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모님이 없이 맞이하는 두 번째 어버이날
양친이 두 분 다 돌아가신 지 어느덧 2년이 되어간다. 재작년에 어머니를 여의고 나서 맞이하는 두 번째다. 여기저기서 어버이날이라 바쁘게 선물을 준비하고 챙긴다. 아버지는 돌아가신 지 이제 십여 년이 되어간다. 애석하게도 십여 년 전에 나는 아버지보다 덜 벌었고 딱히 좋은 선물을 해줄 능력이 되지 않았다. 그 시절 엄마 아빠에게 선물을 드리면 돈 아깝게 뭐 사지 말라고 했었다. 그 보다 좀 더 어렸던 20대 중반 즈음에는 성인이 된 자식임에도 불구하고 꽃밖에 못 드렸는대도 좋아하셨다. 그렇다. 엄마나 아빠는 나에게 딱히 자녀들에게 그다지 바라는 게 많지 않은 부모였다. 심지어 아빠가 살아있을 때 까지는 그래도 일방적으로 받는 입장이었다. 형편이 좋아서 그런 것도 아니었다. 그냥 그런 분들이었다. 지금은 나도 남들처럼 유행하는 현금 케이크도 할 수 있고 용돈도 드릴 나이가 되니까 안 계시다. 인생은 참 아이러니하다. 그래서 원래 효도를 미루지 말라고 하나보다. 잘해주고 싶은 만큼의 능력이 되니 부모님은 안 계신다.
얼마 전에 심리검사를 받은 적이 있는데 나는 소위 자존감이라 볼 수 있는 자기애와 이성 지표가 높게 나왔다. 내가 이 나이까지 나 자신을 사랑하고 잘 살 수 있게 만든 것은 부모님의 영향이 크다고 생각한다. 인생을 살면서 내가 그 무엇을 해도 오롯이 나를 사랑해 주는, 나의 선택을 지지하고 의심하지 않은 그리고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을 거라는 신뢰를 갖고 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굉장한 축복이다. 어린 시절에는 몰랐다. 으레 부모가 있다면 아니 부모여부와 상관없이 누구에게나 주어주는 기본 옵션 같은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내가 나이가 들고 세상을 알아가면서 세상에 당연한 것은 없다. 그런 사람을 만나는 것은 내 좋은 운이었다. 스웨덴에 살 때 나는 현재의 배우자를 만나기 전 다른 사람과 동거를 했었다. 스웨덴을 홀연 떠날 때도 엄마는 걱정이 한가득이었지만 최종적으로 나를 믿어줬다 일 년이 좀 지나서 어렵게 그 사람과 헤어졌다고 엄마에게 전했을 때에는 “사람이 살다 보면 헤어질 수 도있지 원래 사람은 만났다가 헤어지기도 하는 거야”라고 하는 엄마가 고마웠다. 그리고 몇 년이 흘러 지금의 배우자를 이 먼 이국땅에서 만났다고 했을 때 엄마는 여느 엄마처럼 “몇 살이니?” “직업이 뭐니?” 대신 “그 사람은 널 많이 사랑하니?” “너는 그 사람 사랑하고?” “그리고 행복하니?’ 그럼 됐다라고 하셨다. 그때 참 우리 엄마가 우리 엄마여서 좋았다. 70이 넘은 나이에도 보이지 않은 가치가 소중하다고 말해주는 엄마를 만나서 나도 내면이 가난하지 않게 자랐었다고 생각했다.
반면에 엄마나 아빠가 우리를 위해 너무 희생하고 참고 고생하고 산 것 역시 잘 안다. 내가 자녀가 없는 삶을 선택하게 만든 이유이기도 하다. 부모는 중요한 순간에도 화내지 않아야 하고 고통도 잘 참고 모든 것을 희생한다는 이미지가 나에겐 너무 강하다. 나는 그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내가 성인이 되고 해외 나와서 누군가랑 살면서 느낀 나 자신은 나는 꽤 예민한 사람이고 무언가를 책임져야 하는 순간에 그걸 외면할 수도 없고 책임감이 주어지면 외면 못하는 성격 상 어려워도 그걸 꾸역꾸역 할 것이며 그 과정에서 나는 스트레스를 매우 받을 것이다. 자녀는 일정 이상 부모의 희생 없이 자랄 수 없다는 것을 비교적 아동복지가 잘 된 스웨덴에서조차 사회적으로 육아를 함께하는 나라에서조차 외면할 수 없는 현실인 것을 보고 더 없어졌다. 어느 날 스웨덴 회사를 다니던 시절 우리 팀은 반은 기혼 반은 미혼이었다 당시 기혼인 사람들에게 언제로 돌아가고 싶냐는 질문에 전부다 우리 아이를 매우 사랑하고 소중하지만 선택할 수 있다면 아이가 없는 시절로 가고 싶다고 했다. 나는 적잖게 충격이었다 비교적 타 국가에 비하여 육아가 쉽다는 스웨덴에서조차 이렇다니 말이다. 나는 자기희생적인 사람이 못되고 표면을 어떻게 매만져도 자기가 가장 소중한 사람임을 잘 알아서 선택하기 힘들었다.
어차피 인생에서 그 누구든 한 가지 선택밖에 하지 못한다 자녀가 있거나 없거나 그리고 상대방들은 서로의 감정에 대해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나는 다른 방향의 인생을 선택하면서 평생 아마도 부모님의 마음의 반의 반도 이해하지 못할 거다. 우리 아빠는 내가 30살이 될 때까지도 항상 “너 4살 때 진짜 이뻤다”라는 이야기를 했었다 돌아오지 않은 그 시간을 추억하면서 이뻐했다. 병석에 누워 돌아가시기 한 달 전까지 그 이야길 하셨다. 나는 그 감정을 아마도 평생 모를 것이다. 그리고 그 시절 내가 항상 미뤄놨던 효도는 난 이제 평생 할 수 없다. 남들이 돈 걱정하는 어버이날에 선물 마련할 돈 걱정을 못하는 내가 조금 슬프다. 지나간 시간은 항상 이런 식으로 돌아오지 않는다. 사람은 오늘이 젤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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