별한 감동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한편으로 이후 제 개인적 삶의 고요에 대해 걱정해 주신 분들도 있었는데, 그렇게 세심히 살펴주신 마음들에도 감사드립니다. 저의 일상이 이전과 그리 달라지지 않기를 저는 믿고 바랍니다. 저는 제가 쓰는 글을 통해 세상과 연결되는 사람이니,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계속 써가면서 책 속에서 독자들을 만나고 싶습니다. 지금은 올봄부터 써온 소설 한 편을 완성하려고 애써보고 있습니다. 바라건대 내년 상반기에 신작으로 만날 수 있으면 좋겠지만, 소설을 완성하는 시점을 스스로 예측하면 늘 틀리곤 했기에, 정확한 시기를 확정 지어 말씀드리기는 어려운 상황이라는 말씀을 드립니다.
마지막으로, 조금 늦은 감이 있지만 이제부터는 저와 연결되는 통로를 통일하여서 모든 혼란과 수고, 제 주변 사람들의 부담을 없애고자 합니다. 제가 출간한 책들에 관련된 일들은 판권을 가진 해당 출판사에 부탁드리고, 그 카테고리에 잡히지 않는 모든 일들은 문학동네 담담 편집자의 이메일로 창구를 일원화하겠으니 부디 참고 부탁드립니다.
이제, 이 자리를 위해 준비해 온 수상소감을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저는 술을 못 마십니다. 최근에는 건강을 생각해 커피를 비롯한 모든 카페인도 끊었습니다. 좋아했던 여행도 이제는 거의 하지 않습니다. 다시 말해 저는, 무슨 재미로 사느냐는 질문을 종종 받는 사람입니다. 대신 걷는 것을 좋아합니다. 아무리 읽어도 다 따라잡을 수 없을 만큼 쏟아져 나오는 좋은 책들을 놓치지 않고 읽으려 시도하지만, 읽은 책들만큼이나 아직 못 읽은 책들이 함께 꽂혀 있는 저의 책장을 좋아합니다. 사랑하는 가족과, 다정한 친구들과 웃음과 농담을 나누는 하루하루를 좋아합니다.
그렇게 담담한 일상 속에서 제가 가장 좋아하는 것은 쓰고 싶은 소설을 마음속에서 굴리는 시간입니다. 아직 쓰지 않은 소설의 윤곽을 상상하고, 떠오르는 대로 조금 써보기도 하고, 쓰는 분량보다 지운 분량이 많을 만큼 지우기도 하고, 제가 쓰려는 인물들을 알아가기 위해 여러 방법으로 노력하는 과정을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설을 막상 쓰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길을 잃기도 하고, 모퉁이를 돌아 예상치 못한 곳으로 들어설 때 스스로 놀라게도 되지만, 먼 길을 우회해 마침내 완성을 위해 나아갈 때의 기쁨은 큽니다. 저는 1994년 1월에 첫 소설을 발표했으니, 올해는 그렇게 글을 써온 지 꼭 삼십 년이 되는 해입니다.
이상한 일은, 지난 삼십 년 동안 제가 나름으로 성실히 살아내려 애썼던 현실의 삶을 돌아보면 마치 한 줌의 모래처럼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는 듯 짧게 느껴지는 반면, 글을 쓰며 보낸 시간은 마치 삼십 년의 곱절은 되는 듯 길게, 전류가 흐르는 듯 생생하게 느껴진다는 것입니다.
약 한 달 뒤에 저는 만 54세가 됩니다. 통설에 따라 작가들의 황금기가 보통 50세에서 60세라고 가정한다면 6년이 남은 셈입니다. 물론 70세, 80세까지 현역으로 활동하는 작가들도 있지만 그것은 여러모로 행운이 따라야 하는 일이니, 일단 앞으로 6년 동안은 지금 마음속에서 굴리고 있는 책 세 권을 쓰는 일에 몰두하고 싶습니다. 물론, 그렇게 쓰다 보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그 6년 동안 다른 쓰고 싶은 책들이 생각나, 어쩌면 살아 있는 한 언제까지나 세 권씩 앞에 밀려 있는 상상 속 책들을 생각하다 제대로 죽지도 못할 거라는 불길한 예감이 들지만 말입니다.
다만 그 과정에서 참을성과 끈기를 잃지 않기를 희망하고 있습니다. 동시에 일상의 삶을 침착하게 보살피는 균형을 잡아보고 싶습니다.
지난 삼십 년의 시간 동안 저의 책들과 연결되어 주신 소중한 문학 독자들께, 어려움 속에서 문학 출판을 이어가고 계시는 모든 출판계 종사자 여러분과 서점인들께, 그리고 동료, 선후배 작가들께 감사를 전합니다. 가족과 친구들에게는 다정한 인사를 건넵니다. 저를 수상자로 선정해 주신 분들과 포니정재단의 여러분께 깊은 감사를 드립니다.
<소년이 온다>라는 작품 역시 스웨덴 한림원에서 한강의 작품 세계를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 산문”이라고 표현한 선정 이유를 알 수 있다. 1980년 5월 18일 광주민주화운동에 참가했던 당시 실제 인물을 모델로 한 주인공 동호와 그와 함께 한 이들의 이야기이다. 인간이 얼마나 잔인한 존재인지, 존엄한 존재인지를 양극단의 모습을 통해 다룬다. 애국가를 부르며 시위하는 일반 시민들을 무차별한 폭력으로 진압하는 잔인한 모습과 거기에 희생당한 이들을 위해 헌혈을 하고, 시신을 수습하는 일을 도왔던 이들의 존엄한 모습 사이에서 작가는 혼란스러웠고 어떤 게 진정한 인간의 모습일지를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 한다.
"네가 죽은 뒤 장례식을 치르지 못해, 내 삶이 장례식이 되었다. 나는 싸우고 있습니다. 날마다 혼자서 싸웁니다. 살아남았다는 아직도 살아 있다는 치욕과 싸웁니다. 내가 인간이라는 사실과 싸웁니다. 오직 죽음만이 그 사실로부터 앞당겨 벗어날 유일한 길이란 생각과 싸웁니다. 선생은 나와 같은 인간인 선생은 어떤 대답을 나에게 해줄 수 있습니까?"
"이제 당신이 나를 이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당신이 나를 밝은 쪽으로, 빛이 비치는 쪽으로, 꽃이 핀 쪽으로 끌고 가기를 바랍니다." p.213
어쩌면 이 책은 증언문학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적 트라우마는 사라지는게 아니라 잠시 어딘가에 숨어있는지도 모른다. 소설 속 주인공 형의 말처럼 "허락이요? 물론 허락합니다. 대신 잘 써주셔야 합니다. 제대로 써야 합니다. 아무도 내 동생을 더이상 모독할 수 없도록 써주세요."말과, 현재 생존하신 주인공 어머님이 광주문화방송에서 나와 <소년이 온다>라는 책을 들고 나와 억울하지 않게 해주었다고,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한 행동을 오해하는 사람이 없게 해주었다고. 그것도 이제 전세계사람들에게 밝혀 주었다는 말, 주인공 아버지께서 이 책을 밑줄 그으면 읽었던 책의 흔적이 떠오른다. 이 책을 다시 읽으려다 그만두었다. 작가도 이 책을 쓰면서 너무 아팠다고 했지만, 읽는 이들도 마음 준비를 충분히 해야하는 소설이다. 다음 책 제주4.3을 이야기한 <작별하지 않는다>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 읽어야겠다. '달은 밤의 눈동자라고 했다'처럼 시적인 문장이 자주 등장한다. 작가가 시인으로 등단했던 영향도 있을 것이다. 또 책 곳곳에서 너무 충격적인 폭력의 묘사가 나온다. 이러한 충격과 아픔으로 책을읽는 것을 멈추게하는 역사적 사실을 바탕으로 한 산문적 증언으로 쓴 책이다. 인간의 대한 예의를 위해 있어야 할 인간의 혼과 역사를 배우며 살아남은 자들의 양심을 듣고 싶은 이들에게 이 책을 추천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