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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육아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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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언유주 Nov 08. 2020

28. 그렇게 애쓰지 않아도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야.

착한사람 컴플렉스 벗어나기

아이가 떼쓰는 동안 부모는 아이의 감정에 공감해주고 허용되는 대안을 제시하되, 아이 스스로 마음을 가라앉히게 한다. 부모는 아이가 마음 상해할 때마다 매번 기분을 풀어주려 해서는 안 된다. 아이는 평온-분노-평온 사이클을 온전히 경험해볼 필요가 있다.


<미운 네 살, 심플 훈육법> p.102 - 피터 L.스타비노하, 세라 오




처음에 나는 하레가 우는 상황들을 최대한 '없애려고' 했다.

아이가 울면 재빠르게 원하는 걸 들어주고 문제를 해결한 뒤, '웃게' 만들었다.

그리고 나는 이런 일을 아주 잘했다.


엄마, 아빠가 이혼한 직후, 지독하게 불행한 하레의 모습을 보는 게 너무나 고통스러웠던 나머지 앞으로는 '꽃 길만 걷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곧 이것이 절대 아이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유아의 본분은 세상을 탐구하고 경험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이가 다양한 감정을 경험하고 배워 나가는 동안 내가 '끼어들어' 하레의 온전한 경험과 배움을 방해해서는 안된다.

엄청나게 무서운 짓을 '아이를 위해서'라며 하고 있었구나, 하고 소스라치게 놀랐다.


다행히도 나는 감정을 제대로 다루는 방법을 모를 때  치러야 할 대가가 얼마나 큰지를 잘 알기에 하레에게 대물림하고 싶지 않은 강한 의지만은 갖고 있었다.

아이를 때로는 '울게 두어야 한다'는 걸 깨달았다.

감정을 스스로 조절할 수 있을 때까지 아이는 울면서 바닥을 뒹굴면서 크는 것이다,를 나 스스로 먼저 이해해야만 했다.





어린이집을 마치고 날씨가 좋아서 하레가 좋아하는 생태 공원에 갔다.  

준비해간 식빵 조각으로 잉어에게 먹이를 주면서 하레는 신이 났다.

'아가'가 먹어야 하는데, '커다(큰 잉어)'가 먹었다고 안타까워 하면서.

방글방글 웃으면서 잘 놀던 하레는 '뱀조심' 표지판을 보더니 '공룡 뱀 (큰 뱀)'이 있다며 저기 가보자고 한다.


야트막한 산길을 계단으로 올라가야 하는 곳이라 '손을 잡고 걸어가자'고 했더니, 하레는 내 다리에 매달리며 '안아'라고 했다.

"하레야, 고모가 가방들고 하레 안고 가면 어깨 '아야'해서 못 올라가. 힘들어.  하레가 걸어 가야돼."해도 계속 막무가내로 매달리며 칭얼거리기 시작했다.

하레가 좀 진정되고 나서 왜 안으라고 하냐고 물어보니, 뱀이 와서 자기 발을 '앙' 깨물면 아파서 안된다고 했다.


'자신의 한계를 모르는 좋은 사람'이었을 시절의 나라면 '아이가 가고 싶다'고 하니 어린이집 배낭, 물과 물티슈등이 든 플라스틱 가방에 하레까지 이고 지고 그 계단을 기어코 올라갔을 것 같다.

내려와서는 팔다리를 발발 떨면서 내 몸이 아프더라도 온갖 통증들을 '무시'하며, 이 한 몸 기꺼이 불 살랐을거다.


하지만 이번엔 그러지 않았다.

나를 위해서, 그리고 하레를 잘 돌보기 위해서라도 '내 체력'을 관리하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이제는 알기 때문이다.


하레가 스스로 걸어가지 않으면 갈 수 없다,고 하자 하레는 결국 '안가기'로 선택했다.

자전거를 타고 집으로 가는 길,  하레는 뒷자리에 앉아서 "엄마야~ 아빠야~ 아가야~ 곤농야~ 하자~~~?"하면서 '나중에 엄마(고모),아빠랑 나랑 같이 공룡 뱀을 보러가자!'고 조잘조잘 말했다.

여전히 해상도는 낮지만 하레와 이야기를 나누며 아이의 내면세계를 들여다 보는 것이 일상의 쏠쏠한 재미다.

잘 놀다가도 갑자기 말을 안듣고, 툭하면 울기 일쑤지만, 그게 4살 아이의 '가장 자연스러운 모습'이라고 생각하고 그저 담담히 바라본다.




아동학대의 가장 해롭고 끈질긴 병폐는 '자신의 인식을 의심하게 되는 일'이라고 한다.

'엄마'란 존재는 곧 세상을 대변하는 잣대, 현실 확인의 척도가 되는데, 엄마의 눈에 비친 내가 '내가 생각한 나'와 다르다면 나 자신의 인식에 의구심을 갖게 된다고 한다.


하레도 가끔 어떤 행동을 하기 전에, 혹은 하면서 내 얼굴에 나타나는 감정을 살피며 그 일을 해도 되는지, 안되는지를 살피는 보조기구로 나를 '사용'한다는 느낌을 많이 받았다.

나 자신도 아직 성장해 나가고 있는 미숙한 존재로 항상 '정확한' 잣대를 제공해줄 수는 없겠지만, 최소한 우리 엄마처럼 아이의 자의식을 왜곡시키고, 심지어 파괴시키는 이상한 잣대를 주지 않도록 나 스스로를 더욱 잘 돌보며 하레에게 좋은 롤모델이 되어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을 느낀다.


내가 어려서부터 엄마에게 지속적으로 주입받은 메시지는, "니가 아무리 기를 쓰고 노력해도,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다 너보다 나아."였다.

다른 집 애들은 어쩜 그렇게 다들 똑똑하고, 돈도 잘 모으고, 자기 엄마한테도 잘하는지.

너도 좀 보고 배우라는 듯이 은근한 책망을 담아 나에게 그저 '이웃의 근황'이라도 전하는 듯이 이야기하곤 했다.

심지어는 이웃의 아들인 다 커서 여전히 자기 엄마집에 얹혀사는 갓 출소한 전과자보다도 내가 못하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그가 나보다 '잘한'일은 자기 '엄마랑 같이 산다'는 거, 그거 하나였는데도.


우리 엄마 말에 의하면 나는 세상 모든 사람보다 못생기고, 제대로 할 줄 아는 것도 없고, 게으르고, 몸도 약하고, 냉정하고, 차갑고, 웃지 않는 애였다.

어찌나 못생겼던지 내가 아기였을때는 데리고 다니기도, 남 앞에 내보이기 부끄러웠다고 한다.


진짜일까?하는 의문조차 갖지 못하고 엄마가 나에게 주입시킨 그 모든 걸 그대로 다 받아들여 내면화시켰던 나의 자아상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한 건 이십대 후반이 되어서였다. 

정말?

진짜로 내가 엄마가 말한 '그런' 사람이야?

사람들은 나보고 똑똑하고, 매력있고, 부지런하고, 밝고, 쾌활하고, 얼굴에 항상 웃음이 묻어 있다고 말하던데?


그래도 여전히 사람들보다 엄마의 말을 더 믿었다.

그래, 그럴리가 없어.

내가 그런 사람일리 없잖아.

저 사람이 나를 잘 몰라서 그래.

내 정체가 들킬까봐 두렵다.

들키지 않기 위해선 더 철저하게 노력하는 수밖에.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진정으로 가까워지는 일이 늘 두려웠고, 항상 어느 정도 경계태세를 갖춘채 '좋은 사람' 가면을 뒤집어 쓰고 있었다.

더 밝게, 더 쾌활하게.

집에 돌아와서야 가면을 벗어놓고 끝도 없는 우울과 어둠의 심연으로 홀로 가라앉곤 했다.

가면속에 있는 진짜 얼굴이 누군지 스스로도 정확하게 모른채.


사람들이 나를 '칭찬'하거나, '와!!'하고 감탄하지 않으면 성에 차지 않았다.

그래서 더더욱 일에서든, 연애에서든, 인간관계에서든 모든 상황에서 쓸데없이 기를 쓰고 인정을 받으려고 노력했다.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인데도 나에게 데면데면하게 굴면, 끝까지 살갑게 굴어 눈빛이 달라지는 걸 느낀 뒤, "이제 됐어!"하고 돌아서기도 했다. 그 사람은 한순간에 냉정해진 나를 보며 의아해하는 걸 느꼈지만, 나에겐 모든 게 '인정받기 게임'일 뿐이었고 그저 '이기고' 싶었다.


나는 상대가 누구든 그 사람을 빠르게 파악하고, 거의 그 사람이 원하는 그대로의 '필요한' 모습으로 변신할 수 있었다.

마치 카멜레온처럼.

엄마 밑에서 살아남기 위해 내가 터득한 생존 기술이 그것밖에 없었다.




"다른 사람이랑 같이 있을 때는 어쩔 수 없이 그렇게 돼요. 밝기 조절이 안 되는 1000와트짜리 전구같이 모든 걸 환하게 만들고 분위기를 띄울 줄만 알아요. 중간은 없이 그 상황에 모든 걸 쏟아 붓거나 피하거나 둘 중 하나에요."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The curse of lovely> p.44 - 재키 마슨


내 생애 최초 엄마와의 건강하지 않았던 관계의 큰 그림을 깨닫고 나자, 이번엔 강탈당했던 '나'를 되찾은 행복과 안도감이 너무 컸던 나머지 온 세상이 마냥 아름다웠던 시기가 있었다.

이번엔 지나치게 싱글벙글하며 모든 사람에게 모든 걸 내주는 '호구'같은 사람이 되었다.

나의 '이용가치'를 알아본 사람들이 주변에 몰려들었다.


나는 어떤 상황이 만들어지면 '자동적으로' 그 사람을 어떻게 기쁘게 해야 할지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알고 행동했다.

여러 번이나 뒤통수를 호되게 맞고 나서야 그런 패턴들을 주의깊게 관찰하고 하나씩 깨 나가야 겠다고 결심했다.


인간관계에서 나는 완전한 '개방'과 '폐쇄', 두 극단을 오가며 살았구나.

문을 '반쯤만' 열줄도 알아야 하고 내가 원하는 사람들에겐 활짝 열되 싫은 사람 앞에선 매몰차게 문을 닫을줄도 알아야 하는구나. 

그러기 위해서는 내 감정과 욕구를 알아 차리고, 내 의견을 주장하며, 원치 않는 일은 '싫다'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다.


어째서 이 나이를 먹도록 나는 이런 것조차 제대로 못하는거야!! 하고 스스로가 한심해 지다가도 다시 마음을 고쳐먹곤 했다.

내가 자라는 동안 '싫다'라고 말하는 일들은 나에게 절대 허락되지 않았잖아.

역할모델이 '격렬함' 뿐이었으니, 지금부터라도 좋은 책을 찾아서 읽고 좋은 사람들을 보며 열심히 따라하면 되는거야.

모르는 건 하나 하나 배워 나가면 되는거야.


온갖 덜 자란 이상한 어른들은 다 받아주었으면서 정작 '진짜 미운 네 살'인 아이와 '거절하는 법', '아닌건 아니라고 말하는 법'을 연습하며 배우다니 뭔가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미소는 바람직한 것이다. 그러나 미소는 한결같이 얼굴에 달고 다닐 때가 아니라 필요한 상황에서 이따금 보일 때 한층 더 값지다.

<나는 단호해지기로 결심했다> p.151 - 롤프 젤린


나의 '한계'를 정하고 나니 모든 것이 한결 수월하게 정리되며 제자리를 잡아갔다.

예전엔 내가 '한계'를 갖고 있다는 생각이 싫었다.

'무한한 가능성'이 있다고 했는데, 왜 나를 좁은 곳에 가둬야 하나?


그런데 그 '한계' 혹은 '경계'라는 것이 영원하게 고정된 것이 아닌 유연한 것이라는 것도 깨달았다.

어쨌든 '현재의 나'의 한계선을 정확히 알아야 더 확장할지, 아니면 당분간은 여기에 머무르면서 내실을 키울 수 있을지를 알 수 있다는 것도.


하레를 위해 '내 모든 걸 다 내주고 싶지만' 그래서는 안된다는 것도 배웠다.

이렇게 또 한 번 마음고생과 심란함을 통과하면서 하레와 함께 나도 조금씩 성장해 나간다.




하레와 어린이집 같은 반 친구이긴 하지만 오고 가며 인사만 하고 지내던 아이 엄마가 있었다.

어느 날은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아이와 아이 엄마를 만났다.

우리는 공통점이 별로 없는 다소 어색한 사이였는데, 내가 먼저 적극적으로 아이의 칭찬을 하며 웃으면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그때 내 눈에서 갑자기 눈물이 줄줄 흐르기 시작했다.

전혀 '슬픈' 감정도 아니고 밝게 웃으면서 이야기하고 있는데, 그냥 눈물만 줄줄 흐르는 '이상한' 상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눌 때, 간혹 이렇게 슬프지도 않은데 눈물이 날 때가 종종 있었다.

지금까지는 안구건조증때문이려니 했는데, 안구건조증이 다 나은 지금은 아니다.

뭔가 이상한데?


문득 내 '진짜 감정'은 무시당한채 늘 좋은사람으로 사랑받고 싶어하는 게 슬퍼서 지금 '내 몸'이 울고 있는 거 아니야?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이 엄마'니까 혹시 내가 데면데면하게 굴다가 하레에게까지 영향이 가는 건 아닐까 지나치게 걱정하고 들이댔다.

여전히 진짜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럴지도 모른다는 가설을 세운 채 앞으로는 좀 더 내 감정에 충실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어색할 땐 그냥 어색하게 있자.

나를 싫어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냥 싫어하게 내버려두자.

내가 아닌 나로 사랑받기 보다 있는 그대로의 나로 미움받는 편이 차라리 낫다.

항상 이렇게 애쓰지 않아도 괜찮아.

나는 '훌륭한' 사람은 아닐지라도 꽤 '괜찮은' 사람이다.

인정욕구에 기반한 희생과 고통이 베이스가 되는 내 낡은 인간관계의 패턴을 이제는 멈추자.




우리가 목표로 삼아야 할 것은 바로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에만 좋은 사람 되기'인 것이다.

<모두에게 사랑받을 필요는 없다 The curse of lovely> p.50 - 재키 마슨


이 책에서는 타인이 처한 어려움에 내가 어떤 도움이 될지 확신이 안 될때는 그냥 '방관하라'고 조언한다.

그래, 타인에게 '공감'하고 '감정이입'하라는 교훈은 감정적으로 무덤덤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조언이야.

지나치게 공감하면서 만사를 '내 일처럼' 여기는 나같은 사람들은 그냥 좀 방관하고, 지나갈 줄도 알아야 한다.

길에서 뭔가를 팔거나, 전도를 하거나, 카드를 만들라고 호객하는 사람의 기분조차 상하게 하지 않으려고 너무 기를 쓰고 살았다.


목표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을 때만 되기'라는 말이 가슴을 때렸다.

착하게 생각하고, 행동하고, 말하는 것 자체는 아무 문제가 없지만 '그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불가능하고 갇힌 느낌이 된다면, 그건 분명히 문제고, 함정이다.

타인의 기대에 숨이 막히고 그 무게에 짓눌리면서도 변화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인정과 사랑을 갈구하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신의 에너지를 소중히 생각하고, 언제, 어떻게, 누구에게 사용할지 스스로 결정하기.

나는 다른 '성인'의 문제에 책임감을 느끼지 않을 권리가 있다.

나에게는 나를 우선시할 권리가 있다.

나에게는 거절할 권리가 있다.


'좋은 사람/부모 함정'의 핵심은 죄책감, 원망, 높은 기대를 깼을 때 야기될 분노에 대한 참을 수 없는 두려움이라고 했다.

이제 그걸 타인에게서 기대하지 않으니, 나는 함정에서 서서히 벗어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공감피로'라는 말도 너무 좋았는데, 원인이 된 신념, 행동, 패턴은 '학습'된 것이니, 얼마든지 '재학습'될 수 있다고 했다.

낡고 도움이 안되는 패턴은 얼마든지 부수고, 새로운 것으로 교체할 수 있는거야.

그저 낡고 도움이 안되는 패턴과 믿음을 '알아차리면' 된다.


저자는 '인식은 반드시 변화로 이어진다. 다만 시간이 걸릴뿐이다.'라고 설명한다.

변화의 여정에 나선 자신을 따뜻하게 바라보며, 앞으로 내딛는 걸음뿐 아니라 '뒤로 물러서는 걸음'도 허락하라고.

'공감어린 호기심'을 유지하라고 했다.

삶에 대한 능동적인 열린 태도, 온화하면서도 탐구적인 자세를 가져야지.


많은 사람들이 죽기전에 가장 후회하는 것은 '진정한 자신이 될 용기, 사랑하는 이들에게 진정한 자신을 알릴 용기를 가졌어야 한다는 것'이라고 한다.

나는 매일매일 조금씩 나 스스로도 잘 몰랐던 '진정한 나'에 다가가기 위한 연습을 하고 있다.

조금씩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자연스럽고 당당하게 드러내는 것도 연습하고 있다.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할까 하는 두려움을 조금씩 걷어내면서.


부모라는 존재가 중요하긴 하지만 또 '그렇게까지' 중요한 존재는 아니다.

하레는 뭐가 됐건 자기에게 주어진 인생의 '강력한 힘'에 이끌려 그 삶을 살아 나가겠지.

또 성장하기 위해서 스스로 극복해야 할 자기 몫의 고통도 있을테고 말이다.


결국 자연스러운 성장과정의 일부였던 하레의 눈물 속에서 내가 본 것은 '나의 상처와 아픔'이었다.

작고 어렸던 내가 혼자서 세상과 맞서야 했던 좌절과 두려움을 하레에게서 본 것이다.

그리고 그걸 '하레의 것'이라 착각하고 '이 작은 아이의 것쯤은'하며 다 해결하려 들고 있었던 건 아닌가?

그게 과연 하레를 위한 것인가?




타인을 기쁘게 해 주는 것이 당신 삶의 목적이라면 모두가 당신을 좋아하게 될 것입니다. 당신 자신만 빼고 말이지요. -파울로 코엘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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